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前남편의 어머니 만난 날
솜이와 갑작스런 이별 후 바닥이 어딘지 모르는 무기력에 빠져 먹고 싶지도 자고 싶지도 않은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이 슬픔과 무기력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아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난히 내 감정 변화를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고등학생 딸래미 때문이라도 빨리 기운을 차려야 한다.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웃긴 영상도 찾아보고... 나름대로 몇 달을 기를 쓰고 살았다.
점점 나아진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 만나는 건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 연말에도 모든 모임을 취소하고 칩거(?)를 하며 나름 내 마음 읽기에 집중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주부터 이상하게 사람들이 보고 싶어 진다.
왜일까?
일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 성격 급한 나는 후다닥 연락을 해서 약속을 줄줄이 잡았다.
쉽사리 만남을 갖기 어려웠던 이들이 특히 더 보고 싶었다.
오늘.
지난주에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이상하게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내 前남편의 어머니.
큰며느리였던 나를 많이 배려해 주시고 이뻐해 주 셨는데, 불의의 사고(?)로 아들 며느리가 이혼한 후 보고 싶어도 연락하기 껄끄러운 사이가 되고 만 것이다.
이혼한지 어느새 15년.
두돌된 딸래미를 혼자 키우면서 원망도 많았고 먹 고 사는게 힘들어 누굴 챙기는게 사치였던 지난 세 월. 나이 50이 넘어가면서 이젠 원망도 미움도 서 서히 희석 되어 간다.
세상에 이유없는 일은 없다고 하지 않나.
지나고 보니 고통과 괴로움도 다 이유가 있어 생긴 일인 것이다!!!
당시에는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는데, 세월이 훅 지나고 나니 그것도 추억이 되어버리네.
암튼 내 前시어머니를 뵈러 갔다. 그토록 이뻐해 주시던 손녀딸과 함께.
이혼 후 10년만에 만난 시어머니와 나는 한참을 울고 또 울었다.
그간의 세월동안 서로의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가 남았는지.
당시 알츠하이머 초기 상태였던 어머니는 그닥 증세가 심하지 않아 제법 먼 일들도 다 기억해
내시고 대화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당신 아들이 잘못했다며, 당신이 미안하다 미안하 다 하셨다.
손녀한테 삐뚤삐뚤 사랑한다는 글씨를 정성껏 적은 봉투에 용돈도 주셨더랬다.
늘 정갈하시고 옷도 세련되게 입으시던 어머니. 집에서도 흐트러짐 없으시고 홈웨어도 이쁜옷만 입으셨다.
10여년만에 만난 어머니와 나, 그리고 울 딸은 가끔 만나서 밥도 먹고, 얘기도 나누면서 잘 지냈 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터지고, 괜히 면역 약한 어머니 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안되지 싶어 가끔 전화 드리고 만나는건 삼가했었다.
그렇게 또 소원하게 지내다가 몇 년만에 오늘 다시 만나기로 한것이다.
엊그제 어머니 생신이셨는데, 뭘 선물할까 하다가 이쁜 옷을 사드리고 싶어 백화점에 갔다.
요즘 상태가 안좋으시다는 얘길 들은 터라 더 악 화되면 그나마 옷입고 외출도 힘들어 하실거 같아, 이쁜 가디건 하나와 거위털 외투를 샀다.
정갈한 어머니와 잘 어울릴 거 같다.
딸래미는 할머니 드린다고 케잌도 장만해서 어머니 댁으로 향한다.
그래도 우린 기억하시겠지.
문이 열리고 활짝 웃으면서 맞아주시는 어머니.
그래도 우린 기억하시는구나. 얼굴이 많이 상하셨네. 안스런 마음에 꼭 안아드리니 좋아하신다.
근데... 낯은 익은데 누군지 헷갈려 하신다. 그렇게 이뻐 하시던 손녀딸도 누군지 못알아 보신다.
어머니를 돌봐드리는 아이 삼촌(어머니 막내아들) 이 그러는데, 코로 나 이후 갑작스레 병 진행이 빨 라 지셨단다.
울컥한다.
진작 자주 찾아뵐걸.
어르신들은 하루 하루가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진작 못 찾아 뵌게 너무 후회된다.
흐린 눈빛으로 손녀딸을 보면서 이쁘다 이쁘다 몇살이니? 를 거의 2~3분 간격으로 물으신다.
본능적으로 손녀인지는 아시는거 같다.
이혼 전 딸래미 애기였을 때 사진을 드린 적 있는데, 매일 그걸 보시면서 그렇게 웃으신다고 한다.
눈물이 핑 돈다. 10여년을 얼마나 그리우셨을까. 보고싶어도 며느리한테 미안해서 연락도 못하시 고. 이젠 기억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손녀.
사랑하는 사람이 기억에서 없어져 버린다는거... 상상조차 힘들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백화점에서 사온 옷들을 입혀드렸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예전에 옷을 좋아했던 기억은 남아 있으신가 보다.
옷을 입고 거울 들여다 보시며 좋아하신다.
어르신들은 무거운 옷을 힘들어 하셔서 아주 가벼 운 거위털 외투를 심하게 세일 하길래 그걸 큰맘먹 고 샀는데 안그래도 겉옷이 없었다며 좋아하신다. 입어보고 산것처럼 딱 맞는다.
어떻게 사이즈를 알았냐며 신기해 하신다.
옷 사길 정말 잘했다.
그렇게 모임도 많으시고 성당 활동도 열심히 하셨던 어머니는 이제 집 밖에 나가는걸 무서워 하신다.
자꾸 움직이셔야 하는데...
어머니 옷 또 사드릴테니 외출 자주하셔야 해요. 말씀 드리니 웃고 마신다.
내가 사드린 옷을 입으시고 손녀딸 손을 잡고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이렇게 좋아하시는데, 진작 좀 올걸...
더 나빠지기 전에 시간내서 자주 뵈야 겠다.
알츠하이머.
이생에서 괴로웠던 기억을 모두 지우고 갈 수 있게 도와주는 병인가?
나만 보면 가슴아파 눈물 지으시던 어머니가 이젠 나만 보면 아이처럼 웃으신다.
그 웃음에 나는 눈물이 난다.
어머니.
당신 아들과의 인연은 끝났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영원히 내 어머니입니다.
더 아프지 마시고 지금처럼만 계셔주세요.
사랑해요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