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무너지고 내가 보였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왜 품고 살아야하는지 알게되었다.

by 미소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처음으로 들었던 게 중학생 때였던 것 같다. 그 때는 그 질문이 왜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나는 그냥 나일뿐인데, 굳이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인생의 큰 폭풍을 맞고 있는 지금, 이 질문이 얼마나 절실한 물음이었는지 깨닫고 있다. 그의 말에 흔들리고, 그와의 관계 속에서 나를 잃어보리고, 상처 앞에서 무너져 보니 '나는 누구지?'라는 질문을 자문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차츰 알아 가고 있다. 이 질문은 나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질문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반복해서 물어야하는 질문임을.


누구도 자신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가늠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정말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믿었던 사람이었기에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더 크게 흔들렸고, 그래서 더 깊이 무너졌다. 하지만 끝났다고 생각한 곳에서, 모든 게 무너졌다고 믿었던 바로 그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을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하고 있다. 무너짐의 끝이 진짜 '나'로 거듭나기 위한 시작점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거지? 내가 잘못 살아 온 걸까?' 하며 스스로에게 화살을 돌렸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누굴 탓하기 전에 나를 먼저 돌아보려고 했고, 상대의 부족함쯤은 내가 채워 주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힘들어도 함께라면 괜찮을 거라고, 지금의 시간이 지나고나면 상황은 분명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며. '긍정적으로 살자'는 내 삶의 좌우명이 지금까지의 삶을 지탱해주었기에 크고 작은 문제들 앞에서도 큰 흔들림없이 지나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그 모든 것이 통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순수한 마음을 본인의 쾌락을 위한 농락의 도구로 삼았기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행동들이 철저히 계산적이고 지극히 이기적인 선택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었기에.


행복했다고 생각했던 지난 13년 간의 결혼 생활을 다른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어. 내 자취방에서 시작했던 결혼 생활. 우리 부모님께서는 많이 속상해하셨지만 딸의 결정을 존중해 주셨고 믿어 주셨어. 그런데 너네 부모는 예단비를 생각보다 많이 가지고 오라고 했지. 다시 돌려주더라도 너네 형수랑 똑같이 받아야 나중에 말이 없다면서. 그 때랑 집안 사정이 달라졌음을 인정하고 싶지않으신가보다 하며, 그래 그럴 수 있다 생각했어.


결혼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큰 트러블이 있었지. 결혼 이야기가 나오기 전부터 난 너한테 분명히 말했었어. 우리 집은 기독교가 아니니 예배식으로는 결혼이 어렵다고. 넌 그 때 문제될 거 없다고 했지만 결국에 문제가 됐지. 그래서 난 너한테 헤어지는 게 좋겠다고 말했고, 넌 집에서 어떤 난리를 쳤는지모르지만 다시 허락을 받았다며 너네 가족들 식사 자리에 날 데리고 갔어. 그 날은 내 인생 최악의 날이 되었고.


식사 자리에 불러 놓고 너네 부모들은 본인들 뜻대로 되지 않은 결정에 화가 났는지 인사를 하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투명 인간 취급을 하더라.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주했던 그 상황은 상당히 불쾌했을 뿐 아니라 내 자존감까지 흔들리게 했어. 이후로도 이 날의 일은 마음 속 깊이 남아 불쑥 불쑥 떠올랐고, 괜찮아진 줄 알았던 순간에도 그 날의 장면은 예고없이 떠오르기도 했어. 난 이 날의 상처도 13년이 지난 후에야 너한테 터놓고 말할 수 있었어. 올해 네가 하도 너 힘들다는 말만 하는거에 지쳐서. 몰랐다는 너의 대답, 당연한거겠지만 넌 다른 사람 상처는 중요하지 않은 새끼니까 그 때도 나는 안 보였을거야. 그냥 결혼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을테니.


