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을 하든 과정별로 최선을 다해야
5층에서 전주비빔밥 전문집을 하는 <춘원> 사장은 오전 9시 가게 문을 열자마자 깜짝 놀랐다. 다급하게 관리실로 전화를 했다. “지금 식당 바닥이 갈라져 올라오고 천장도 내려앉았어요. 빨리 와서 좀 보세요.”
전화를 받은 직원은 바로 5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5층 기둥은 20 센티미터 가량 금이 가 있고 천장은 뒤틀려 내려앉았다. <춘원>과 맞붙은 우동집 <현지>와 냉면집 <미전>의 천장도 가라앉고 있었다.
오전 10시에 출근한 A동(북관) 4층 상품 의류부 직원도 건물 4-5층에서 들려오는 '뚝뚝, 드르륵' 소리와 함께 약 3분간 무거운 진동을 느꼈다. 보고를 받은 백화점 사장은 오전 11시쯤 시설 이사, 건축과 차장과 함께 5층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1시간쯤 지나자 <현지>와 <미전> 천장에서 물이 쏟아지고 바닥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결국 5층 식당가는 영업을 전면 중지하고 출입을 통제했다. 옥상 에어컨 가동과 5층 입주업소에 가스공급을 중지했다.
이때라도 직원과 백화점 손님을 대피시켜야 하는데 손실을 걱정한 경영진은 영업을 계속했다. 오후 3시나 되어서야 건축사무소 소장과 구조기술자가 삼풍백화점에 도착했다. 붕괴 2시간 전인 오후 4시에는 임원 회의실에서 백화점 회장 주재로 2차 긴급대책회의가 열렸다. 건축사무소 소장은 칠판에 건물 구조도를 그려가며 "점검 결과 건물 안전에 중대한 이상이 발견됐으니 빨리 긴급보수를 해야 한다" 며 "백화점 영업을 중지하고 고객들을 대피시키라." 고 경영진에게 권하였다. 하지만 붕괴 2시간 전, 회장은 "큰 위험은 없으니 영업을 계속하면서 보수공사를 하자." 고 최종 결정을 내렸다. 붕괴 징조는 있으나 영업을 강행한 것이다.
그러는 동안 백화점 매장에서는 1천여 명이 훨씬 넘는 고객과 종업원이 아무것도 모른 채 쇼핑과 영업에 열중했다. 5시 50분부터는 "모두 긴급히 대피하라." 는 직원들 외치는 소리가 5층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건물이 우르릉 하면서 우는 소리도 들렸다. 몇몇 고객은 영문도 모른 채 대피했으나 지하에 있던 많은 사람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결국 오후 5시 57분, 5층에서 가장 약한 기둥 2개가 무너졌다. 기둥이 옥상까지 끌어당기면서 건물 붕괴는 시작되었다. 곧바로 가장 얇은 5층 바닥과 천장이 동시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때 백화점 5층 잔해와 콘크리트가 무너져 내리며 아래층을 차례대로 무너뜨리기 시작했고, 약 20초 만에 건물은 지상 5층에서부터 지하 4층까지 무너졌다. 안에 있던 1,500여 명은 잔해 속에 묻혀 버렸다.
삼풍백화점 붕괴 이야기다. 삼풍백화점은 왜 무너져 내렸을까? 전문가들이 진단한 첫 번째 원인은 무리한 구조변경이다. 처음에는 지하 4층, 지상 5층짜리 종합상가로 설계했지만 거의 다 지어졌을 무렵 갑자기 백화점으로 변경했다. 법률상 건물의 사용 용도에 따라 구조를 변경하려면 반드시 구조 전문가의 검토를 받아야 하는데 삼풍백화점은 무시하고 설계와 공사를 강행하였다.
두 번째 원인은 부실시공이다. 백화점으로 용도를 변경하면서 넓은 매장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상가건물의 벽을 없앴다. 본래 벽과 기둥이 같이 하중을 버텨 줬지만, 벽이 사라지는 바람에 기둥이 모든 무게를 견디게 된 것이다. 이 외에도 삼풍백화점 붕괴는 철근과 콘크리트 부족, 불법적인 용도 변경, 기본적인 안전 무시 같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무슨 일을 하든 과정별로 최선을 다해야
건물을 짓는 일이나 묵을 만드는 일. 과정 하나하나 순서를 지키고 정성이 들어가지 않으면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매 한 가지다. 묵을 만들려면 재료 선별―앙금내기―끓이기―식히기―보관까지 제조 전 과정 하나하나에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김선우 시인의 <단단한 고요>는 묵 만드는 과정을 소리로 표현했다. 모든 소리가 순서대로 차근차근 스며들어야 도토리묵 한모가 탄생한다.
