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은 약이 아니다. 그것은 몸이 다시 낮을 믿게 되는 첫 번째 언어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해를 보지 못하고 살았다.
출근길에는 새벽 별을 보았고, 퇴근길에는 달빛이 나를 배웅했다.
낮의 빛은 나와 상관없는 세계였다.
병원의 인공조명 아래에서 하루를 보내고,
컴퓨터 모니터의 푸른빛으로 밤을 채웠다.
나는 낮과 밤의 경계를 잃은 채 살고 있었다.
휴가는커녕 햇빛을 쬘 여유조차 없었다.
진료와 강의, 연구와 논문, 행정 업무까지
모든 일이 ‘실내’에서 이루어졌다.
하루 종일 환하게 켜진 조명 속에 있으면서도,
내 마음은 어둠 속에 있었다.
자율신경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그 시기,
형광등조차 내게는 너무 강했다.
불빛이 머리를 자극하고, 눈이 시렸다.
그래서 나는 방 안의 불을 끄고,
커튼을 닫은 채 지냈다.
그 어둠 속에서만 겨우 안정을 느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몸이 빛을 감당하지 못할 만큼 지쳐 있었다는 신호였다.
교감신경이 과도하게 흥분하면, 빛에 대한 감각도 예민해진다.
시신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시상하부에 전달되어
멜라토닌 분비를 억제하고 각성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분비시킨다.
하지만 자율신경이 무너진 상태에서는 이 메커니즘이 혼란을 일으킨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빛’을 피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혼다식 구취조절법의 교재를 읽다가
이 한 문장에 눈이 멈췄다.
“아침의 햇빛은 생리적 리듬을 조정하고,
타액 분비를 촉진하며, 부교감신경을 깨운다.”
단순히 입냄새 조절을 위한 생활수칙이라고만 생각했던 문장이
그날 따라 다르게 읽혔다.
‘이건 구취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구나.’
나는 결심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면 커튼을 열겠다고.
그 약속을 지키는 데 며칠이 걸렸다.
처음엔 커튼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조차 버거웠다.
눈이 따갑고,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빛을 맞는 동안
가슴이 조금 따뜻해졌다.
빛은 무섭지 않았다.
내 몸이 잊고 있던 ‘낮의 기억’을 깨우는 듯했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아침 10분씩 햇빛을 쬐었다.
커튼을 활짝 열고, 손끝에 닿는 빛의 온도를 느꼈다.
처음엔 눈을 뜨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햇빛을 맞으면 눈이 시원해졌다.
심장은 느리게 뛰고, 호흡은 길어졌다.
몸의 시계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빛은 자율신경의 리듬을 재설정한다.
아침 햇빛이 눈을 통해 들어오면
시상하부의 시교차상핵(SCN)이 활성화된다.
이 신경핵은 ‘이제 낮이다’라는 신호를 전신에 보낸다.
그 순간 멜라토닌은 멈추고, 세로토닌이 분비된다.
세로토닌은 행복 호르몬이자, 멜라토닌의 원료다.
즉, 아침의 빛이 저녁의 잠을 결정한다.
나는 그 생리학적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제야 비로소 그 의미를 ‘몸으로 이해했다’.
햇빛은 약도, 자극도 아닌,
몸의 언어였다.
그 후로 나는 아침 루틴을 만들었다.
커튼을 열고, 창가에 앉아 향을 피운다.
그날의 향은 베르가못이다.
햇빛의 냄새와 닮은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
아침 공기와 섞이며 마음을 맑게 만든다.
햇빛이 향기와 만나면,
마음은 잠들어 있던 리듬을 깨운다.
그리고 아침밥을 먹는다.
혼다식 구취조절법에서도 강조하듯
‘아침밥, 햇빛, 수면 리듬’은 구취뿐 아니라 신경 균형의 3대 축이다.
따뜻한 한식, 밥과 된장국, 달걀 한 개.
그 단순한 식사가 하루의 리듬을 안정시켰다.
나는 이제 아침마다
햇빛을 맞으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이 빛은 어제의 내가 아닌, 오늘의 나를 비춘다.”
햇빛은 내게 용서와 같다.
밤의 불안을 덮고,
어둠 속에서 웅크렸던 나를 다시 세워준다.
나는 그 빛을 맞으며 안다.
자율신경의 회복은 결국 ‘빛과 어둠의 균형을 되찾는 일’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