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우주의 기억들
[이사회 회의실 – 17장 마지막 장면 직후]
“이 안건은… 좀 더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겠군요.”
이태석 회장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의실을 가득 메운 박수 소리가 멈췄고, 공기 중에 미묘한 긴장이 맴돌았다.
“따라서 신임 이사 추천안은 오늘 표결하지 않고, 다음 이사회에서 최종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순간 회의실에 있던 이사진들의 표정이 묘하게 흔들렸다. 이미 환영의 박수를 치던 이들도 있었지만, 회장의 보류 선언에 따라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정리했다.
성찬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 듯했지만, 미묘하게 경계심이 피어올랐다.
‘역시… 쉽게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어.’
[STAR그룹 본관 옥상]
이사회가 끝난 후 성찬, 시후, 하윤 세 사람은 잠시 옥상에 모였다.
“회장이 저렇게 보류를 선언할 줄은 몰랐어.”
하윤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예상된 수야. 이태석은 최후의 카드가 없을 리가 없지.”
성찬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주먹은 옆구리에서 천천히 쥐어지고 있었다.
“근데 왜… 표결을 미루는 거지?”
시후가 물었다.
성찬이 옆을 보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심리전을 시작하겠다는 뜻일 거다. 우릴 갈라놓으려는 시도.”
하윤이 성찬을 바라봤다.
“설마… 우릴 하나씩 흔들겠다는 건가?”
“가능성 충분해. 각자 조심해야 해.”
성찬의 말투는 여전히 냉정했지만, 어딘가 단단한 불안이 배어 있었다.
[회장실 – 늦은 밤]
이태석은 소파에 앉아 성찬을 향해 잔을 기울였다.
“조카, 너 자신은 잘 알 거다. 시후와 하윤 없이 이사회에선 넌 아직 반쪽짜리야. 넌 너무 순진해. 네가 사람들 마음을 쥐고 있다고 착각하지 마라.”
성찬은 아무 말 없이 술잔을 들었다. 이태석은 한층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네가 진짜 회장이 되고 싶다면… 혼자가 돼야 해. 강한 사람은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지.”
[하윤의 집 앞]
이태석은 검은 세단에서 내렸다.
“정하윤 씨.”
그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성찬은 널 지켜주지 못할 거요. 넌 금수저라 위험을 모르는 거지. 넌 네 방식대로 움직여야 해. 그렇지 않으면 둘 때문에 같이 무너질 수도 있네.”
하윤은 말없이 이태석의 눈을 바라봤다.
“난 널 이사회 부회장 자리에 앉힐 수도 있어. 선택해보게.”
[퇴근길 – STAR그룹 주차장]
“강시후 씨.”
시후가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에서 이태석이 나타났다.
“둘 다 널 필요로 하지 않아. 넌 단지 이용당하는 거야. 둘이 원하는 건 권력이지만, 넌 달라. 넌 사람들을 돕고 싶어하잖아.”
그는 시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랑 손잡으면 네 방식으로 회사 안의 시스템을 완전히 바꿀 수 있어.”
시후는 이태석의 손을 천천히 떼어내며 말했다.
“회장님, 그 말투… 예전 제 상담센터 고객님들하고 똑같네요.”
그리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당분간은 경청만 하겠습니다.”
성찬: 잠시 흔들린다. ‘내가 너무 이상적인가… 혼자가 되어야 하나?’
하윤: 마음의 저울이 오간다. ‘성찬이 날 배신하면 어쩌지?’
시후: 이태석의 말이 불현듯 마음에 스친다. ‘혹시… 난 이용당하고 있나?’
성찬, 시후, 하윤이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본다.
짧은 정적 끝에 성찬이 입을 열었다.
“나한테 접근했지?”
“응.”
“나한테도.”
“…나도야.”
세 사람은 잠시 웃었다.
“그 인간, 진짜 막장을 보여주는군.”
하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다를 거다.”
시후가 단호히 말했다.
그리고 성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이번에야말로 끝내자. 하지만… 우리부터 서로 믿어야 해.”
[현재 – 이태석의 집무실]
늦은 밤, 회장실의 불은 여전히 꺼지지 않았다.
이태석은 조용히 서류들을 정리하는 척하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울의 도심은 밤인데도 여전히 빛나고 있었고, 그 빛들은 여전히 자신을 조롱하는 듯 반짝였다.
‘이제 와서 왜 다들… 형을 닮은 성찬에게 마음을 주는 거지?’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책상 위에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STAR그룹 초창기 시절.
좁디좁은 사무실에 책상 네 개와 허름한 서버 한 대가 전부였다.
이성진과 서정우, 그리고 몇 명의 초기 직원들이 치열한 논쟁 끝에 코드 하나를 완성하고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형, 여기 있었네.”
