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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넨브릴레 Mar 31. 2022

기장과 부기장 Captain, First officer

상·하가 아닌 협력의 관계

기장과 부기장과의 사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게이트를 출발하기 전, 처음 비행기 컴퓨터에 입력했던 이륙 활주로가 바뀌어서 변경하는 작업을 했다. 게이트를 출발해 지상 이동 중에 부기장에게 "Runway change supplementary checklist"라고 주문(Callout)했다. 활주로 변경에 따른 추가 체크리스트 요청이다.

"..."

부기장이 반응하지 않았다. 나는 한 번 더 요구했다.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이미 지상 이동 전에 조종석 활주로 변경 조치를 마쳤는데 뭐하러 재확인하냐는 느낌이었다. 기장이 요구(Order)했는데 부기장이 어물쩡 넘어가려는 형국이었다.



비행에서 체크리스트와 브리핑의 역할

영국의 심리학자 제임스 리즌(James T. Reason)이 정의한 스위스 치즈 모델은 사고 발생 과정을 구멍이 송송 뚫린 에멘탈 치즈의 모양에 빗대어 설명하는 이론이다. 누군가 치즈의 구멍으로 쇠막대기를 통과시키려고 할 때, 치즈가 하나만 있다면 쉽게 관통시킬 수 있지만 여러 조각의 치즈를 세워두었을 경우 한 번에 모두 통과시키기란 쉽지 않다. 각각의 치즈는 숙성과정에서 특수한 박테리아가 배출하는 기포에 의해 구멍이 숭숭 뚫리게 되는데, 여러 치즈를 나란히 세웠을 때 그 위치가 일렬로 배치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형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는 일련의 여러 실수들이 동시에 발생한다. 스위스 치즈 모델은 몇 번의 실수가 있더라도 구멍의 위치가 다른 치즈가 뒤에 있는 것처럼 또 다른 안전장치로 사고를 막는 일이 가능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실수의 구멍 위치가 같은 곳에 생기면 대형사고라는 막대가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출처. 항공정보포탈시스템(https://www.airportal.go.kr)


체크리스트는 잠재적 실수를 사전에 막도록 하는 치즈 중 하나다. 출발 전 이륙 브리핑(Takeoff briefing)을 반드시 하도록 돼 있는데 이 또한 치즈 중 하나다. 

부기장에게 활주로 변경에 따른 추가 체크리스트 요청을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처음에 23R이라는 활주로로 이륙하게 돼 있었으므로 해당 활주로로 가는 이동경로, 이륙 때 적용되는 속도 등을 브리핑에 포함했었다. 게이트에서 출발하려고 하는데 활주로가 05L로 변경됐다. 즉시 엔진 시동을 건 후 지상이동을 해야 하므로 브리핑을 수정할 겨를이 없었다. 지상이동 중에 부기장이 체크리스트를 보면서 활주로 변경에 따른 유의사항을 다시 한번 점검하도록 한 것이다. 


※활주로 명칭인 23R은 무슨 의미일까?

23은 나침반의 숫자를 연상하면 되는데 활주로가 230도 방향으로 돼 있다는 뜻이다. 반대 편으로 가서 이륙하게 되면 05가 되는데 나침반 230도의 180도 방향 즉, 50도로 이륙한다는 뜻이다. R은 Right다. 활주로 두 개가 나란히 있는 경우에 쓰는 표현인데 나란한 방향으로 있으므로 같은 명칭인 23이 된다. 오른편에 있으면 Right를 의미하는 'R'을, 왼 편에 있으면 Left의 'L'을 뒤에 붙여 구분한다.  



권력 간격 지수 PDI(Power Distance Index)

사회학자 홉스테드는 위계질서와 권위를 얼마나 존중하는지 나타내는 ‘권력 간격 지수(PDI)’를 각국의 문화를 구분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으로 제시했다. 이어, 어느 항공사고 전문가가 전 세계 조종사들의 PDI를 조사했는데 PDI가, 


높은 나라는 브라질, 한국, 모로코... 

