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큰 폭 발전이 음악의 융성을 이끌었다
문명이나 사회가 기술의 발전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는 '기술결정론'.
신석기 문명은 이전까지 돌을 깨서 쓰던 인류가 돌을 갈아서 원하는 모양을 낼 수 있게 되면서 생겨난 문명의 발전이고, 인류가 국가체제를 갖춘 것은 거푸집을 이용하여 청동과 철을 자유롭게 쓰게 되면서 가능해진 발전입니다. 현대 문명의 발전도 증기기관과 전기의 발명 때문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죠.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저는 음악의 발전도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물론 이와 같은 얘기에 절대 찬성 안 할 분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음악은 바로 아티스트의 힘으로 발전했다고 말이죠. 하지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그런 위대한 아티스트도 바로 기술의 발전이 먼저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흐(J.S.Bach), 모차르트(W.A.Mozart), 베토벤(L.V.Beethoven)... 왜 하필 17C부터 18C에 걸친 그 시기에 특별히 위대한 작곡가들이 많이 나왔을까요. 그 시대 사람들이 음악적으로 특출 나서일까요? 그 이전 사람들이나 그 이후 사람들은 음악에 별로 소질이 없었는가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 시기 직전에 악기, 특히 피아노의 개발이 이루어졌고 대중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피아노가 등장한 17C~18C에 몇몇 뛰어난 아티스트들에 의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음악적 발전이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그 당시의 아티스트들의 족적이 크게 평가받는 것이며 위대한 작곡가들이 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의 음악은 주로 (교회를 위한) 성악이었고 악기는 성악의 보조였습니다. 그것은 당시 교회가 세상의 중심이었던 까닭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 그만큼 악기가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바이올린 같은 악기들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주로 모노톤(한 가지 음색)이었고 여러 명이 함께 하지 않으면 화음(하모니)을 내기 어려웠습니다. 여러 명을 지휘하는 지위가 아니고서는 이들과 합을 맞추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오르간 등의 초기 건반 악기가 있었지만 엄청난 사이즈와 가격 때문에 큰 교회 아니면 없었을 터, 당연히 웬만한 사람은 건드리지도 못했을 것이고 설령 건드린다 해도 교회 미사 때 말고는 제대로 쓰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음악이 발전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크 시대에 들어오면서 오르간이 소형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하프시코드·클라비코드 등의 초창기 건반 악기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음악적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났고 그래서 바로크 음악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 차이는 굉장히 큽니다. 이제 혼자서 악기를 다루며 하모니의 합을 맞춰볼 수 있게 됐고 본격적인 작곡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17C 말에 이르러 피아노라는 악기가 개발되어 음악적인 기술이 거의 완벽히 준비상태가 되자 고전음악 시대가 열리면서 클래식 음악이 꽃을 피운 것입니다.
*하프시코드(harpsichord) : 피아노의 전신인 건반 악기. 현을 해머로 쳐서 소리 내는 피아노와 달리, 픽(플렉트럼)으로 마치 하프처럼 현을 뜯어 소리냄. '쳄발로(Cembalo)' 라고도 함.
*클라비코드(clavichord) : 역시 피아노의 전신인 건반 악기로, 탄젠트라 하는 놋쇠 조각이 현을 때려 소리를 냄. '클라비어(Clavier)' 라고도 함.
이는 대중음악 얘기로 와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도 여러 아티스트들이 있었지만, 1980년대에 이르러 팝 음악은 황금기를 맞이합니다.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 등의 슈퍼스타가 나오기 시작했죠. 하지만 이는 두 아티스트가 특출 나서가 절대로 아닙니다. 바로 신디사이저의 발전과 대중화가 이루어져서입니다. 신디사이저의 발전이 이런 대형 팝 아티스트를 낳게 한 겁니다.
*신디사이저(synthesizer) : 여러 주파수나 파형의 소리를 합성하여 새로운 소리를 만들거나 저장된 음색을 사용자의 역량에 따라 전자적인 변조를 가할 수 있는 악기를 말함. 정확한 발음은 '신시사이저' 이나 국내에는 보통 신디사이저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음.