대학생이던 이태석이 문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오~ 우리 태석이 왔냐? 들어와 봐!”
형 이성진(이성찬 아버지)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태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 진짜 이걸로 잘 될 거라 생각해? 요즘 큰 기업들도 기술 투자 힘들어하는데.”
옆에 있던 서정우(전 회장)가 웃음을 터뜨렸다.
“태석아, 이 기술은 10년 뒤 세상을 바꿀 거야. 넌 형만큼 앞을 보지 못하나 본데?”
이성진은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태석아, 중요한 건 기술이 아니야. 사람이다. 기술은 결국 사람을 위한 거야. 그걸 놓치면 기업은 의미가 없어.”
“사람…?”
“그래. 기술의 중심에 사람이 있어야 해.”
태석은 형의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형을 부러워했다.
형의 열정, 사람들을 휘어잡는 리더십, 그리고 따뜻한 마음까지.
‘나는 절대 저럴 수 없어…’
[5년 후 – 병실]
형은 병원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태석아… 서정우랑 같이 일해줘. STAR그룹을 부탁한다.”
“…형, 왜 나야? 형이 좋아했던 건 나보다 서정우였잖아.”
“아니다. 너는… 내가 가장 믿는 사람이야.
그리고 한 가지 더.”
형은 힘겹게 손을 뻗어 동생의 손을 잡았다.
“성찬이… 잘 지켜줘라. 얘는 혼자 두면 차가운 아이가 될 거다. 따뜻함을 배울 기회를 만들어줘.”
“….”
그날 이후, 태석은 형의 부탁을 무겁게 짊어졌다.
하지만 그 부탁은 그의 가슴 속에서 서서히 짐이 되었고, 분노가 되었고…
‘왜 내가 형의 대타가 되어야 하지?’
라는 열등감으로 변해갔다.
이태석은 혼자 중얼거렸다.
“형, 난 형처럼 될 수 없었어.
그리고 성찬… 넌 형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았구나.”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순간,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래도 내가 진짜 회장이야. 이 그룹은 형 것도, 성찬 것도 아니야. 내 거다.”
이태석은 책상 서랍을 열고 USB 하나를 꺼냈다.
‘이 영상만 있으면, 세 명을 한 번에 무너뜨릴 수 있어.’
그 USB 안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미안하다, 형. 이번엔 내가 이긴다.”
[현재 – STAR그룹 이사회장, 오전 10시]
회의장은 평소보다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대형 스크린과 다수의 모니터가 동시에 켜져 있었고, 회사 전 직원들도 화상 회의 시스템으로 접속해 있었다.
이태석은 회의 테이블 정중앙에 앉아 있었다.
차가운 표정, 하지만 여전히 완벽한 카리스마로 주변 공기를 압도했다.
성찬, 강시후, 정하윤.
세 명은 나란히 이사회장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성찬이 차분히 말했다.
“오늘 안건은, 마지막 타임캡슐입니다.”
스크린이 깜빡이며 과거의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허름한 창고 같은 사무실.
창업 초창기 STAR그룹의 모습이었다.
이성진과 서정우가 책상 위에 놓인 낡은 노트북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했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야. 기술이 사람을 이롭게 하는 세상.”
이성진은 종이에 작은 회사 로고를 그리며 웃었다.
“STAR. 사람과 기술을 이어주는 별이 되자.”
[다음 장면 – 젊은 시절 이태석]
이성진이 동생 이태석을 불렀다.
“태석아, 너는 천재야. 우리 회사가 널 필요로 할 거다.”
“형, 난 형처럼 사람들을 이끄는 재주는 없어.”
“아니야. 기술은 네가 책임져. 난 사람들의 마음을 지켜볼게.”
그때 서정우가 이태석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태석아, 형이 널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모를 거다.”
영상이 끝나자 회의장은 정적에 휩싸였다.
전 직원들이 연결된 화면 곳곳에서 울음 섞인 감탄이 흘러나왔다.
“저게… 창업자 정신이었어?”
“사람 중심… 우리가 잊고 있던 거네.”
이태석의 손이 미묘하게 떨렸다.
형의 젊은 얼굴이 화면에서 사라지자, 그의 표정도 서서히 무너져내렸다.
“멈춰!”
이태석이 손바닥을 내리쳤다.
“저 영상은 단순한 과거 미화일 뿐이다!
회사는 감정으로 운영할 수 없어. 냉철한 전략이 필요해!”
그의 목소리가 흔들렸지만, 마지막 자존심으로 회의장을 휘감았다.
강시후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상무님, 아니 회장님. 회장님도 이 영상을 보면서 느낀 게 있겠죠?”
정하윤이 덧붙였다.
“이 회사는 사람의 열정으로 세워졌고, 지금은 사람의 숨결을 잃어가고 있어요.
바꿔야 합니다.”
