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학교는 8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10대의 마지막 순간까지 내 삶 자체였다. 학교 친구들과 사이가 나빠지면 인생이 끝나는 것 같았고, 그 안에서 친구들과 선생님이 평가하는 ‘나’가 가장 중요했다. 집 안에서의 고민도 많았지만 학교 안에서의 고민이 더 컸다. 내게는 평생 끝날 것 같지 않았던 학교생활을 마치고 나니 어느새 학교는 내 일터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학교라는 세상 속에 살았던 수많은 나를 보고 있다.
어느 학교급에서든 마찬가지겠지만 고등학교에서도 상담은 필수다. 학기 초의 학생 기초상담부터 학교생활을 하며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짧고 긴 학생 상담, 1년에 2번 있는 공식적인 학부모 상담 주간, 학생들에게 문제가 생길 때마다 수시로 발생하는 학부모 상담과 입시 상담 등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내 의견을 말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임용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한 학부모님이 상담 주간에 찾아와 특별히 부탁을 하셨다. 아이가 얼마 전에 이쪽 지역으로 이사를 와서 2학년이 시작되면서 전학을 했는데 새 학교에 적응을 못할까 봐 걱정된다는 이야기였다. 고2 아들놈이 가끔 욱하는 성격이 있다며 혹시 그런 경우가 생기더라도 사랑으로 많이 감싸 달라고 당부하셨다. 그때 나는 이상한 열정으로 걱정 마시라고 안심시켜 드렸는데 그 1년이 그토록 지옥 같을 줄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민이는 어머니 말씀대로 욱하기를 잘했다. 같은 반 여학생과 사귀다가 싸운 날 무단조퇴를 했고, 기분이 좋지 않으면 학생들이 다 있는 반 안에서 큰 소리로 욕을 했다. 교사에게 대드는 것도 다반사여서 셀 수 없이 학생과 학부모를 상담했다. 당시에는 학교에 벌점이 있던 때라 무단조퇴를 하거나 학교의 교칙을 지키지 않으면 벌점을 체크했고 그게 실시간으로 학부모의 핸드폰으로 전송되는 구조였다. 민이는 벌점을 많이 받는 학생이었고 벌점이 올 때마다 부모님은 속이 상하셨던 모양이다. 아니면 큰 소리로 욕한 학생을 그 자리에서 바로 지도했던 게 서운하셨을 수도 있다. 차츰 어머니는 나를 적대시하면서 나중에는 주말까지 전화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선생님이 아직 애가 없어서 애들을 저렇게 인정머리 없이 지도한다’며 화를 냈다. 나는 팩트만 말씀하시라며 여기서 관련 없는 내 사생활을 들먹거릴 필요가 없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 말을 듣고는 이성의 끈을 놓으셨다. 그 후 여러 가지 이유를 구실 삼아 부모님 두 분이 찾아와 교감실에서 큰 소리를 냈고, 교감 선생님은 점심시간에 식사 중인 나를 수소문해서 지금 부모님들을 대면하지 말고 지금 당장 조퇴하라고 하셨다. 그때는 그 일이 몹시 억울했다. 내 교육방식이 다소 과격했는지는 몰라도 절차에 맞게 교육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망가듯 조퇴한 상황에도 모멸감을 느꼈다. 차라리 대면해서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고 싶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기회는 내게 오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덧 10년도 넘는 세월이 흘러 내 아이가 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리고 종종 학교와 학원에서 전화를 받는다.
“아이가 너무 말이 많아요. 화를 낼 정도는 아니지만 거슬리네요.”
“아이가 수업시간에 갑자기 일어나서 춤을 춰서 수업에 방해가 됐어요.”
“어제 아이가 한 말이 마음에 걸려서 전화드려요. 자아가 강하고 표현이 거침없네요.”
물론 아이의 장점과 함께 말씀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전화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나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늘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아이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을지 생각해 보고 내 생각을 말씀드린다. 그리고 가정과 학교, 학원에서 같은 방식으로 지도할 수 있도록 부탁드린다. 그리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학원이나 학교에서 오는 전화를 받기 전에 얼마나 마음이 ‘쿵’하고 떨어지는지. 얼마나 죄인의 마음이 되는지도. 어떻게 아이를 변호하고 어떻게 선생님의 마음을 읽어 드려야 하나 고민하는 내 모습을 보며 새삼 내가 학부모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조금 더 배우게 된다. 10여 년 전에는 아이가 없는 내 상황이 내 교육과 무슨 상관인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실수를 되풀이하는지 내 아이를 통해 매일 봤기 때문에 학생들의 성숙하지 못한 행동에도 즉각적으로 화내는 빈도가 줄어들었다. 무섭게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다. 그렇다고 해서 그때의 모멸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이라면 그때의 학생과 학부모에게 조금 더 관대하고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좋지 않은 상황에서는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상대방의 감정에 동요되어 덩달아 흥분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제는 안다. 앎과 행동은 조금 다른 문제지만 알고 있는 것은 분명 실행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부모님들은 어쩔 수 없이 내 자식이 가장 소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교사의 입장에서는 여러 아이를 한꺼번에 돌봐야 하니 한 명만 신경 쓸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한 명 때문에 여러 명이 피해를 입는 상황이 가장 우려스럽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다 보면 학부모 입장에서는 속상하겠지만 훈육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반은 학부모, 반은 교사의 마음으로 아이의 학교생활을 바라보니 내게 그전에는 없던 균형이 생기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바뀐 점은 아이들의 소소한 잘못에 관대해지는 것이다. 전이라면 내 규칙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아이들을 보면 화가 났을 텐데, 자꾸 기회를 주게 된다. 처음부터 잘할 수 없고 1년 내내 잘할 수 없을지 몰라도 계속 기회를 주고 믿어주면 언젠가는 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생겼다. 문제는 교사로서는 가능한 일이 부모로서 지금 내 아이에게는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내 아이에게 별로 관대하지 못하다. 이게 부모와 교사의 차이인가 싶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아이를 남의 아이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를 닮은 아이 얼굴을 보면 너무나도 명백한 내 아이라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어쩌랴 내려놓고, 내려놓고, 그저 믿어주는 수밖에.
나는 학생이었고, 교사이고, 학부모이다. 지금의 학생들은 또 어떤가. 학원에 치이고, 입시에 치이고, 늘 불안하고, 이성친구와 동성친구의 문제 때문에 항상 골머리를 앓고 있지 않은가. 옛날의 나처럼 말이다. 그 옛날 학교에서 울고 웃었고, 그때의 고민이 당시의 나를 살게도 죽게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잠시 망각했다. 어른이 되자 나도 모르게 아이들의 세계보다 어른의 세계가 훨씬 중요하고 힘들다고 생각했나 보다. 아이들 세계에서의 고민의 무게가 어른의 세계에서의 고민의 무게와 다르지 않음을 떠올리자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한 것 같아 몹시 부끄러워졌다. 학생이었던 사람으로 교사로, 부모로 어깨는 점점 무거워진다. 그래도 그 무게만큼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부모, 우리 아이의 고민의 무게도 생각할 줄 알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