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장애인 여행 캠프에 워커로 가다 (4)
오전 9시경이 되자 참가자들이 사무실 앞 주차장에 속속들이 도착했다. 보호자의 차를 타고 온 경우가 많았다. 보호자는 그들의 부모님이나 시설의 직원이었다. 소피는 이리저리 바삐 움직였고 사이사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그런 그들이 보이는 창문 앞에 서 있다. 나와 같은 방에 놓인 매트리스에서 밤을 보낸 티나는 샤워를 하기 위해 소피의 집에 가 있다. 소피의 지시를 받지 못한 나는 무엇을 해야 할 지 몰라 어정쩡하고 어색하게 서 있다. 밖에 나가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사람들이 독일어도 잘 못하는 나를 미덥지 않아할까봐 걱정이 됐다. 내가 봐도 이곳에서 내 존재는 너무 엉뚱했다. 더딘 발걸음으로 밖으로 나가 소피의 곁을 기웃거렸다. 그는 참가자들의 가방에서 상비약이나 신분증 등 중요한 것들을 따로 빼서 보관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지갑은 사람마다 캠프에서 관리하기도 하고 개인이 소지하기도 했다. 막 도착한 또 다른 워커 베라는 부지런히 움직이며 참가자들의 짐을 트렁크에 실었다. 몇몇의 사람들이 내게 인사를 했다. 할로? 나는 할로, 뷔 하이스트 두? (이름이 뭐에요?) 하며 인사를 했다. 비어기트, 야스민, 마리누스… 어려운 이름을 기억하는 것보다는 뻘쭘함을 감추는 것이 우선이었다.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곳에서 진짜 독일이 시작되는 듯했다. 그동안 영어 뒤에 숨느라 잘 쓰지 못했던 독일어를 많이 뱉을 기회였다. 잘 못하는 독일어를 감추고 싶어서 보호자들 근처에서는 목소리가 작아졌다. 종이테이프에 이름을 써서 그들의 짐에 붙이고, 봉고차 트렁크로 옮겼다. 어색할 때는 화장실에 가서 숨을 고르고 다시 주차장으로 나와 짐 옮기기를 하고 인사를 했다. 봉고차 두 대에 모든 짐이 실리고, 참가자들도 차에 앉아 출발을 기다렸다. 3시간 정도의 운전에 앞서, 소피는 내게 화장실에 가고 싶은 분이 있으면 모시고 다녀오라고 말했다. 내가 받은 첫 번재 임무였다. 나란히 봉고차 뒷좌석에 탄분들에게 한 명씩 물었다. “화장실 가고 싶으세요?” 간단한 말이지만 직전에 한번 인공지능에게 검사를 한번 받았다. 아주 쉬운 말이라도 뻘쭘할 필요 없이 "이거 맞아?" 하고 물어볼 수 있었다.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대답을 한 건 요르간 뿐이라서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건물로 들어갔다. 그분은 작은 체구에 짧고 흰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남자 화장실로 가야 할지 여자 화장실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곳은 여자 화장실이고 이곳은 남자 화장실이에요”하고 말했다. 그는 대답 없이 여자 화장실로 척척 들어갔다. 그런가 보다 했더니, 화장실 칸에 들어가 문도 닫지 않은 채 그대로 변기 앞에 서서 소변을 보시기 시작했다. 여성의 방식은 아니었다. 다음부터는 남자 화장실로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볼일을 끝낸 그와 함께 차로 돌아갔다.
