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의 시간을 감싸안으며 이어지는 사랑과 숨의 기록
증조할머니, 할머니, 그리고 엄마를 거쳐 내게 도착한 이야기
그렇게 나에게로 삶이 전해지듯 지금의 나도 그들에게 닿을 수 있을까
과거의 무수한 내가 모여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듯
지금의 나 또한 과거의 수많은 나를 만나러 갈 수 있을까
책을 고를 때 저는, 그저 훑어보다가 작가의 문체가, 그날의 내 기분에 따라와닿은 책을 고르는 편인데요,
책을 읽다가 여운이 남게 되면 작가를, 그다음에 출판사를 눈에 들이게 되는 편입니다.
그런고로 이런 저에게, '문학동네' 출판사가 마음에 들어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이런 제 마음에 쏙 들어와서 찾게 되는 작가님도 사실 그렇게 많지는 않은 편입니다.
<<밝은 밤>>은 그렇게 느리기만 하는 저에게 '최은영'작가님이라는 마음을, 문체를, 마음깊이 심어준 첫 소설이었습니다.
지금 잠깐만 들춰도 티슈 한 두장 거뜬히 적시는 마성의 소설.
제목인 "밝은" 밤과는 달리 읽는 내내, 읽고 나서도 한 동안 밝았던 적이 없던 책이었는데요,
왜 제목이 밝은 밤이었는지 한동안 생각에 잠기게 만들었던 책이었던 것 같아요.
이야기는 이혼 후 희령으로 내려가는 '길미선'의 딸, '이지연'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1부
1. 나는 희령을 여름 냄새로 기억한다.
서울에서 다섯 시간 정도 내려가는 바닷가 마을 희령은 지연의 외할머니가 사는 곳으로 열 살 때의 기억이 마지막이었는데요, 자신을 알아본 할머니를 마주치게 됩니다. 엄마와 할머니 사이가 좋지 않았고 지연의 부모님은 딸의 이혼이 달갑지 않습니다.
2. 그날 아파트까지 함께 걸어가는 동안 우리는 별말을 나누지 않았다.
우연히 마주친 할머니는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했지만 할머니는 별다른 액션이나 말을 하진 않으셨고 그러다 할머니 집에 가서 함께 밥을 먹게 되고, 그곳에서 옛 사진을 보며 엄마아빠와 닮은 곳이 없던 자신이 증조할머니 '이정선'과 꼭 닮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개성에서 기차 타고 가면 세 시간 걸리는 삼천이라는 곳이 고향이라는 삼천이, 삼천 아주머니인 지연의 증조외할머니. 그렇게 증조모와 증조부가 만나게 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 이야기 속에 증조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였던 새비 아저씨와 새비 아주머니도 만나게 됩니다.
3. 나는 증조할머니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백정의 딸이지만 당당한 눈빛을 가지고 있던 증조모와 신심 깊었던 바오로가 세례도 받지 않은 여자에게 미쳐서 부모와 고향을 등졌다는 증조부는 개성에서 환영받을 수 없었으며, 그 둘은 그저 외로웠습니다. 증조부의 원망은 증조모에게 향하게 되었고, 이 대목이 참 마음 아팠습니다.
"아내에 대한 애정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자신과 달리 당당하고 강인한 그녀를 동경하면서도 두려워했다. 남편으로서의 일말의 권위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예감했고, 아내가 속으로 자신을 비웃고 있지는 않을까 염려했다. 나는 너를 돕기 위해 모든 걸 버렸는데, 왜 그만큼의 대접을 안 해주고 내 기분을 맞춰주지 않는 거지? 그는 의아했고 아내에게 속은 기분이 들었다. 아내는 그저 자기 할일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양민이었던 것처럼 굴었다. 백정인 주제에 말이다. p61~62"
그 사이 새비 내외가 개성으로 왔고 외로웠던 증조모의 마음은 새비 아주머니에게, 서로에게 기대게 됩니다.
