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한 번도 묻지 않은 말

나를 아끼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말로 나를 안아주었다.

by 미소

이혼을 결심한 뒤 너를 대하는 내 모습을 보며 내가 이렇게 차가울 수 있는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이렇게 말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도.


'내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고 믿었던 만큼 충격이 컸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 끝없이 반복되는 거짓말 속에서 너에 대한 감정이 모조리 사라지고 이성적 판단만 남았기에 나도 몰랐던 '낯선 나'를 마주할 수 있었어.


그렇지않았다면 난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혼자 속앓이를 하고 있었겠지. 너는 내가 그럴거라고 생각하고 있을거야. 마지막으로 만나서 할 말이 있다고 찾아왔던 날,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다며 넌 말을 했지만 진심이 아니라는게 너무 티가 나더라. 그 날의 대화에서도 주어는 내가 아니었거든. 계속 너는 니가 주인공이더라고.


"내가 이렇게 힘든데 너는 얼마나 더 힘들겠니?"

넌 나를 위로한답시고 던진 말이겠지만 그 말의 본심은 네가 얼마나 힘든지를 알아달라는 거겠지. 무릎이라도 꿇고 사과하고 싶은데 내가 싫어할거같으니까 하지 않는다고? 무슨 코미디도 아니고. 진짜 용서를 구하고 싶은 사람은 그런 계산을 안해. 세상 만만하게 생각했던 나한테 무릎까지 꿇고 싶지 않았겠지.


내가 출근했을 때 우리 집을 찾아와 부모님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도 한낮 쇼였던 거 알아. 그 전날 내가 퍼부은 말 속에서 힌트를 얻었겠지? 무릎꿇고 울며 불며 사정사정해도 모자를 판에 들킨 것에 대한 화풀이부터 하는 게 맞느냐고 따져물었었지. 그랬더니 다음 날 무릎을 꿇더라. 나한테 꿇어야 맞지. 넌 그냥 그렇게까지 했다를 보여주고 싶었던거야. (이 날의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답변서를 읽으며 알겠더라. 나쁜 새끼.)


예전의 나였다면 주변 사람들을 걱정시키는 것보다 혼자 알아서 일이든, 감정이든 처리하려고 했었을거다. 울어야 할 순간에도 웃으며 넘겼고, 버거운 마음도 ‘내가 좀 견디면 되지, 힘들면 되지.’하며 눌러 담는 쪽을 선택했을테니.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던 나였기에. 그런데 이번 일은 혼자서 감당하기엔 그 크기와 깊이가 너무나 컸다. 하루를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고, 마음은 이미 무너진 뒤였기에, 이번엔 내가 먼저 누군가의 손을 붙잡고만 싶었다.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은 내가 내민 손을 참 따뜻하게도 잡아주었다. 사랑하는 엄마, 아빠, 언니, 오빠, 형부는 각자의 방식대로 나를 일으켜 세워주고 있다. 섣불리 위로하려고 하지도 않고, 당장 답을 내놓으려도 하지 않은 채 언제나 그랬듯 날 믿어 주고 나는 그냥 나일뿐이고, 내가 가장 소중하다는 걸 잊지 말라고 말해주고 있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몇 해 전 우리 곁을 떠난 친구를 보낼 때보다 더 크게 오열하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친구 앞에서 시원하게 울려고 했었는데 내가 친구를 토닥여 주어야했다. 내 일이 지금까지의 자기 인생에서 가장 큰 일이라며 나한테 그런 일을 저지른 너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며 뭐든 함께할테니 약해지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는데 내 마음이 묘하게 편안해졌다. 누군가가 이렇게까지 내 편이 되어 분노해 주고, 함께한다는 말 한마디에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껴졌던걸까.


발령 동기인 언니들과 친구와의 모임을 앞두고 미리 말을 해야할 것 같아서 톡방에 이혼한다고 메세지를 보냈더니 이유를 묻지 않고 나의 결정을 존중한다며 응원을 해 주었다. 다른 사람같았으면 ‘왜?’를 먼저 물어겠지만 내가 그런 말을 보냈을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다싶었다며.


나의 힘듦을 온전히 이해하려고 한 사람들은 위로의 방식과 표현은 다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밥은 잘 먹고 있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이유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 질문은 그저 오늘을 버텨내고 있는지, 아직 나를 돌볼 힘이 남아 있는지를 조심스럽게 확인하는 말이었다.그래서 그 짧은 한마디가, 어떤 위로보다 오래 마음에 남았다.



넌 나에게 용서를 구한다며, 내가 많이 걱정된다며 말은 했지만 단 한 번도 나에게 건넨 적이 없는 말이 바로 그 안부였어. “밥은 잘 먹고 있지?”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말. 마음이 진짜로 향하지 않으면 끝내 닿지 않는 질문. 그래서 나는 알 수 있었어. 어떤 말은 입에서 나오고, 어떤 말은 마음에서 나온다는 걸.

또, ‘진심’이라는 말은 너와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는 것도. 아니 감히 꺼내서도 안되는 말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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