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톤(Lipton).
빨간 배경에 하얀색으로 쓰인 글씨는 노랑 포장 덕분에 눈에 확 띈다. 슈퍼나 가성비 좋은 음식점이나 간이매점 등 아주 대중적인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마주쳤던 브랜드가 립톤이다. 한때는 홍차를 주문하면 립톤 티백이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홍차라고 하면 반사적으로 립톤이 연상되기도 했다.
내가 처음 만난 홍차도 립톤 티백이었다. 딱히 맛있다고 할 수 없었지만, 홍차를 마시려면 립톤 티백을 사곤 했던 시절이 있었다. 알고 보니 립톤은 이 회사를 설립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서양의 많은 회사가 그런 것처럼, 립톤 역시 본인의 이름을 따서 회사 이름을 만든 것이다.
립톤이 홍차 회사를 일구어 간 인생이야기는 영국 제국주의 시절 홍차 발달사를 그대로 반영한다. <차의 세계사>와 <행복한 홍차 시간>에서는 립톤의 모험적인 사업 이야기를 소개한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토마스 립톤은 19세기 중반인 십 대 시절에 미국에 가서 이일 저일 경험하면서 사업하는 방법을 익혔다. 이후 고향인 글래스고로 돌아와서 식료품체인점을 세워 부를 축적한다. 빅토리아 시대였던 당시는 홍차가 대유행이었는데, 립톤은 산지에서 직접 홍차를 공수해 판매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우연히 들른 실론(지금의 스리랑카)에서 차를 재배하는 것을 보고 우바의 다원을 매입해 차 생산을 시작한다.
사실 실론 섬은 유럽인들이 커피농장을 경영하던 곳이었다. 갑자기 커피나무를 죽이는 전염병이 발병해서 모두 무일푼이 되어 섬을 떠날 때, 커피농장에서 일하던 제임스 테일러라는 스코틀랜드 인은 차나무로 관심을 돌렸다. 테일러는 마침내 1867년 실론 섬 최초의 상업적인 차농장을 개척한다. 이를 보고 커피농장주들은 발 빠르게 새로운 작물인 차나무 재배를 시작한다. 실론이 차 생산지로 이름을 날리게 되자, 1883년에는 콜롬보에 차 경매장까지 설립된다. 이 경매장은 지금도 운영 중이다.
립톤이 실론 섬을 방문한 1890년은 차의 재배가 궤도에 오른 시점이었다. 립톤은 커피농장을 헐값에 사들여 차나무를 재배해서, 노동계급도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저렴한 가격의 차를 만들었다. 립톤이 처음으로 다원을 산 해가 1890년이었는데 불과 5년 만인 1895년에 왕실에까지 차를 납품하게 된다.
런던과 파리의 만국박람회는 립톤 홍차가 영국제국의 식민지에서 이룩한 성공담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다. 차는 더 이상 중국의 문물이 아니라,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와 실론의 이국적인 열대에서 만들어진 매혹적인 음료였다. ‘다원에서 티포트로’라는 모토로 대대적인 광고를 하는 립톤은 실론과 동의어가 되었다.
대중적인 기호식품인 홍차, 그리고 대표적인 브랜드인 립톤. 걱정할 것 하나 없이 영원히 돈을 긁어모을 것 같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유니레버라는 회사는 여러 가지 차브랜드를 사들여 몸집을 키운 차 산업의 대표주자였다. 립톤도 1972년에 유니레버에 인수된다. 하지만 소비자의 취향이 고급화되고 다양화되면서 허브티나 커피의 수요가 증가했고, 대중적인 홍차 시장은 더 이상 예전처럼 수지맞는 장사가 되지 못했다. 결국 유니레버는 2022년 회사가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차 브랜드를 사모펀드에 매각했다. 립톤 역시 매각된 브랜드 중 하나이다.
앞으로 립톤은 어떻게 될까? 백 년도 더 된 브랜드의 가치와 아우라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겠지만 창창대로의 앞날은 이제는 옛 이야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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