"증조모의 마음이 새비 아주머니에게로 기울어서, 그곳으로 기쁨도 슬픔도 안타까움도 모두 흘러갈 듯한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그렇게 기운 마음으로 뒤뚱거리며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p64"
4. 봄비가 온종일 내리던 날,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엄마의 유방암 재발 소식을 들었다.
엄마의 병간호를 하러 서울로 올라갔다가 할머니와 만나서 밥도 먹고 이혼한 이야기도 한 이야기를 전하다 또 엄마와 부딪히게 됩니다. 엄마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다가는 입에서 심한 말이 나올 것 같았다는 지연이의 마음에 어느샌가 저도 감정이 이입되기 시작했어요. 꼭 엄마랑 내 사이 같았거든요.
그렇게 다시 희령으로 내려와서 할머니를 만나 새비 아주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듣게 됩니다.
출산 후 죽을 뻔했던 증조모를 지극정성으로 살려내고 자신도 임신을 하지만 남편이 돈을 벌러 일본으로 떠나는 이해하지 못했던 새비 아주머니.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원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이 인간의 최종 결말이기도 했다.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 엔트로피가 퇴대가 되는 순간이 오면 시간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도 기억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우주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곳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 결말이다. p82"
2부
5. 엄마는 내가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 껍데기들을 다 치우고 나니 그제야 내가 보였다. 깊이 잠든 남편 옆에서 소리 죽여 울던 내 모습이, 논문이 잘 써지지 않으면 내 존재가 모두 부정되는 것만 같아서 누구보다도 잔인하게 나를 다그치던 내 모습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숨 쉬듯 나를 비난하고 비웃던 내 모습이. p86"
새비 아주머니가 낳은 아이 "희자"는 잘 울고 돌보기 힘든 아이였고, 새비 아주머니는 아마도 우울증 때문에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희자는 세 살 위인 증조모의 딸, 지연의 할머니를 유독 잘 따랐고 새비 아주머니는 할머니와 잘 놀아 주었습니다. 새비 아저씨는 1944년에 돌아오기로 했지만 돈을 잘 벌던 때라 돌아오기 아까워 조금만 더 ~ 하다 1945년이 되어버렸습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던 해였죠.
모두가 괴로워했지만 그해 10월 새비 아저씨가 돌아왔습니다.
6. 서울에서 지우가 내려왔다.
지연의 친구 지우가 희령에 내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헤어짐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오래 만났지만 아무것도 아니게 되니까 결국에는 만나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남은 인생이 헤어짐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면 벅차서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지연을 지우는 묵묵히 지켜봅니다.
지연은 그런 의문을 할머니에게도 묻습니다.
증조모와 새비 아주머니도 헤어졌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하니까 차라리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다면, 서로를 모르는 채로 사는 편이 더 좋지 않았을까요?
"새비 아주머니는 엄마의 상처였어. 그렇지만 자랑이기도 했지. 엄마를 크게 넘어드렸지만, 매번 털고 일어날 힘이 되어주기도 했으니까. 엄마가 새비 아주머니를 떠올리며 가장 많이 했던 얘기는 이거였어. 새비가 나를 얼마나 귀애해줬는지 몰라, 새비가 나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몰라,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 아픈 일이 많았는데도, 새비 아주머니를 기억하는 엄마의 표정은 늘 환했어. 꼭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말이야,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상처 같은 거 받지 않아도 됐겠지만 그래도 엄마는......"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는 삶을 택하셨겠네요." p116
7. 서울에 올라간 주말, 엄마 집에서 가까운 봉화산으로 엄마와 함께 산책을 하러 갔다.
자신이 생각보다 엄마에 대해 몰랐다는 사실을 병간호를 하게 되며 엄마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된 지연은 아빠밥이 세상 중요했던 엄마가 인생을 다시 잡으러 친구 따라 멕시코로 가고 싶다는 엄마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희령으로 돌아와 다시 할머니에게 새비 아주머니가 희령으로 내려오게 되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요, 당시에는 사상범으로 몰려 총살을 당하는 일이 허다했고 그런 위험 속에서 새비와 희자가 증조모네서 며칠 내려와 묵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구로 피난을 떠나 다시 헤어지게 됩니다.