열네 명의 참가자와 네 명의 워커가 봉고차 두 대에 올라 무어나우를 떠났다. 내 자리는 운전하는 소피 옆 조수석이었고, 뒤로는 여섯 명의 참가자가 있었다. 소피는 슐라거 음악을 틀었다. 나로서는 시끄러운 독일의 트로트 같은 노래였는데 참가자들은 신나는 멜로디를 즐기는 듯했다. 독일 전통적인 스타일의 노래로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전통 맥주 축제와 같은 곳에서 자주 울려 퍼진다. 사람들이 음악에 환호하고 봉고차가 독일의 드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달리는 동안, 나는 소피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데 주력했다. 차분하면서도 경쾌한 면이 있는 소피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던 나는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나의 호기심은 대체로 수줍음을 이겼다. 그와 둘이 영어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라는 걸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내가 말을 걸 때마다 소피는 신나게 흘러나오는 노래의 볼륨을 줄이며 성실히 대답했다. 나는 그녀의 학창 시절부터 쿤터분트에서 상근하는 현재까지 그녀의 이야기에 고루 귀를 기울였다. 스물 여섯 소피는 장애가 있는 남동생이 있다. 남동생은 발도르프 특수학교에 다녔고, 그래서인지 발도르프 학교나 몬테소리 학교의 교사가 그녀에게는 늘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진로의 선택지였다. 대학에서 특수교육을 전공했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큰 흥미가 없었던 소피는 선생님이 되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 지 알지 못했다. 시골 마을에서 살아왔기에 베를린과 같은 큰 도시에 살아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가 어째서 쿤터분트에서 일을 하게 됐는 지 그 경로를 자세히 기억하지는 못한다. 지난 날 자신이 바라본 목적지가 쿤터분트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이 일을 향해 왔다.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자신의 삶은 만족할만 했다. 코로나 이후로 워커가 줄어들어 한달에 두 번이상 캠프에 가느라 지쳐있긴 하지만 자신의 역할을 즐기며 잘 해내는 사람이었다. 소피는 무어나우 지역에 큰 개, 그리고 남자친구와 함께 살고 있다. 쿤터분트로 만나게 된 그의 연상 남자친구는 전신 마비로 눈동자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24시간 보조하는 일을 하고 있다. 눈동자의 움직임을 인식하는 기계를 이용해 대화를 하고 그분이 논문을 쓰는 일을 돕고 있다. 지금껏 한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삶이 그려졌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에는 남자친구와 남동생, 그리고 가족들이 다 함께 쿤터분트 크리스마스 여행에 참여해서 정말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나도 저절로 쿤터분트의 크리스마스를 한번쯤 보내보고 싶다고 바랐다. 또한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 무어나우가 얼마나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지, 그래서 칸딘스키를 비롯해 많은 화가가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그 호수에 가서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그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으며 내가 지나온 삶과 살아보지 못한 삶들을 떠올렸다. 앞으로 나아갈 삶도 그곳에 있었다. 영감을 받을 수 있을만큼 좋은 이야기를 들으려면 가능한 솔직하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생각과 나의 이야기를 풀어 놓을수록 유리하기에 말을 하는 것도 아끼지 않았다. 공통점을 찾기도 하고 떠다녔던 생각이 명확한 언어로 바뀌기도 했다. 독일에 오길 참 잘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은 이런 순간이다. 가끔 잘 맞는 사람을 만나 언어의 한계에 가로막히지 않는 대화를 나눌 때 말이다.
3시간쯤 지났을까, 창밖으로 저 멀리 푸른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작게 보이는 집들 너머로 보이는 아주 파랗고 큰 호수였다. 소피는 창문을 끝까지 내리며 “왼쪽을 봐! 호수다!”하고 외쳤다. 차 안은 창밖에서 불어오는 소금기 없는 바람과 환호성으로 떠들썩해졌다. 다들 여름휴가에 잔뜩 신난 것 같았다. 독일 남부 지방의 바다라고 불리는, 독일 사람들의 여름 휴가지인 보든제에 이런 기회로 오다니, 나도 기대에 찼다. 작은 골목으로 들어서자 창밖으로 꽃 화분을 늘어뜨린 집들이 나왔다. 곧 여러 개의 나무집이 있는 곳에 차가 멈췄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시골의 정원이 있는 집처럼 보였다. 하나둘 차에서 내릴 때마다 거칠고 긴 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앞머리를 자른 주인장 카릴이 한 명씩 이름을 물으며 인사를 했다. 무릎이 보이는 기장의 리넨 천의 흰색 원피스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언뜻 보이는 발은 단단했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느낌이었다. 나도 그녀에게 독일어로 인사를 건네며 나는 한국 사람이고, 이곳에 워커로 왔다고 했다. 독일어를 잘 못한다는 말도 괜히 덧붙였다. 카릴은 흠칫 놀라더니 내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우리가 머물 그곳은 여러 채의 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에 차를 세워둔 곳에서 자갈길을 지나면 주방과 화장실, 창고, 큰 식탁, 야외의 큰 테이블이 있는 첫 번째 집이 나온다. 그리고 왼쪽으로는 마구간으로 갈 수 있는 작은 길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우리가 잠을 잘 나무집 세 채가 복잡한 구조로 얽혀있다. 곳곳이 풀과 나무, 꽃들로 가득했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자연스레 야외의 나무 테이블에 앉아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카릴은 사람들에게 시원한 물을 한 잔씩 주었다. 커다란 쟁기가 벽에 걸려있기도 했고 나무 탁자 위에는 들꽃 뭉치와 한 다발 해바라기가 유리 화병에 꽂혀 있었다. 길다란 나무 테이블과 짚으로 된 소박한 의자가 이리저리 놓여 있었다. 날씨는 무척 좋아서 모든 것이 고르게 햇빛을 받았다. 에릭 로메르 영화에서 보이는 여름의 풍경에 들어온 것 같았다. 잠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이곳저곳을 살금살금 돌아다녔다. 집 안에서는 걸을 때마다 나무 바닥에서 끼익하는 소리가 났다.
