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사람들이 왜 물멍이나 불멍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계속 보면 지루할 뿐인 한 장면에 왜들 그리 집착하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현실에서 아이와 지지고 볶고, 혼자만의 시간이 없고, 속 시끄러운 일들이 생기자 나도 모르게 하나의 장면만 계속 들여다보게 됐다. 그 처음은 명절 차 방문한 친정에 있는 구피어항이었다. 원래 물고기는 내게 키우기 귀찮은 존재인 데다 딱히 관심도 없어서 수족관에 가도 상어, 고래상어, 거대가오리 빼고는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각각 색깔이 다른 꼬리를 가지고 팔랑팔랑 물속을 휘젓는 구피에게 눈을 뗄 수 없었다.
한참을 멍 때리며 구피들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편안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고 귀여운 것들에게 한번 집중하자 시간이 무진 빨리 흘러가버렸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구피만 바라보면서 뇌가 잠시 멈춘 것 같은 그 멍때림이 어찌나 편안한지.
3개월 전 아이가 생명과학 방과 후 시간에 명주 달팽이를 얻어 왔다. 싸구려 파충류용 플라스틱 통에 흙과 함께 담겨온 한 마리의 달팽이를 보고 여태껏 우리 집에서 수없이 죽어 나간 올챙이와 열대어, 각종 식물들을 떠올렸다. 내게 생명을 키운다는 것은 육아만 봐도 알다시피 정말 자신 없는 일이었다.
'또 희생될 제물이 오는가.'
신경을 쓴다고 써도 죽어나가는 생명들을 볼 때마다 기분이 울적했다.
역시나 나는 제대로 달팽이를 키우는 방법을 몰랐다. 그냥 야채 주고 물만 뿌려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언제부턴가 초파리들이 꼬이기 시작했다. 바깥에 방생해 버리고 싶었지만 비도 오지 않았고 날이 너무 추워 죽어 버릴 것 같아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나중에 인터넷을 찾아보니 달팽이 흙이라고 불리는 '코코피트'를 2주에 한번 갈아줘야 한단다. 키운 지 두 달 동안 그것도 모르고 먹이랑 물만 주고 똥만 치워줬더니 초파리가 꼬인 것이다.
난 당장 쿠팡에서 코코피트를 시켜 흙을 갈아 주었다.(쿠팡만세) 그때부터 뭔가 달팽이에게 애착을 느끼게 된 것 같다. '우리 집'이라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죽지 않고 버텨준 녀석이 대견해 아이와 상의해서 '황토'라는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 흙 속에 들어가지 않던 녀석이 흙이 깨끗해 진 것을 아는지 흙 속에 들어가 잠을 자기 시작했고 며칠 뒤 수십 개의 알을 낳았다.
알? 알..? 어째서? 한 마리인데! 너무 놀라 인터넷을 뒤지니 자웅동체인 달팽이는 두 마리가 있을 때 같이 알을 낳지만 혼자서도 아주 드물게 알을 낳기도 한단다. 이게 무슨 일이람. 물론 그 알들은 무정란일 수도 유정란일 수도 있다고 한다. 신기하고 대견했다. 그러고 보니 황토는 엄청 귀여운 외모를 가진 데에다 행동도 귀여웠다. 느릴 줄 알았던 달팽이가 꽤 빠른 것도 귀엽고 더듬더듬 더듬이가 쏘옥쏙 나왔다 들어가는 것도 귀엽고, 땅 속에 들어가 작은 달팽이 집 속에 숨어 잠을 자는 것도, 당근을 먹고 얼른 주황색 똥을 싸는 것도 귀여웠다.
그때부터 나는 종종 달팽이 멍을 한다. 느릿느릿 상추와 당근을 먹는 황토를 30분도 넘게 가만히 바라본다. 이제는 어항 인테리어 소품도 하나 사 넣고, 충분한 영양소가 있다는 달팽이 먹이 가루도 준다. 알은 혹시나 잘못될까 싶어 다른 곳에 옮겨 관찰 중이다.
불멍도 물멍도 아니고 귀여운 생명체에게 머리를 멈추고 집중하는 것이 나를 이상하게 편안하게 했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수밖에. 봄이 되어 방생할 때까지 귀여운 황토를 향한 나의 멍때림은 계속되지 싶다. 알들도 멋지게 부화하길 기다려 봐야겠다.
마침내 한 달 후!!
알뭉치를 옮겨두었던 플라스틱 달팽이 집에서 부화가 가장 빨랐던 부지런한 새끼 달팽이가 씩씩하게 벽을 타고 오르는 모습을 발견했다! 정말 새끼손톱만큼 작지만 달팽이의 모습을 온전히 갖추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대견하던지. 아이와 나는 작은 달팽이 새끼를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우리 집에도 생명이 자란다! 이런 환경에서도 부화해 주어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새끼들이 건강해져서 바깥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을 때까지 더 열심히 보살펴 줘야겠다. 앞으로는 달팽이 멍을 더 자주 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