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오늘 밥 챙겨 먹기 진짜 귀찮네.”
딱히 이유는 없이 만사가 다 귀찮은 날이 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몸 주인의 상태가 어떻든 간에 내장기관은 쉬지 않고 착실히 일하고 있는 것인지, 배가 몹시 고팠다.
진작 뭐라도 먹었어야 했는데, 그마저도 귀찮아서 버티고 버티다가 한계가 온 것이다. 한두 시간 전에 햄치즈 토스트를 먹으며 배부르다고 자투리를 남길 땐 이렇게 금방 배가 고파질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 몸은 왜 이리 연비가 안 좋은 걸까.
허기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뭐라도 먹어줘야 했다. 냉장고에 딱히 먹을 건 없고. 배달앱을 둘러봐도 영 끌리는 게 없다. 결국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작은 가방에 지갑만 넣어서 무작정 밖으로 향했다.
가볍게 김밥 한 줄을 먹을까 생각해도, 단골 김밥집까지 가는 길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땡볕에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도보로 왕복 이십 분을 소요하고 싶진 않았다. 근처 다른 음식점들도 끌리지 않아 서성이던 발걸음은 결국 코앞에 있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삼각김밥이나 하나 먹지 뭐.”
삼각김밥만 하나 사려했던 손이 멈칫했다. 삼각김밥 아래에 진열되어 있던 낙지 비빔밥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오!”
이게 삼각김밥보다 든든하고 맛있을 것 같은데?
곧장 집으로 돌아와 낙지 비빔밥의 포장을 벗겨내니 즉석밥 하나와 낙지볶음, 깨와 김자반, 참기름이 들어 있었다. 제법 구색을 갖춘 내용물로 보였다. 이 정도면 평타는 치겠지? 즉석밥을 데워서 재료들을 넣고 섞어주기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히 완성된다니.
귀차니스트의 한 끼로 손색이 없다.
“어디 맛을 한 번 볼까? “
에엥. 이거 뭐야. 낙지볶음이 아니라 낙지 젓갈이잖아? 기대했던 맛이 아니었기에 순식간에 실망감이 몰려왔다. 젓갈이라 그런지 밥을 넣어 비볐는데도 엄청 짰다. 얼굴에 오만상을 쓰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이대로는 도저히 못 먹겠다.
“이걸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긴급 구조에 들어가야지.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비장한 발걸음과 진지한 눈빛으로 맛이 죽어있는 낙지 비빔밥을 소생시킬 재료를 스캔했다. 파, 양파, 호박, 당근을 찾았다. 냉동실에 소분해 두었던 스위트콘까지 투입해야지.
아니, 이런 재료가 있었는데 난 왜 요리를 안 하고 귀찮게 밖에 나가서 맛없는걸 사온 걸까. 요리하기 귀찮다고 불평하다가 더 큰 귀찮음을 직면하다니.
으휴, 이런 멍청이.
뒤늦은 후회를 하며 야채들을 대강 썰어서 프라이팬에 살짝 볶아줬다. 그다음엔 야채가 볶아진 프라이팬에 낙지 비빔밥을 넣고 한참을 약불로 뒀다. 프라이팬과 맞닿은 비빔밥 아랫부분이 노릇하게 눌어붙어 누룽지같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예전에 자주 가던 음식점에서 맛있게 먹었던 ‘낙지 돌솥 비빔밥’처럼 말이다.
“치즈, 치즈가 있어야 했는데….”
치즈가 읎네. 읎어. 이런 비상시를 대비한 치즈는 냉장고나 냉동실에 보유하고 있었어야지!
준비성이 부족한 스스로를 탓했다. 양배추랑 치즈만 있었더라면 음식점에서 사 먹는 것과 더 비슷해질 수 있었는데. 아쉽지만 없는 것을 어찌하리. 이 정도에 만족하자.
그래도 이왕 업그레이드하는 김에 계란국 까지는 추가해 볼까? 냄비에 물 올리고, 육수 한 알 퐁당, 맛소금 조금, 간장, 다진 마늘을 넣어준다. 거기에 휘휘 풀어둔 계란을 넣고, 후추와 파를 뿌려주면 간단히 완성이다.
비빔밥이 노릇하게 눌어붙은 프라이팬을 통째로 테이블 위에 올렸다. 프라이팬의 옆에는 따끈한 계란국을 두고, 냉장고 안에서 곤히 자고 있던 단무지와 김치를 꺼내니, 귀찮아서 대충 먹으려던 밥상이 몰라보게 훌륭해졌다.
보기에만 훌륭해진 것이 아니라 맛도 훌륭했다. 낙지 비빔밥의 매콤 짭짤한 맛이 입 안을 강렬하게 채운다. 추가된 재료들이 짠맛을 중화시켜 주고 식감을 더해주었다. 특히 볶은 양파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단 맛이 짜고 매운맛 밖에 없던 기존의 비빔밥에 감칠맛을 더했다. 성의 없는 맛 일색이었던 젓갈 비빔밥이 비로소 그럴듯한 낙지 비빔밥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저 재료 몇 가지가 추가되었을 뿐인데, 이렇게나 다른 맛이라니. 놀라운 일이다.
맛있는 것이 몸 안에 들어가자, 내 안의 귀차니스트가 잠잠해졌다. 귀찮다고 맛없는 낙지 젓갈 비빔밥을 그냥 먹지 않고, 약간의 수고를 더해 맛있는 비빔밥으로 재탄생시킨 나 자신을 칭찬해 주었다.
“잘했네. 잘했어.”
귀찮음을 무릅쓰니까 이렇게 결과가 확 달라지잖아. 응?
그러니까 어느 날엔가 또다시 귀찮음이 나를 찾아와 무기력하게 한다면, 기억하는 거야.
오늘 먹은 젓갈 비빔밥과 낙지 비빔밥의 맛을.
귀찮다고 대충 날로 먹으려다 실패하면 결국 다시 수고해야 하니까. 두 번 일하지 않게 처음부터 잘하자. 알겠니? 그리고 냉장고에 치즈 좀 채워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