성찬이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삼촌, 전 한때 당신을 무너뜨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알겠어요.
당신 역시 이 회사를 사랑했고, 단지 방법이 틀렸을 뿐이라는 걸요.
그러니 부탁할께요. 삼촌 이젠 제 손을 잡아요.”
이태석의 눈이 흔들렸다.
그의 손끝이 느리게 책상 위에서 떨어졌다.
“…….”
그는 회의장에 앉은 다른 이사들과 직원들을 둘러봤다.
모두가 자신이 아닌, 젊은 창업자들의 꿈을 향해 있었다.
이태석은 결국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 우리 형 말이 맞다.”
전 직원들이 연결된 화면 속에서 박수가 터졌다.
누군가 울먹이며 말했다.
“우리 회사가 다시 살아나고 있어…”
성찬, 강시후, 정하윤.
세 명은 나란히 선 채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이제 이 회사를 살리는 건 그들 셋의 몫이었다.
“이제, 진짜 미래를 만들어가자.”
[3일 후 – STAR그룹 본사 로비]
사내 로비는 유난히 밝았다.
직원들은 서로 웃으며 인사를 나눴고, 복도마다 활력이 돌고 있었다.
커피를 나누던 한 직원이 말했다.
“요즘 회사 분위기… 달라졌지 않아요?”
“응. 이제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잖아. 성과보다도, 사람이 먼저라니…”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회사 스피커에서 클래식 첼로 선율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내 안내 음성이 울렸다.
“곧 회장으로 복귀하신 이성찬 회장님의 인사말씀이 있겠습니다.”
사내 모든 화면들이 켜졌다.
직원들뿐 아니라 전세계 지사들도 생중계로 접속했다.
성찬은 단정한 수트 차림으로 단상에 올랐다.
그의 뒤에는 강시후와 정하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STAR그룹의 새로운 시대를 함께 만들 여러분.”
성찬은 잠시 말을 멈추고, 손에 든 오래된 종이봉투를 꺼냈다.
“오늘은, 저의 아버지이자 이 회사의 창업자였던 이성진 님이
어린 시절 제게 남긴 편지를 여러분께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봉투를 조심스레 열고, 빛바랜 종이를 펼쳤다.
“사랑하는 성찬아.
사람들은 인생에서 한 번쯤 ‘길’을 잃을 거야.
하지만 잃어도 괜찮다. 길은 찾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거거든.”
“기억해라. 진짜 리더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자다.
기술은 결국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하고, 회사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야 한다.”
“아빠가 너에게 남기고 싶은 단 하나의 바람은…
성과가 아니라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그런 어른이 되어주길 바란다는 거야.”
성찬의 목소리가 잠시 떨렸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차분히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네가 힘들 때 이 말을 떠올려라.
우린 미래를 바꿀 순 없지만, 함께 만들어낼 수 있다.”
로비에 모여 있던 직원들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모두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저런 회장이라면… 믿을 수 있겠어.”
“그래, 우리도 바뀌자.”
이사회에 앉아 있던 이태석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눈가에는 서리가 내려앉은 듯 차가움이 있었지만, 그 아래에는 복잡한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형… 당신 말이 맞았어.
사람 중심의 기업, 이제야 깨닫는다.”
이태석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이사회 전원이, 전 직원이 박수를 보냈다.
연설이 끝나고, 성찬은 시후와 하윤을 바라봤다.
“형들, 고마워요.
저 혼자였다면 절대 여기까지 못 왔을 거예요.”
강시후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너 답다, 성찬아. 타임캡슐이 아니라 현실을 바꿔냈네.”
정하윤도 덧붙였다.
“그리고 앞으로가 진짜 시작이다. 우리 같이 가자.”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로 보내는 편지”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우린 미래를 바꿀 순 없지만, 함께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성찬, 시후, 하윤.
세 사람의 뒷모습이 창밖 햇살 속으로 겹쳐지듯 사라졌다.
그리고 STAR그룹 본사 전경 위로 자막이 떠올랐다.
� "우리는 처음부터 만날 운명"
20살의 봄.
카투사 훈련소의 신선한 공기, 군화 소리로 뒤덮인 연병장.
강시후는 그곳에서 평생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났다.
⠀“이봐, 길 잃었어?”
차분한 눈빛으로 손을 내밀던 정하윤.
미국의 한 도시가 옮겨온 듯한 캠프 험프리스에서, 두 사람은 뜻밖의 만남을 시작했다.
내향적인 리더 강시후,
완벽주의자처럼 보이지만 허당끼 있는 금수저 정하윤.
훈련소의 카투사 분대장실,
늦은 밤 사제 맥주 캔 위로 나누던 꿈과 미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나누었던 미소와 농담이 훗날 생사를 건 게임의 중심에서 서로를 지켜주는 힘이 되리란 걸, 그때는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