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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울 때 꽃이 핀다

(18) 우리는 1학년, 박점순

by 예쁨


<우리는 1학년>


눈 뜨면

세 살 먹은 손주 녀석

먹이고 씻기고 옛날이야기 하고

이것이 전부 더니


네 살 다섯 살 먹더니

자꾸만 뭣을 물어싼다

“왜요?” “왜 그러는데요?”

“할머니, 동화책 읽어주세요”

“……”


아이고야

다섯 살 먹은 손주 녀석도 읽는

동화책 한 권을

바라보다

침만 꿀떡

땀이 삐질삐질 흐른다


그래서

댕기기 시작한 글자공부

손주는 학교로

나는 도서관으로

우리는 1학년이랍니다


- 엄마의 꽃시, 박점순 (김용택 엮음) -



어쩌다 보니 할머니와 손주가 나란히 1학년이다.

자꾸 물어싸는 손주 덕에 할머니는 결국 1학년이 되었다.

귀찮고 난감한 질문이 반복될수록 오히려 할머니 마음에는 배움의 꽃이 피어났다.

연탄은 제 몫을 다해 태우고 나면 마치 ’소모된 존재‘같지만 후에도 오랜 시간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다.

마치 연탄처럼 할머니 역시 삶의 열기가 식지 않은 사람이었을까.

남은 열기로 배움의 열망을 피우고 용기를 내어 1학년이 되었던 것이다.

<댕기기 시작한 글자공부>라는 문장에서는 점순 씨의 작은 설렘까지 느껴진다.


오래전 딸의 동시를 꺼내본다.

<새 학기>

새 학기 된다고 난리난리
새로운 학용품 사야 된다고 난리난리
새로운 친구들이랑 선생님 얘기로 시끌벅적
새로 들어온 1학년들 귀엽다고 난리난리

그 와중에,
이 난리 속에서 봄이라고
벚꽃 피고 있네.

다음 새 학기도 이러려나..?

벚꽃들이 소란스럽게 피어나는 봄,

똥꼬발랄했던 그녀의 눈에 세상은 난리라도 난 것처럼 보였을까?

누구보다 본인이 ‘난리난리의 아이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십 대 초반,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의 일상은 늘 아이들 주변에서 맴돌았다.

앞뒤로 아이들을 꿰차고 병원에 들락거렸고,

먹이고 씻기고 놀아주고를 반복하다 보면 하루가 사라졌다.

아이들과 함께 놀이터 죽순이가 되었고, 생일파티에 진심이었으며 엄마들 모임에도 성실히 참석했다.


그때의 나는,

내가 결핍이라고 여겼던 부분을 마음껏 쏟아내며 대리만족을 했던 것 같다.

하여간 모든 일상이 아이들 중심이 되었을 무렵-

다소 엉뚱하고 발랄했던 그녀는 나를 웃게 했고, 잃어버린 상상력을 자극시켰다.

난리난리의 아이콘

양말을 짝짝이로 신고서,

- 오리가 토끼랑 같이 학교에 가고 싶나 봐!


내복차림에 잡다한 소품으로 한껏 꾸민 후,

- 엄마, 사실 나는 외계인이야! 몰랐지?


…또 시작이네? ‘-’



어쩌면 나의 글쓰기는 그녀 덕분에 시작되었다.

그녀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싶어 일상을 기록하고 저장했다.

혼자만 알고 있기 아까워 인터넷 방송에 사연 보내기를 여러 날, 그곳에서는 나름 사연 많은 여자로 유명했다.

사연의 8할은 아이들 이야기였으므로 어쩌면 진짜 내 이야기는 빠져있었지만..

나 혼자 간직하고자 썼던 일기형식의 글은 여러 사람들이 듣고 볼 수 있는 사연으로 바뀌면서,

더 신중하게 쓰기 시작했고, ‘쓰는 일’은 하나의 흥미로운 취미로 자리 잡았다.


계속된 사연 올리기는 글쓰기의 단초가 되어 진짜 내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와 마음속에 품고 있던 동화로 두 권의 공저를 출간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쓰기’에 대한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고, ‘쓰기’에 앞서 중요한 것은 ‘읽기’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곧이어 브런치에 입성했지만 재능 많은 작가님들을 보며 위축과 배움을 넘나들었다.

문학 계간지에서 <시 부문> 신인작품상까지 받으며 ‘나 진짜 시인 맞나?’싶은 아리송한 마음으로 또다시 배움을 다짐한다.

고백하자면 브런치 연재는 ‘시’를 사랑하는 마음과 공부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스스로 작가, 시인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이 부끄럽지 않고 싶었다.


나는 언제나 1학년이다.

여전히 배우고자 하는 열망으로 뜨겁기 때문이다.

과거 부족했던 책 읽기를 몰아서 하고 있으며, 쓰는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브런치를 애용한다.


세상이 궁금한 사람, 무언가 다시 시작하는 사람, 모든 이들이 1학년이다.

나이를 먹고 역할이 달라져도 우리는 여전히 배움 앞에 1학년 새 학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난리 중에도 꽃은 피고 배움은 시작된다.

뜨거울 때 꽃이 핀다.





by. 예쁨




기차가 어디로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그 기차에 올라타겠다고 결심하는 거지!



<폴라 익스프레스> 차장의 말이 나를 향하는 듯합니다.

나란히 놓인 레일만 보아도 마음이 쿵 내려앉고, 빈 철길 따라 걷기를 좋아해요.

기차역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어린이의 마음이 되고요.

혼자만의 기차 여행을 소망했고 정동진까지 가는 기차도 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어른이 된 후 기차여행은 단 세 번뿐이었네요.

무엇 때문에 올라타겠다는 결심을 유예하게 된 것일까요.


- 무용해도 좋은, 감은빛 : 기차를 타면 / 유재은 -







*커버사진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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