반추동물을 반추하다

by 지구 사는 까만별




어릴 때 내가 살던 시골집에는 흙마당처럼 누런 소 한 마리가 있었다. 소는 집 한켠에 자리한 마구간에서 우두커니 우리 집을 지켰다. 경비만 해준 게 아니라 우리 밥상도 지켜줬다. 논밭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 겨울이 주었던 긴 휴식을 끝내는 기지개를 켜며 아버지와 같이 들에 나갔다. 한나절 밭을 갈다 해가 사라져 가면 아버지와 소는 함께 지쳐서 같이 절뚝거리며 귀가했다. 우리 가족이 방 안에서 밭에게 받은 것들로 식사를 할 때, 소는 제 눈알같이 희뿌연 전구알 아래서 가마솥에 푹 끓인 소죽과 작두로 썬 여물을 하루가 저물도록 마시고 씹으며 제 하루가 저물어가는 것을 반추했다.


가끔씩 신선한 풀을 먹는 날도 있었다. 큰언니의 발걸음에 맞추어 소는 집 앞동산으로 따라가고, 큰언니의 의도에는 없었겠지만 막내인 나까지 쫄래쫄래 따라갔다. 언덕배기 풀밭에 도착하면, 언니가 소 고삐를 풀어놓는다. 소는 특식에도 호들갑스럽지 않게 고요히 외식을 시작했다. 호들갑스럽다는 말에 가까운 것은 오히려 우리 자매였는데, 마치 소풍 나온 것처럼 책을 읽고 노래를 부르며 나른함을 날렸다. 주인네 아이들끼리 신나 버린 풍경 속에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풀을 뜯으며 저 멀리 보이는 부드러운 능선을 둘러봤다. 선하고 예쁜 큰 눈망울로. 비록 방이 아니라 마구간에서 살았지만, 소는 사실상 별채에 사는 우직한 우리 가족이었다.


그런 소가 정기적으로 새끼를 낳았다. 어미 소가 묵직한 산고의 시간을 겪은 덕분에 세상에 나온 송아지. 겁 많은 나는 송아지가 태어난 지 한참이 지나고서야 겨우 나가서 살펴본다. 조그마한 송아지가 지친 어미소 뒤로 보였다. 사람인 우리가 봐도 저리 귀여운데 어미인 소는 말해 무엇하랴. 어미소는 주야로 새끼를 핥아주고 송아지 등에 붙어있는 벌레도 제 꼬리로 대신 훌쳐준다. 그렇게 출산 후에는 밭을 나가지 않아 헐렁해진 시간을 송아지와 함께 평화롭게 보낸다.


그런 평화가 익숙해질 무렵에, 마을 어귀에서부터 우리 집 소 울음소리가 먼저 나를 마중 나오는 날이 꼭 생긴다. 그날은 아버지가 오일장에 송아지를 데리고 나가셨다가 빈손으로 돌아오시는 날이다. 어미 소는 내가 귀가하기 전부터 목이 쉬어라 터져라 지새끼 돌려 달라고 울었는지, 그렁한 눈물이 고인 눈망울엔 퉁퉁 불은 눈곱까지 끼어있다. 말 못 하는 짐승의 가혹한 팔자가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 나도 며칠 동안 소와 같이 운다. 내가 어미 소와 함께 울었다고 하더라도, 송아지를 판 돈으로 학교도 가고 밥도 먹었으니 나 역시도 착했던 누렁소에게 원망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생때같은 자식이 잠시만 안 보여도 숨이 덜컥 막히는데 그 길로 영영 자식과 생이별했으니 그 속은 어땠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고, 감히 아는 척도 못하겠다.


동산에서 풀을 뜯으며 머나먼 능선들을 둘러보면서 어미 소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우리 자매의 서투른 노래 위에서, 어미 소는 머나먼 능선 너머에 있을 배 아파 낳은 새끼들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한없이 선하지만 왜인지 그렁그렁했던 소의 눈은 사실 닿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슬픔 때문에 젖어 있었으리라...

내가 다음 생이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만약에 다음 생이 있다면 착했던 우리 집 소가 자식을 낳은 후 헤어짐 없이 오래오래 옆에서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