3부
8. 의사와 상의하지 않고 약을 끊은 지 한 달 만에 정신과에 가서 약을 받았다.
9. 다섯 살의 나는 죽음을 정확히 이해지 못했다.
10. 엄마가 멕시코에서 돌아온 주 주말에 서울에 올라갔다.
11. 귀리는 장난꾸러기에 응석받이였다.
4부
12. 사고 현장을 발견한 사람은 트럭을 타고 집으로 향하던 목수였다.
13. 퇴원하고 통원 치료를 받는 사이에 완연한 가을이 되었고 사촌동생 혜진이의 결혼식에 참석할 즈음에는 날이 꽤 쌀쌀해졌다.
5부
14. 열차가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나는 누구에게 거짓말을 했나.
나에게, 내 인생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알고 싶지 않아서, 느끼고 싶지 않아서.
어둠은 거기에 있었다."
p299
15. 엄마에게서 문자가 온 건 할머니 집에서 밤을 보내고 얼마 안 돼서였다.
16. 이지연씨께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나는 나를 너무 쉽게 버렸지만 내게서 버려진 나는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그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종종 눈을 감고 어린 언니와 나를 만난다. 그애들의 손을 잡아보기도 하고 해가 지는 놀이터 벤치에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학교에 갈 채비를 하던 열 살의 나에게도, 철봉에 매달려 울음을 참던 중학생의 나에게도, 내 몸을 해치고 싶은 충동과 싸우던 스무 살의 나에게도, 나를 함부로 대하는 배우자를 용인했던 나와 그런 나를 용서할 수 없어 스스로를 공격하기 바빴던 나에게도 다가가서 귀를 기울인다. 나야. 듣고 있어. 오래 하고 싶었던 말을 해줘." p337
소설 속 주인공인 지연은 천문대에서 일을 합니다. 희령에 이사한 후 망원경을 꺼내 놓고 달과 목성을 보다가 할머니께 이런 말을 하죠.
"백삼십억 년 전 우주의 모습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렇게 먼 옛날의 모습을 우리 눈으로 지금 보고 있다는 거야?"
"맞아요."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그 오래전 걸 어떻게 본다는 거야."
"그러게요. 근데 그게 가능하더라고요."
p91-92
<<밝은 밤>>의 이야기는 증조모의 이야기, 그전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별'은 과거에 남긴 발자취 정도지만 우리는 그 반짝임을 보며 꿈을 꾸죠. 지연이와 할머니도 지금의 모습을 보며 과거를 떠올리는 것처럼요. 엄마랑은 닮지 않았지만 성격까지 증조모를 닮은 지연도 과거에서부터 이어진 별이 아닐까요.
이 책을 접했을 때 저는 무너지는 중이었습니다. 마흔 살 넘게 내가 잘 쌓아놓은 포장지가 한 꺼풀씩 벗겨지는 느낌을 받고 있던 차였습니다. 잘 사는 중이라고 포장하고 있었던 내 삶이 사실은 엉망진창이었다는 사실이 힘들어 하루하루 견디던 차에 지연이를 만났고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지연의 마음을 통해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될 계기가 되었습니다.
<<밝은 밤>>은 무던한 청소년 소설처럼 마지막에 지연의 삶이 화해와 용서를 통해 관계를 회복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결말이 짜란~하고 열리지 않는 것처럼요. 3대를 걸친 삶의 이야기 속에서 나의 길을 바라보고, 비로소 울부짖고 있던 나의 삶에 귀 기울여보는 모습을 통해 치유의 과정을 걸어가는 길을 묵묵하게 그려내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무사히 도착하기를, 자신만의 생명으로 누군가의 마음에 잠시나마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라고 하신 작가님의 전하는 말처럼 꼭 필요한 때에 저에게 잘 도착했습니다.
앗! 도서관 책이 너무 지저분하네요.
이사 후 쌓여있는 책들이 정리되지 않아서 책 구매를 못하고 있네요 ㅠㅠ 또 책을 사면 눈치가 눈치가....
손 때가 묻은 만큼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 시간들이었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