/너를 의심하는 기간에 내가 물었던 질문에 대한 너의 대답이 모든 걸 다시 되짚어 보게 만들었어. 내가 물었지. 나랑 왜 결혼이 하고 싶었냐고. 그랬더니 그 때 너한테는 내가 탈출구였다는 말이 되돌아왔어. 사랑이 아닌 탈출구. 그 때의 상황을 피하고 싶었던 너의 탈출구. 지금 네 앞에 놓인 상황에서 네가 보이는 태도를 보면서도 느끼고 있어. 넌 너의 앞에 닥친 문제를 제대로 보지 않으려 하고 주변을 탓하거나 피하는 데만 급급한 놈이란걸./


그렇게 결혼을 했고, 넌 잘 다니고 있던 기간제를 그만 둔다고 그러더라 사람 관계가 힘들다고. 그게 아니라 결혼할 때 잠깐 내보일 직업이 필요했고 이제는 목적 달성을 했으니 힘들게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더니 대학원을 간다고 하더라. 그 사이 아이도 생겼지만 넌 경제 활동을 할 생각이 없더라. 나한테 돈을 달라고 한 적은 없었으니 기다리면 되겠다 싶었어. 그렇게 대학원 3년을 마치고 그 쪽으로 진로를 선택하려고 했는데 지도 교수가 적성에 맞지 않으니 다른 일을 해 보는 것이 좋을 것 다는 말에 상처를 받고 넌 자격증만 얻고 끝을 냈지. 넌 그 때 정말 힘들었다고 말했지만 누군가 너의 잘못을 지적하는 걸 굉장히 싫어했던 걸 보면 쓰레기같은 자격지심에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있어서 그랬었던거야. 당연히 실수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는 건데 넌 그걸 견딜만한 아니 그걸 감수하고 노력할만한 마음이 없었던거야. 인생 편하게만 살려고 했던거지.


그리고나서 시작된 아버지와의 동업. 말이 동업이지 불어나는 빚을 감당해야했고, 너네 부모 생계도 책임져야했고. 겉으로는 엄청난 효자처럼 보였을거야. 실제로는 마땅한 직업도 없었고, 입으로는 건물도 지었을 너니까 니가 하면 잘 될 수 있을거다 생각해서 시작했는데 말이지.


그 때부터 너의 진가가 발휘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부모에게 아주 작은 일에도 불같이 화를 내고, 결국엔 대화를 문자로 주고 받는 모습을 보며 처음엔 아버님이 얼마나 힘들게 하면 저렇게 하나 싶었어. 글을 쓰다 보니 한 가지 일이 떠오르네. 출근해서 일하고 있는데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아버님이랑 싸워서 지금 기분이 그렇다고, 나보고 와서 아들 어린이집을 데려다 주라고 했지. 어이가 없었지만 뭔 큰 일이라도 난 줄 알고 난 급하게 외출을 달고 집으로 달려왔고, 집에 들어가서 보니 너네 엄마가 설겆이를 하고 있더라. 화난 너를 달래러왔었나보지. 난 아무말도 안하고 아들을 데리고 나와 어린이집으로 데려다주고 다시 회사로 갔고.


죽고 싶다고 말하는 너한테 난 그 어떤 불평도 할 수 없었고, 생활비를 달라고 하기는 커녕 일이 힘들면 그만 둬도 된다고 했어. 내가 벌어도 세 식구 생활하는 데는 문제없으니까. 그래, 난 너한테 모든 게 진심이었어. 가족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넌 아니었던거야. 너희 집에서 탈출을 해서 안전한 울타리에서 호위호식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음 편하게 니가 하고 싶은 거 마음대로 하면서 살았으니 얼마나 좋았니? 다른 사람에게 농담인 척 나를 우리 집 가장이라고 말하던 너. 그게 너의 진심이었던거야.


그러면서 넌 다른 사람들한테는 엄청 우리 집에 신경쓰는 척, 농사일 도와드리며 착한 사위인척 살았지. 내가 척이라고 하는 이유는 스스로 나서서 했던 일임에도 니 입장이 불리해질때면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싶다면서 너네 부모도 부담이고, 우리 가족도 부담이라는 말을 해버렸기때문이야. 세상 너 같은 쓰레기가 또 있을까싶다.


그래놓고 이제와서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고?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니? 너의 밑바닥을 봐버렸고, 모든 게 쇼였다는 걸 알아버렸는데.


화목한 가정은 보기 좋은 이유일거고, 넌 그저 남들에게 그럴싸하게 보일 평범한 가족의 모습이 필요한거겠지. 가장으로서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안전한 울타리가 사라지는 게 두려운 거겠지.


이제 나는 그냥 ‘나’로 살아갈거야. 너를 알기 전의 원래 나의 모습을 찾으며.

더이상 나를 설명하는 데 너라는 존재는 필요없게 됐으니 제발 질질 끌지말고 단념해주면 좋겠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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