얼마 후 소피와 함께 차의 트렁크에 있는 짐들을 옮겼다. 사람들은 자신의 짐가방들을 찾아갔고 난 먹을 것을 냉장고로 옮겼다. 다음 임무는 방마다 돌아다니며 가져온 매트리스와 이불의 커버를 끼우는 거였다. 고작 두개 정도 끼우니 벌써 허리가 뻐근했다. 방마다 구조도 다르고 창문의 크기도 다르고 인테리어도 달랐다. 소박하지만 따뜻한 느낌의 방들이었다. 2인용 침대도 있고 1인용 침대도 있었다. 어떤 침대는 매트리스 커버 아래에 아주 커다란 기저귀 패드를 깔아야 했다. 커버 끼우기의 다음 임무는 저녁 준비였다. 셰프는 소피였고 나는 자르기 담당이었다. 토마토 스파게티와 샐러드에 들어갈 야채를 한아름 주방 앞 야외 테이블에 펼쳐놓았다. 여분의 도마와 칼을 내 앞에 두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뭐 좀 자르고 싶어요? (Möchtest du etwas Schneiden?)” 곧 나이가 지긋해 흰 머리에 주름이 지긋한, 비어기트 할머니가 잔뜩 웃는 얼굴로 내 앞에서 방울 토마토와 오이를 썰기 시작했다. 눈에 보라색 쉐도우를 바르고 립글로즈를 칠한 비키도 내 옆에 앉아 당근을 썰었다. 비어기트 할머니는 장난스러운 눈으로 나를 친근하게 대했다. 난 마늘을 찧고 있었기 때문에 비어기트 할머니에게 마늘이 독일어로 무엇이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크놉블라우흐!(Knobblauch)”라고 알려줬고 그걸 따라 말하는 내 발음이 웃긴다는 듯 연신 낄낄 웃으며 고개를 절레 절레 저었다. 나는 여러 번 크놉블라우흐를 발음했고, 무엇이 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비어기트 할머니가 터트리는 웃음을 들을 수 있었다. 해야 할 일도 있고, 같이 있는 사람도 있다니! 게다가 웃을 수 있다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정말 많은 조각의 채소가 떨어져 있었다. 기꺼이 그것들을 주워 담았다. 면이 모자라 작은 주방에서 스파게티 면을 다시 삶을 때도 비어기트 할머니는 내 곁에 있었다. ‘면을 끓인다’, ‘우리는 기다린다’와 같은 문장들을 할머니에게 배웠다. 저녁 먹은 후 다른 워커들이 참가자들을 씻기고 필요한 약을 챙기는 등 잘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주방에 남았다. 언어가 통하지 않기에 자연스럽게 얻은 단순 육체노동의 자리였다. 열 여덟명인분의 설거지와 수많은 물컵이 산을 이뤄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모든 그릇들이 깨끗하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기진맥진한 채 잠들기 직전에서야 방에 들어갔지만 독일에서 독일어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평생 와볼 일 없었을 작은 시골 집에서 뽈뽈거리며 제 몫을 해내려 애쓰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가 장했다. 한 번도 맞닥뜨린 적 없는 새로운 상황에서 상상해 본 적 없는 방식으로 잘 해내는 나를 만나는 건 참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