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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아들, 그리고 여자친구

내 아들과 당장 헤어져

by 디어리사

A중대장은 난리도 아니었다고 했다.


A중대장은 여자친구와 기본 살림을 차린 것은 물론, 귀여운 강아지와 고양이까지 함께 살고 있는 ‘대가족’이었다. A중대장은 그런 집을 중대장의 부모가 다 엎었다고 설명했다.


문자 그대로, 집의 살림을 전부 뒤엎었단다.


중대장의 부모는 훤칠한 자신의 아들이 어떤 집안에서 자란 여자인지도 모르는 사람과 혼인도 전에 살림을 차렸다는 사실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장장 5-6시간의 거리를 어떤 마음으로 운전해 왔을까.


주말도 아닌 평일에, 중대장은 부모님이 올라오신다는 이야기에 하루 휴가를 냈다. 여자친구 혼자 부모님을 만나게 할 순 없으니.


전운이 감돌았다.




부모님이 차에서 내려 본 아들의 집은 형편없었다. 이 시골에서 구할 수 있는 집이 어디 괜찮기 쉽나.


빌라 호실의 회색 문을 여니 보이는 좁은 투룸에 빼곡한 낯선 여자의 옷과 하나뿐이 없는 단란한 침대. 중대장의 부모는 눈앞에 펼쳐진 장면이 그저 꿈이길 바랐다.


“엄마, 오셨어요? 여긴 좁은데 식사나 하러 가실까요? “


오랜만에 보는 아들의 얼굴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부모는 아들의 뒤로 보이는 조신하게 두 손을 모은 여자가 꼴도 보기 싫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 뒤로는 피만 안 튀겼지 정말 끔찍했다.


중대장과 여자친구의 옷은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널브러져 버리고 매일 저녁을 해 먹던 부엌의 식기류와 냄비는 전부 꺼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고양이는 숨었고, 강아지는 흥분해 짖었다.


집을 뒤집고 나서야 속이 좀 풀렸는지, A중대장의 부모는 여자에게


“내 아들과 헤어지고 이 집을 정리해요. 원래 살던 곳으로 빨리 갔으면 더 좋겠네요.”라고 했다.


그렇게 A중대장은 본인의 짐을 싸들고 원래 본인이 살던 독신숙소(미혼 간부는 군에서 운영하는 독신숙소를 1개씩 받는데 대부분 2000년도 되기 전에 지어진 오래된 집들이라 상태가 많이 노후화되고 하자가 많다)로 돌아왔다고 했다.


A중대장이 3일 동안 출근을 하지 못했던 건 뒤엎어진 집을 다시 원래 모습으로 복구해야 했으며 부모님이 다시 대구로 내려가시자마자 독신 숙소에 옮겨 둔 짐을 다시 여자친구의 집으로 옮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작전적 후퇴였다.




“부모님이 그렇게 반대하시는데, 그냥 헤어지고 다른 사람 만나. 더 좋은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


묵묵히 고기만 겨우 씹어 삼키던 세 중대장 중 가장 선배인 C중대장이 입을 열었다.


A중대장은 이야기하느라 먹지 못한 고기를 한 점 입에 게걸스럽게 넣으며 대답했다.


“저는 부모님이 반대하신다고 지금 만나는 사람과 헤어지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어차피 제 인생인데 제가 선택한 대로 살고 싶고 부모님의 반대는 나중의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일단은 만나보려고 합니다. 지금 당장은 부모님이 제가 여자친구와 헤어진 줄로 아셔서 메신저의 프로필 사진만 다 지운 겁니다.”


태연했다. 당장 함께 할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만이 위안이 되는 것 같아 보였다.


중대장들은 말없이 고기를 씹어 삼켰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이 중대장이 철이 없다거나 걱정이 된다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과감히 그 걱정을 고이 접어 다른 곳에 모셔두라고 조언하고 싶다.


드라마에서 단골 소재로 다루는 그런 진부한 ‘아들을 너무 사랑하나 아들의 여자친구는 사랑해 줄 수 없는 부모에 대한’ 스토리 중 한 장면일 뿐이고, 그게 공교롭게도 필자의 주변에 일어난 것뿐이다.


그리고,


오늘 밤은 남자들이 모였다. 남이 뭘 어떻게 하든 그리고 뭐가 어떻게 되든, 그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늘 모임의 목적은 C중대장의 일탈이었고, PC방에서 기가 막힌 게임을 하면 그만이었다.


중대장들은 식사를 마치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들은 이야기는 내일이 되면 다 잊히고 사라질 것이었다.




나이가 든 탓인지 밤을 지새우며 하곤 했던 게임을 이젠 몇 판 하지도 못한다. 아쉽지만 다들 피곤한 눈을 꿈뻑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막내 중대장은 오늘도 막내 역할을 톡톡히 한다. 식탁에 수저를 깔고 선배들의 오른편에 물이 적당히 담긴 물컵을 놓는 자잘한 일부터 다 같이 한 차로 온 선배들을 집 앞에 내려주는 것까지가 오늘 막내가 선보여야 할, 위계질서가 팍팍한 군대식 후배의 임무다.


“다들 잘 들어가라.”


두 중대장이 차에서 내렸다. 이제 마지막 A중대장만 남았다.


“집이 어디십니까? 집 앞에 내려드리겠습니다.”


“아니야 됐어. 그냥 이 골목에 세워줘. 내가 걸어 들어갈게.”


빌라가 가득 세워진 동네 앞이었다. 탁월한 공간 지각 능력으로 운전을 배운 지 일주일 만에 좁은 골목을 마스터한 B중대장은 눈앞의 아담한 골목도 금방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후배가 차를 빼기 어려울까 봐 배려한 것이었다면 못 이기는 척 B중대장이 한 번 더 집 앞에 내려드리겠다고 이야기했을 수도 있겠지만 B중대장은 구태여 그렇게 하지 않았다.


본인이 어디 살고 있는지 알리고 싶지 않은 듯한 A중대장의 말투 때문이었다.


A중대장은 여자친구처럼 비밀이 늘고 있었다. 그것도 앞뒤가 안 맞는 비밀이.


대대원 그 어느 누구도 A중대장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몰랐다. 막내 중대장만 A중대장의 집이 그 골목 근처라는 것만 아는 것이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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