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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그림자

빛 아래 홀로 남은 여인의 이야기

by 영업의신조이

1화.

순수의 초상 _ 빛을 배운 소녀



마리아는 빛을 배우는 소녀였다.

빛은 매일 아침, 안뜰의 흰색 석벽 벽돌들 사이에서 먼저 눈을 떴다. 기도를 마친 그녀가 양피지와 밀랍판을 펼치면, 빛은 다시 그 위에 내려앉았다. 회당에서 들은 시편의 구절을 집으로 돌아와 손수 옮겨 적는 것이 그녀의 습관이었다.


글자의 줄을 따라 흐르는 미색 바탕의 가늘고 섬세한 검은 먹선은 하나의 강이 되어 종이 위를 흘렀고, 그 강물의 떨림이 그녀의 눈동자에서 다시 파문을 일으켰다.

손끝에 스치는 말린 가죽의 표면의 촉감, 기름기, 뼈필이 밀랍판을 긁을 때의 낮은 마찰음...

그 모든 것이 마리아에게는 세상으로부터 들려오는 맥박처럼 들렸다. 문장 하나를 완성할 때마다 혀끝에 감도는 생 대추야자의 달콤함이 그 문장을 기억하게 했다.


집의 아침은 언제나 빵 냄새로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새벽어둠이 풀릴 무렵, 물독에서 찬물을 길어와 맷돌에 불린 보리와 밀알을 갈았다.

전날 남겨둔 발효 반죽을 한 줌 떼어 넣으면, 반죽은 천천히 숨을 쉬며 살아났다.

공기 속에서 효모의 미세한 알싸함이 퍼졌고, 그 향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기도처럼 부엌을 채웠다.


마리아는 반죽의 표면에서 기포가 피어오르는 찰나를 놓치지 않으려 얼굴을 가까이했다. 손바닥으로 반죽을 치대면 밀가루의 건조함과 손의 체온이 맞부딪히다 어느 순간 하나로 녹아들었다.

진흙 가마의 숯불이 숨을 고르면, 어머니는 손바닥과 손등에 물을 묻혀 반죽을 눌러 얇게 늘렸다. 타분 화덕 벽에 빵이 붙는 찰칵 소리, 껍질이 부풀며 터지는 ‘톡’ 하는 파열음, 그리고 구수한 향이 부엌의 공기를 데웠다.


빵이 떨어지는 짧은 진동이 식탁으로 번질 때마다, 집안에는 축복의 냄새가 깃들었다. 올리브유 한 방울은 햇살처럼 번졌고, 타임 허브와 자타르 향신료 가루가 흩날리면 모든 향들이 뒤섞여 들숨과 함께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어깨를 스치며 리넨 숄 위로 흘렀다. 햇살은 그 결마다 닿아 금빛 먼지처럼 반짝였고, 눈빛은 깊고 잔잔했다. 밝게 웃을 때마다 눈가에 자리 잡는 그늘은 빛의 농담을 더했다. 곧은 콧등에 내리쬐는 오후의 햇빛은 얼굴의 선을 더욱 길게 드러냈다. 손목은 매우 가늘었으나, 반죽을 다루는 손에는 강인한 힘이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밀가루의 미세한 온도 차이도 구분할 만큼 감각은 섬세했다.


어머니는 그녀를 집 안의 빛이라 불렀고, 아버지는 집 밖의 평화라 불렀다.

그녀가 책장을 넘기거나 밀랍판을 덮을 때 나는 가벼운 마찰음은 집 안에서 가장 고요한 음악이었고, 악기를 잡을 때마다 공기의 결이 달라졌다.


그녀가 자주 연주하는 악기는 미니 하프 리라였다.

동네 장인의 손에서 태어난 소박한 크기의 상아색 배경에 진한 갈색 리라, 소리통의 올리브나무 결은 그대로 살아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과 손바닥이 닿을 때마다 리라는 낮게 숨을 내쉬었다. 마리아는 엄지와 검지로 줄을 받쳐 울림을 세웠다. 양의 창자줄로 만든 거트현이 손끝에서 뜨거워질 때, 소리는 천장과 흙벽을 타고 안뜰의 무화과나무 그늘까지 흘러 들어갔다.

