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좋아했던 색은 노란색, 연두색 같은 연한 색들이었다. 유치원 때 그림을 그리면 항상 파스텔 톤으로 색칠을 했다. 쨍한 색은 사용한 적이 없었다. 엄마는 내 그림을 보고 이렇게 연한 색만 사용하는 건 몸과 마음이 약한 거라고 했다. 어린 나는 그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어릴 때부터 몸집이 작았고, 사소한 일에도 크게 속상해하던 나는 엄마의 말처럼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마음과 몸이 약하다고 인정할수록 더 속상해졌다. 약한 것이 정말 싫었다. 그래서 가끔 싫지만 쨍한 색을 일부러 사용하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가 약하다고 느껴질 때 강해지고 싶어서 새빨갛고, 새파란 색들을 칠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색은 언제나 연한 색이었다. 왜 그 색이 좋은지, 그 색을 칠할 때 어떤 기분인지는 생각해보지도 않았으면서 말이다. 학창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심리테스트가 유행할 때도 좋아하는 색을 묻는 질문에는 항상 노란색 같은 연한 색을 골랐다. 어떤 날은 연보라, 어떤 날은 연노랑, 그리고 하늘색. 심리테스트 결과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나의 연한 색 사랑만 떠오를 뿐이다.
오늘 아이와 최숙희 작가의 그림책 '네 기분은 어떤 색깔이니?'라는 책을 읽었다. 따뜻하고 포근한 색감과 붓터치가 너무나 예쁜 그림책이었다. 그 책을 읽고 나니 감정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책에서처럼 색깔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면 옛날 옛적 연한 색만 칠하던 나는 어떤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 이해 없이 흘려보낸 어린 날들 동안 내 기분은 어떤 색이었을지 궁금해졌다. ‘누가 내게 저 책 제목과 같은 질문을 해주었다면 그때의 속상한 기분이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에 아이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아들! 오늘 니 기분은 무슨 색깔이야?”
“음.. 보라색이요.”
“왜? 보라색은 어떤 기분인데?”
“답답해요. 왜냐면 오늘 학원을 두 개나 가야 되고요! 문제집을 8장 정도 풀어야 되니까요!”
“에구.. 학원이 그렇게 힘드니? 너무 힘들면 얘기해. 다니기 싫은 학원은 엄마랑 얘기해서 그만둘 수도 있어.”
“음.. 그런데 그만두고 싶지는 않아요. 학원이 다 끝나고 나면 기분이 상쾌하거든요. 그래서 학원 많이 가는 날은 힘들지만 끝나고 나면 학원 많이 안 가는 날보다 기분이 더 좋아요!”
그림책을 따라 했다가 학원에 대한 무수한 얘기만 듣게 되었지만 오늘의 기분을 묻는 질문에 솔직하게 조잘조잘 대답하는 아이를 보며 괜히 미소가 지어졌다.
나와 가장 친한 사람이 내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나의 솔직한 감정을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표현하는 일이 중요하다. 아이가 스스로를 잘 알고 자신을 기꺼이 아껴주었으면 해서 앞으로도 이 질문을 많이 해줄 생각이다. 오늘의 수다로 나는 아이가 학원과 숙제 때문에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하루에 풀 문제의 양을 줄여주었다. 별 것 아닌데도 아이는 한껏 신이 난 모습이다. 그리고 앞으로 보라색처럼 답답한 마음이 들거나 다른 색깔 감정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 오늘처럼 엄마랑 다시 이야기해 보기로 했다.
나는 오늘 무슨 기분이었나. 왜 그런 기분이 들었나. 내 기분이 어떤지 공들여 들여다본 것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그런 내 기분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일은 더욱 낯설었다. 감정을 잘 관리하려면 먼저 자신의 감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고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아이를 보니, 감정을 들여다보는 연습은 내게 더 필요한가 보다. 그러니 앞으로는 내게도 자주 질문해 줘야겠다.
‘오늘의 네 기분은 어떤 색깔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