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아래 홀로 남은 여인의 이야기
3화.
고요의 전조 _ 받아들임의 밤
밤은 깊고 길었다.
가브리엘 천사가 떠난 뒤, 방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했다. 그러나 그 고요의 심장부에서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파문이 맴돌고 있었다.
흙벽에 스민 낮의 열기는 서서히 식어 갔고, 등잔의 올리브유는 잔향을 남기며 얕은 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닥의 흙먼지는 발뒤꿈치에 ‘가루’ 같은 미세한 감각을 남기고 있었고,
이는 마치 지금 이곳이 땅이며, 이 땅 위에서 모든 일이 찰나의 순간에 벌어지고 있음을 마리아가 잊지 못하게 각인시키는 듯했다.
마리아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손바닥이 맞닿는 순간 뼈마디의 미세한 울림이 느껴졌다.
그 떨림이
손목,
팔꿈치,
어깨로,
그리고 가슴의 한복판으로 천천히 흘러들었다.
이마가 바닥 가까이 낮아지자 흙냄새는 더욱 선명해졌다. 숨이 가늘어질수록 명치 아래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기운이 가만히, 조금씩 일어 올랐다. 그렇게 마리아의 기도는 시작되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시험하는 사람처럼 마음의 문장을 한 줄 한 줄 소리 없는 음성으로 더듬었다.
"이 뜻이 진정 하느님의 뜻인지...
혹은 유혹의 그림자인지..."
그녀의 물음은 한 번으로 닿지 않았고, 파도처럼 여러 번 되돌아왔다.
그녀는 묻고,
멈추고,
기다리고,
다시 물었다.
침묵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은 부정하지도 않았다. 침묵은 때로 가장 깊은 긍정이었다. 그녀는 그 긍정을 알아차릴 만큼 오래, 무릎으로 시간을 견뎌냈다.
기도의 간극마다 그녀는 문득 자신을 돌아보았다.
어린 시절 안뜰의 흰빛, 첫 양피지를 펼치던 날의 손끝의 떨림, 어머니가 새벽마다 눌러 앉히던 발효 반죽의 호흡, 아버지의 말없는 손등의 곧음, 미니 하프 리라의 양창자줄이 손끝에서 데워질 때 나는 미세한 열, 납작 빵 껍질이 ‘톡’ 하고 터질 때의 따끈한 파편, 장터의 소란과 소금 냄새, 저녁 하늘의 별. 이 모든 기억의 조각들이 서로를 불러 이었고, 그 이어짐의 한가운데 순수한 ‘받아들임’이 자리했다.
받아들임은 체념이 아니었다.
받아들임은 선택이었다. 그녀는 선택을 사랑했고, 사랑은 언제나 설명보다 먼저 자리했다.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설명은 언제나 나중에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오래 낭송해 온 이야기 속 여인들을 떠올렸다. 침묵으로 길을 연 이들, 두려움을 품고도 한 걸음 더 들어간 이들. 그들의 이름을 부를수록 그 이름들은 마리아의 등에 얹혀 가벼운 날개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날아오르지 않았다. 대신 더 깊이 주저앉았다. 낮아짐이 곧 높아짐의 비밀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이의 의식적인 주저앉음처럼 보였다.
“말씀대로 따르겠나이다.”
입술 안쪽으로 한 번 더 중얼거렸다. 말끝은 떨리지 않았다. 떨림은 이미 가슴으로 내려가 불씨가 되었고, 그 불씨는 꺼지지 않고 더 타올랐다.
한밤의 숨이 잦아들 무렵,
먼발치에서 개 짖는 소리가 두어 번 들렸다가 다시 사그라들었다. 골목의 바람이 창턱을 거친 사포처럼 서걱거리며 긁었고, 등잔은 심지를 삼켰다 뱉으며 작은 금빛 호흡을 내쉬었다.
무릎 아래 감각이 저릿해질 만큼 오래 기도한 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바로 세웠다.
허벅지의 근육이 짧게 경련했고, 발목의 혈관은 다시 온기를 찾아갔다.
세상은 그 어떤 것도 바뀌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세상은 이미 바뀌어 있었다. 왜냐하면 오늘, 마리아가 어제의 그녀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마리아는 방 한가운데에 조용히 서 있었다.
공기가 낯설 만큼 새로웠다. 길게 뽑아내는 숨이 흙벽 안쪽을 밀어 올렸다. 눈을 감자 배 깊은 곳에서 아주 미세한 따스한 소용돌이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한 손을 배 위에 조심스레 얹었다. 손바닥의 온기가 피부를 지나 근육과 혈관, 그리고 더 안쪽의 어둡고 조용한 성스러운 방으로 스며들어갔다. 그 안에서 아주 작은 존재의 응답이, 거의 감각이라 부르기 어려울 만큼 작은 진동으로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대신 아주 오래 미소 지었다. 소리를 내지 않는 미소가 천천히 우는 법을 스스로 배운 것처럼, 그녀의 미소는 조용히 떨림으로 울고 있었다. 그 울음은 모든 것의 내려놓음이자 절대적 수용이었다.
창문이 스스로 조금 열렸다.
밤의 공기가 비단처럼 얇은 한 겹을 이루며 방 안으로 흘러들었다. 흙과 물, 나무와 먼지, 사람과 짐승,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새벽의 냄새가 이미 진득하게 섞여 있었다. 냄새를 깊게 마시는 동안 등 뒤에서 시작된 두려움이 앞가슴에서 평화로 바뀌었다. 평화는 결심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그녀는 창을 두 손으로 조용히 닫았다.
등잔불은 눌려 빛을 조금 낮췄다. 빛은 작아졌지만 깊어졌다. 그 깊이를 닮아 그녀의 생명의 중심도 점점 깊어졌고, 제 자리를 잡아갔다.
밤은 길었고, 고요는 깊었다.
그러나 더 이상 그 고요는 비어 있지 않았다.
오늘 이 고요의 중심에는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은 아주 고르게, 작은 맥박을 유지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