해가 높을 땐 맑게, 석양 무렵이면 한층 짙게. 한 음을 길게 눌러 늘이면, 그 끝자락에서 작은 새의 날갯짓 같은 떨림이 피어났다. 그 떨림들이 모여 하늘을 향한 기도가 되었다.


그녀에게 기도는 습관이자 호흡이었다.

말씀을 외울 때마다 단어가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아니라, 가슴의 중심을 지나 발끝으로 번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 감각이 그녀를 단단히 세웠다.

하느님의 이름을 부를 때 그녀의 등은 곧아졌고,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마다 그녀의 마음은 정화되었다.


마리아는 애해 하는 말씀보다 먼저 도착하는 행하는 사랑을 믿었고, 그 믿음으로 하루를 열고 닫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좋은 딸, 준비된 신부라 불렀다. 장터에서 만난 이웃이 “네 어머니의 손이 넉넉하다더라”라고 말하면, 그녀는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그 뒤에서 사람들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눈빛이 맑다.”

“말의 결이 곱다.”

“손길이 단정하다.”


칭찬은 조용히 퍼져나갔고, 소문은 부드럽게 이어졌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모든 자리에는 그녀를 위한 선자리를 의논하려는 발걸음이 있었고, 마리아 어머니의 눈빛은 희망과 망설임 사이에서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버지는 말수가 적었으나, 그 침묵은 마리아에게 선택의 여백을 남겨주었다.


그녀는 소란 속에서도 하루의 균형을 잃지 않았다. 새벽의 물독에서 느꼈던 냉기를 기억했고, 그것이 방금 전의 따뜻한 반죽과 정반대임을 아는 마음은 그녀를 단련시켰다.


아침엔 빵을 굽고, 낮에는 물레에서 리넨 실을 잣고, 저녁엔 아버지와 안뜰을 걸으며 별을 셌다. 별은 언제나 제자리에 있었지만, 셀 때마다 마음은 새로 고요해졌다. 고요가 깊어질수록, 그녀의 내면에서는 이름 붙지 않은 사무침이 자랐다.


‘좋은 딸, 준비된 신부’라는 이름은 따뜻했으나, 그녀를 완전히 정의하지는 않았다.

그녀 안에는 아직 불리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그 무언가는 어느 날 문밖에서 울릴 낯선 발걸음처럼 다가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낮에는 손의 일을, 밤에는 마음의 호흡을 다듬었다. 겸손과 자세를 낮추는 일은 지는 일이 아니라, 다가올 무언가를 준비하는 일이라는 것을 배웠다.

빛은 언제나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시작된다는 것도 그녀는 삶 속에서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었다.


그날 저녁, 마당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서쪽 능선이 붉은 잿빛으로 식어갈 때, 바람의 결이 달라졌다. 멀리 올리브 과수원을 스치던 바람이 골목의 흙먼지를 들어 올리 낯선 방향으로 이끌었다.


마리아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음속 오래도록 되뇌던 구절 하나가 그 순간 빛을 내며 떠올랐다. 그 빛은 소리보다 먼저 가슴을 두드렸다.


그녀는 등잔불을 다듬었다.

올리브유를 조금 더 붓고, 아마실로 엮어만든 심지를 바로 세웠다. 불꽃의 혀가 짧아지며 금빛 고요가 얼굴 위에 얹혔다.


그녀는 무릎을 꿇었다.

기도는 짧았고, 간절함은 길었다.


“언제나 마음을 나누게 하소서.

행하는 손과 발을 단단하게 하소서.

내 안의 당신의 사랑이 무너지지 않게 하소서.”


그 말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창턱을 스친 바람이 등잔불을 흔들었다가 이내 다시 자리를 잡았다. 불빛이 잦아드는 동안, 그녀의 눈빛은 더욱 빛나고 깊어졌다.


어둠은 두려움이 아니라, 깊이였고, 그녀는 그 깊이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언제나 그녀에게 내일을 선물해 주었다.


그녀는 ‘본인이 알아야 할 매우 중요한 사건이 있음을 그녀 스스로 아직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름이 그녀는 두렵지 않았다.

그녀에게 모름은 가장 넓은 문이었고, 그녀는 그 문 앞에서 조용히 서 있을 용기와 믿음이 있었다.


무화과 잎 하나가 바람에 뒤집혔다.

그리고...

아주 멀리서, 보이지 않는 날개의 기척이 한 번, 아주 작게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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