마른 잎사귀에 도토리알 얼굴 부비는 소리 후두둑 뛰어내려 저마다 멍드는 소리 멍석 위에 나란히 잠든 반들거리는 몸 위로 살짝살짝 늦가을 햇볕 발 디디는 소리 먼 길 날아온 늙은 잠자리 채머리 떠는 소리 멧돌 속에서 껍질 타지며 가슴 동당거리는 소리 사그락사그락 고운 뼛가루 저희끼리 소근대며 어루만져주는 소리 보드랍고 찰진 것들 물 속에 가라앉으며 안녕 안녕 가벼운 것들에게 이별인사 하는 소리 아궁이 불 위에서 가슴이 확 열리며 저희끼리 다시 엉기는 소리 식어가며 단단해지며 서로 핥아주는 소리 도마 위에 다갈빛 도토리묵 한모
모든 소리들이 흘러 들어간 뒤에 비로소 생겨난 저 고요
저토록 시끄러운, 저토록 단단한,
-<단단한 고요>, 김선우
충남 논산 연산시장에서 3대 때 도토리묵 집을 하는 김성금(73) 씨는 기능성 도토리묵 제조과정으로 특허까지 받은 사람이다. 그만큼 도토리묵을 대하는 자세가 진지하다. 김 씨는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묵 만드는 과정을 설명했는데, 정리하면 이렇다.
도토리묵은 서민 음식이고 흔하지만 묵을 쑤는 일은 아무나 못 한다. 묵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햇볕에 바짝 말린 도토리와 상수리를 방앗간에서 빻는다. 겉껍질을 골라낸 뒤 곱게 갈아 2~3일간 여러 차례 물을 갈아주면서 담가 놓으면 쓴맛이 줄어든다. 녹말까지 걸러 내고 커다란 솥에 넣고 불의 강약을 조절하면서 끓인다.
끓는 묵을 커다란 나무 주걱으로 쉴 새 없이 저어 주지 않으면 바닥에 눌어붙어 묵의 양이 줄고 탄내가 난다. 과거 탄내가 나는 묵을 시장에 내놓으면 "오늘 묵은 별루여." 하고 한마디씩 던졌고, 김씨는 "이 집 묵은 한결 같어." 라는 말을 듣기 위해 뜨거운 여름에도 펄펄 끓는 솥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70년 묵을 쑤다 보니 바닥이 닳아 바꾼 솥의 개수는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다. 묵을 저을 때 사용하는 1m 길이의 대형 나무 주걱도 김 씨가 사용한 것만 수백 개다.
책을 쓰는 사람으로서 책 쓰는 과정을 보면 묵을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주제와 관련한 책을 쓰기로 했으면 우선 주제에 맞는 정보를 모아야 한다.(재료 선별). 모은 정보 중에서 주제에 딱 맞는 핵심을 골라내는 과정(앙금내기)이 있다. 초고를 쓰는 과정(끓이기)이 있고, 초고를 고쳐 쓰는 퇴고 과정(식히기)이 있다. 원고를 책으로 편집하는 과정은 보관 과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보관을 잘해야 싱싱하고 맛있는 묵을 손님상에 올릴 수 있듯이 편집을 잘해야 독자가 읽기 좋은 책이 된다.
다산 정약용은 글을 지으려는 사람은 먼저 독서 방법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며 우물 파는 과정에 비유했다. 우물을 파는 사람은 먼저 석 자의 흙을 파서 축축한 기운을 만나게 되면, 또 더 파서 여섯 자 깊이에 이르러 그 탁한 물을 퍼낸다. 또 파서 아홉 자의 샘물에 이르러서야 달고 맑은 물을 길어 낸다. 마침내 물을 끌어 올려 천천히 음미해보면, 그 자연의 맛이 그저 물이라 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또다시 배불리 마셔 그 정기가 오장육부와 피부에 젖어 듦을 느낀다. 그런 뒤에 이를 펴서 글로 짓는다. 이는 마치 물을 길어다가 밥을 짓고, 희생을 삶고, 고기를 익히며, 또 이것으로 옷을 빨고, 땅에 물을 주어 어디든지 쓰지 못할 데가 없는 것과 같다. 고작 석 자 아래의 젖은 흙을 가져다가 부엌 아궁이의 부서진 모서리나 바르면서 우물을 판 보람으로 여기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압축 성장과정에서 속도를 중시했다. 삼품 백화점이나 성수대교 붕괴사고는 순서를 무시하고 속도를 지나치게 중시한 불행한 결과였다. 커다란 빌딩을 올리는 일이나 작은 묵을 만드는 일이나 책이나 글을 쓰는 일이나 규모가 다르고 성격이 다르지만, 완성하려면 순서대로 잘 진행해야 한다. 과정을 무리하게 건너뛰어 성과를 내려고 욕심을 부리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중간에 뭐하나 삐끗하면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내리듯이 전체가 망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