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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그림자

빛 아래 홀로 남은 여인의 이야기

by 영업의신조이

2화.

방문 _ 불빛 아래의 천사



그날 밤의 공기는 유난히 맑았다.

나사렛의 겨울 초입, 돌담 사이로 스며드는 냉기가 공기를 단단히 조였고,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그날은 유난히 별빛이 오래 머무는 밤이었다.



마리아는 방 안의 등잔불을 낮추었다.

손끝으로 심지를 조정하자 불꽃이 황금의 씨앗처럼 말려 올라가 조용히 숨을 고르는 듯 떨렸다.

방 안은 빛보다 냄새가 먼저 변해 갔다.

퍼져 가는 올리브유의 향, 진흙 벽에 남은 낮의 열기, 양모 담요에 밴 은근한 비린 냄새까지 함께 겹쳐지며, 방 안 공기도 천천히 차분해졌다.



그녀는 무릎 위에 펼쳐 둔 양피지 조각을 천천히 매만졌다.

필 끝이 닿자 얇은 섬유가 바람처럼 손끝을 스쳤다.

활자 대신 그녀의 눈앞에는 히브리 기호가 일렁였다.

글자 사이로 불빛이 스며들며 가슴 깊은 곳에서 둥근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머리카락은 어깨를 따라 고요히 흘렀고, 가닥 끝마다 불빛이 한 올 한 올 매달려 있었다.

눈빛은 어둠에 길들어 더욱 깊어졌고, 콧날은 석조 조각처럼 단단해져 갔다.

입술은 마른 흙처럼 얇았지만, 그 얇음은 결심의 다른 이름처럼 보였다.

손목의 힘줄이 미세하게 솟아오르고, 발등 위로 푸른 혈관의 그림자가 얹혔다.

그 모든 선들이 모여 ‘빛 아래의 소녀’라는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바람이 창틈을 스쳤고, 등잔불은 소리를 내지 않았으나 잠시 숨을 멈춘 듯 떨렸다.

그때, 그 순간이었다.

천장의 모서리에서부터 서늘한 존재의 밀도가 내려왔다.

공기의 무게는 갑자기 변했고, 그 변화는 피부가 먼저 알아챘다.

팔 안쪽의 솜털이 일어섰고, 심장의 박동은 낯선 박자를 두 번, 세 번 놓쳤다 찾았다를 반복했다.



천장 쪽 어둠이 얇은 빛의 비늘로 벗겨져 나갔다.

그 비늘들이 하나씩 떨어져 바닥에 닿기도 전에 공기 속에 녹아들어 가느다란 길을 만들었다.

그 길 위로 발끝이 형체를 내리꽂았다.


빛으로 이루어진 엄지발가락을 시작으로, 종아리, 허리, 어깨, 그리고 날개…

펼쳐진 날개는 방의 천장을 가득 채웠다.

깃털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결을 품고 있었고, 은빛과 금빛 사이로 푸른 선율이 번져 나갔다.

그 순간, 방 안은 온 세상 새벽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가브리엘이었다.

천사의 눈빛은 차갑지 않았으나 따뜻하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 안에는 끝이 없는 길의 침묵이 있었고, 그 무거운 침묵이 말 하나를 밀어 올렸다.

날개에서 흘러나온 빛이 벽과 천장을 스치며 넘나들었고, 그가 자리한 공간의 모든 먼지 입자들은 별처럼 부유했다.

깃털 끝이 등잔불에 스쳐 얇은 광륜을 만들자, 그 광륜이 소멸할 때는 소리 없는 울림이 길게 여운을 남겼다.



마리아의 몸은 굳어졌고, 애써 들숨과 날숨을 이어 나가야 했다.

두려움이 심장을 조였고, 심장이 조여올수록 호흡은 더 짧고 거칠었다.

그녀의 숨의 리듬과 방 안의 고요가 마치 기도처럼 맑고 투명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의 목소리가 공기의 중심을 찢지 않고 조용히 스며들었다.

소리는 울림이 아니라 온도로 다가왔다.


“은총을 받은 여인이여, 하느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그 말이 끝나자 방 안의 기온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등잔의 불꽃이 흔들렸고, 황금빛이 그녀의 피부를 감싸며 따뜻해졌다.


그녀는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양피지 위에서 손가락이 떨어질 때, 작고 끈적한 접착음이 났다.

그 미세한 소리조차 공기의 한가운데 맺혔다.

그녀는 몸을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두려움은 경외로 옮겨 갔고, 경외는 곧 책임으로 번져 갔다.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릴 때, 천사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문장은 벽을 돌아 그녀의 가슴 한가운데로 꽂혔다.

몸이 얇게 떨렸고, 그 떨림의 끝에서 기도가 솟아났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

목소리는 부서질 듯 낮았으나, 끝내 부서지지 않았다.

가브리엘 천사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라.”

그 말은 설명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선언은 변명이나 망설임의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침묵이 깊어졌고, 그녀는 등잔불을 바라보았다.

불꽃의 끝에는 푸른 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테 너머엔 어둠이 있었고, 그 어둠의 가장자리가 바로 경계였다.

어린 소녀와 어머니의 사이, 인간과 신의 사이, 세상의 법과 하늘의 뜻 사이…


그녀는 그 경계 앞에서 주저하지 않았다.

손을 모았다.

그 동작은 하루에도 수십 번 반복한 기도의 시작이었지만, 그날 밤의 두 손 모음은 마리아 인생을 바치는 평생의 동의였다.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이다.”



그 짧은 대답 뒤로 방 안은 완전한 고요에 잠겼다.

그러나 그 고요 속에서 그녀의 마음은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는 자신이 더 이상 어제의 어린 소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 하느님의 뜻은 먼 하늘의 계시가 아니라 자신 안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두렵지만, 도망치지 않겠다.

이것이 나의 길이라면, 나의 몸과 마음을 모두 내어놓겠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속삭였다.

그것은 복종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그녀는 이제 신의 뜻을 감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뜻을 함께 나누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천사의 빛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날개는 접혀 몸의 뒤로 사라지고, 깃털의 그림자는 천장 속으로 돌아갔다.

빛의 비늘은 역순으로 맞물리며 꺼져 나갔다.

방 안에는 다시 등잔 하나의 불빛만 남았다.

그러나 그 불빛은 더 이상 이전의 불빛과 같지 않았다.

빛은 작아졌지만, 그 깊이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녀의 손끝에 남은 떨림이 천천히 잠들었고, 다시 자리에 앉은 그녀는 책을 펼쳤다.

글자들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으나,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한 문장을 읽고, 그 문장을 가슴으로 옮기고, 가슴에서 다시 손끝으로 옮겼다.

손끝이 따뜻해졌고, 그 따뜻함이 배로 흘렀다.

배 깊은 곳에서 아주 미세한 새벽의 움직임이 일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숨을 길게 들이켰다.

어둠은 더 이상 무겁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어둠은 깊이였고, 그 깊이의 중심에서 신의 생명이 움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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