반면 그 시절 국내의 음악 기술은 그런 팝에 의하면 택도 없이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렇게 선진 음악과 국내 음악의 기술적 격차가 났던 시절이었기에 과거 70, 80년대에는 가요보다 팝이 인기 있을 정도로 국내에 팝 열풍이 불었습니다. 90년대 초만 해도 웬만한 사람들이 실시간 빌보드 차트를 알고 있을 정도였던 것 기억하실 겁니다. 반면 국내 기술이 선진 음악 수준을 얼추 따라잡은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팝 음악이 국내 가요에 비해 별 메리트가 없어지게 되었고 그래서 팝 음악이 점점 가요에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조용필, 서태지 등의 레전드 아티스트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전 시대, 심지어는 동시대의 보통의 아티스트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발전된 수준의 전자악기를 활용했다는 것이죠. 분명히 어떤 음악 장르나 사조에서 선구자였지만 그 이전에 선진 음악 기술을 먼저 받아들인 얼리어답터였던 것입니다.
최근에는 팝이나 가요나 별로 크나큰 발전의 족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지극히 단순합니다. 이미 악기의 기술 수준이 발전할 만큼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기술 수준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게 그거니 음악 수준도 그게 그거인 겁니다. 최근의 아티스트들의 실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란 거죠.
패션으로 예를 들면 해마다 유행이 바뀌지만 길게 보면 별로 바뀐 게 없는 것 같고 심지어는 돌고 도는 듯한 인상도 드는 게 사실입니다. 왜냐, 특기할 만한 기술적 발전이 없어서입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트렌드에 민감한 분 아니면 잘 알려지지 않았던 10년 전 음악을 들어도 이게 요즘 노래인지 옛날 노래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나마 음악과 관련하여 최근에 있었던 유의미한 기술 발전이라면 △큐베이스·에이블톤 같은 음악 편집 프로그램의 대중화, △유튜브를 통한 '보는 음악'의 등장, △블루투스를 통한 'chordless' 의 일반화 를 들 수 있겠습니다. 다만 이는 대부분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 기술 발전이 된 것이고 전문 작곡자의 입장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앞으로는 어떤 유의미한 기술 발전이 가능할까요?
가장 주목되는 것은 ▲빅데이터와 AI를 활용한 작곡 부분입니다. 그동안 발표된 곡들을 DB에 입력하고, 그중 인기가 있었던 곡에 가중치를 부여하여 대중이 좋아하는 멜로디 라인과 리듬 패턴, 화성 코드를 뽑아낸 뒤, AI 로봇이 노래 초안을 만들어 내고 그다음 표절이 되지 않는 수준으로 검증 프로그램을 돌린 후에 신곡을 '뽑아내는' 것입니다.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죠. 전문 작곡가가 최초의 값을 한정하여 부여할 수 있고 때로는 AI가 뽑아낸 곡에 전문가가 소소한 터치를 가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AI 관련 모든 분야가 그러하지만) 음악이라는 창조물조차 비인간화된다는 것에 상당한 반감을 가지는 분들도 있겠지만 기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될 경우 작곡가들에게 지급하던 저작권료가 온전히 뮤직 컴퍼니의 몫으로 돌아가게 되겠지요.
개인적으로 제일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입체음향 음원 의 등장입니다. 영화에서는 5.1채널이니 7.1채널이니 등장한 게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음악에서는 2채널 스테레오 음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녹음 자체가 2채널로 됐기 때문입니다. 그저 왼쪽 오른쪽 소리만 다른 수준이라는 거죠. 이걸 최소 전후좌우 4채널 이상으로 만들 가능성은 없을까요? 이렇게 되면 작곡 단계부터 듣는 사람의 공간을 감안한 작곡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체리듬 등을 고려한 과학적 작곡 부분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AI에서 회로 돌리는 수준이 아니라, 인간의 뇌파 등을 고려하여 흥분도를 배가시키는 음악, 휴식감을 주는 음악, 수면을 유도하는 음악 등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좀더 나아가면 스피커의 울림을 통해 육체의 피로도까지 풀어주는 음악도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