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의 특성상 24시간 응급 환자를 보기 위해 당직이라는 개념이 있다.
평일 낮 시간에는 회사처럼 모두가 근무를 하지만 평일 새벽과 주말은 당직이 홀로 남아 병동 환자와 응급실 환자를 담당하게 된다.
모두가 쉬는 시간에 홀로 병원에 남아 근무를 하다 보면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힘들어진다.
과거에 전공의 주당 80시간 초과 근무 금지법이 있기 전에는 2년 차가 1달에 딱 2번만 당직을 서고 나머지는 1년 차 3명이서 1년 동안 당직을 섰지만
전공의 근무 환경 개선을 위해 주당 80시간을 넘을 수 없는 법으로 1년 차가 그렇게 당직을 많이 설 수 없으니 나머지는 윗년차가 서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걱정마라!
코끼리도 냉장고에 넣어주는 1년 차가 있으니까!
그래서 1년 차가 들어오면 감언이설로 설득하게 된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이비인후과에 들어온 첫날 4년 차 선생님이 우리 1년 차 3명을 불러서 앉으라고 한 뒤 말을 했다.
"얘들아 80시간 법을 지키려면 3년 차도 당직을 서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잖아. 그래서 3년 차가 당직을 선다고 이름을 올려도 너네가 대신 근무하면 돼. 지금까지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니까 1년 바짝 일하고 내년부터는 편하게 일하자. 너네가 3년 차 돼서도 당직을 서게 될 일은 절대 없어. 내가 약속할게."
당연하게 그래야 하는 줄 알고 1년 동안 내가 근무가 아니어도 이를 물고 참으면서 일을 했다.
그렇게 1년 차가 끝이 나갈 때 이제 4년 차로 올라갈 3년 차 선생님들의 충격적인 말을 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법을 지키는 척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 내년부터는 2년 차가 각자 1주일에 한 번씩, 3년 차는 각자 1달에 1번씩 당직을 서자. 그렇게 되면 거짓말을 안 해도 모두 근무시간을 지킬 수 있어!"
반대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3년 차가 되고 친하게 지냈던 바로 윗년차 선생님들도 "네 알겠습니다."라고 하는데 어떻게 아직 1년 차인 내가 "그건 약속이랑 다르지 않습니까!!"를 외치겠는가.
그리고 그래 봐야 1주일에 1번인데 아끼는 후배들을 위해 그 정도 못해주겠는가.
그리고 자리를 떠나면서 윗년차 선생님들이 말했다.
"야 조금만 참자. 내가 내년엔 이런 일 없게 할게."
그렇게 1년이 지나갔다.
그런데 이번에도 충격적인 말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그동안 친하게 지냈다고 생각했던 바로 윗년차들이 4년 차가 되면서 시행하고자 해서 더 충격적이었다.
"법은 지켜지고 있지만 1년 차들이 너무 힘들어하잖아. 3년 차들이 당직을 더 서자."
그렇게 처음으로 우리 동기끼리 의견을 뭉쳐서 조심스럽게 반대 입장을 냈다.
그러자 그들은 얼굴이 붉어지면서 소리를 쳤다.
"야! 어디서 윗년차가 시키는데 안 해!?"
싸울 수도 없고 이길 수도 없기에 죄송하다 하고 우리는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교수님을 찾아가서 사정을 말씀드렸고
교수님이 생각을 해봐도 아니었는지 우리 편을 들어주었고 1달에 1번만 서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이렇게까지 싸우면서까지 서기 싫었던 당직 근무였는데 마지막 당직이 막상 되니 설렜다.
평소에 야식을 먹는 시간도 아까워서 10분이 남아도 쪽잠을 자려고 책상에 엎드렸었지만 이번에는 천천히 야식을 먹으면서 추억 회상에 잠겼고
입원해있는 환자나 응급실로 온 환자 모두에게 세상에 제일 친절한 의사가 되었다.
환자들이 걱정하는 말, 궁금해하는 말 모두 수천번 들어서 지루할 수도 있었지만 처음 듣는 것처럼 진심으로 걱정하며 해결해주었다.
물론 천천히 환자를 보면 그만큼 새벽에 근무를 하게 되니 피곤해지지만 내게 이런 시간이 없을 거라는 점이 이상하게 아쉬웠다.
똑같은 일이어도 이만큼 마음가짐이 중요한 거다.
물론 몸과 마음이 힘들 때 이런 생각을 하기는 쉽지 않기도 하고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똑같이 예민해지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이다.
대신 조금 더 쉬운 생각이 있다.
바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이다.
여러분들도 힘든 이 순간을 이겨내지 않아도 된다. 버티면 된다. 그러니 피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버텨라.
그러면 이 경험과 노력이 거름이 되는 즐거운 시간이 올 것이다.
물론 이 기쁜 순간도 지나갈 테니 자만하지 말아야 하고 이 영광의 순간이 다시 올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