낮은 나라는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순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한국 조종실에서의 PDI

말콤 글래드웰은 그의 저서 아웃라이어(Outliers, 김영사)에서 1997년 여름, 괌에서 추락한 대한항공 801편을 심도 있게 다룬다. 801편은 괌 공항을 앞에 두고, 

도착 공항의 기상악화, 

계기착륙장치 중 고도(高度, 높낮이) 유도 장치인 글라이드 슬롭(Glide Slope)의 고장, 

보통 활주로 끝에 있는 착륙 지원 장치(VOR)가 3마일(약 4.8km) 정도 떨어져 있어 조종사들이 정확한 공항의 위치를 착각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 

등을 동시에 맞닥뜨렸다. 우연히 여러 개의 치즈 구멍이 일렬로 배치된 상황이었다. 말콤 글래드웰은 여러 상황 중 특히 사고를 방지할 수 있었던 마지막 치즈에 주목한다. 

충돌 7.47초 전에 부기장이 기장에게 "착륙, 포기합시다"라고, 이어 3초 후 기관사가 "올라갑시다"라고 ‘공손하게’ 말했던 사실이다. 그는 ‘공손하게’ 말하는 대신 고함을 질렀으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란 점을 강조한다. 그러고는 문화적 유산이 개인의 태도와 행동을 결정한다고 하는데, 그중의 한 사례가 한국 조종사들 간의 권위주의적 문화라고 지적한다.


말콤 글래드웰이 지적한 한국만의 고유한 문화적 유산은 유교와 군대식 문화가 섞인 데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버릇' 또는 '싸가지 문화'다. 군대에서 요구하는 상명하복(上命下服)이 조종실에서도 요구되는 문화가 있다. 문제는 비행에만 국한되지 않고 조종실 밖에서도 상명하복식 예의를 보여야 한다. 부기장이, 

말 어미에 '다, 나, 까'를 쓰지 않거나 말이 공손하지 않으면

타 지역에 가서 호텔에 머무를 때 먼저 식사하자고 하지 않으면

조종실에 앉았는데 먼저 물 한 잔 따라주지 않으면 

싸가지없다고 여기는 기장이 있다. 기장이 앞장서서 모든 Crew들과 걸어 이동하는 중에 문이 나오면 얼른 부기장이 나서서 먼저 열고 기장이 지나가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기장도 있다. 

이미 MZ세대가 조종실을 물려받고 있지만 그들이 갖는 독특한 문화가 없는 곳이야 말로 비행기 조종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물론, 이는 모든 조종사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중국 조종실에서의 PDI

우선, 내가 보는 중국 기장과 부기장 사이의 PDI는 조금 독특하다. 문화적 차이 때문에 다르게 느껴지는 것인데, 부기장이 기장을 부를 때 대개 이름 뒤에 거(哥, 형)를 붙여서 부른다. 부기장들끼리 서먹한 사이에도 그렇게 부른다. 우리나라로 치면 길동이형(兄)이라고 부르는 셈인데 물론 뉘앙스의 차이가 조금 있는 듯도 하지만 한국의 문화와 다르다. 기장을 대하는 태도가 좀 더 친숙한 느낌이다. 기장에 대한 예우를 해주는데 군기를 바짝 잡는 듯한 한국의 그것과는 다른 편안함이 있다.  

승무원들도 기장을 부를 때 이름 뒤에 거(哥)를 붙여 부르기도 한다. 외국인인 나에게도 그렇게 부르는 승무원이 있다.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 [한국학논집 제78집(2020), 한․ 중 공손표현의 특징 대조 연구(정수봉)]의 내용을 일부 살펴보자. 

힘(상하관계) 요인 중의 하나인 나이는 한 · 중 공손표현의 실현에 미치는 영향의 정도가 상당히 크다. 한국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상대방과의 관계를 정할 때 나이부터 확인한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으면 공손하게 언니(누나), 오빠(형)로 호칭해야 한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대상이라면 반말을 사용하면 안 되고 호칭어 역시 존대를 나타내는 것을 적절하게 골라 사용하여야 한다. 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게 되면 나이 요인의 영향력이 상당히 약화된다. 친해지면 나이 차이가 있더라도 친구처럼 동등하고 편한 관계가 될 수 있다. 존대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이인칭 대명사 ‘您’을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친밀성을 나타내는 호칭을 주로 사용한다. 예를 들면 가족 호칭어 ‘哥, 姐’, 사회 통칭 호칭어 ‘亲爱的’, ‘亲’, 이름 호칭어 등이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면 아무리 친밀하더라도 직접 이름을 부르면 무례한 표현이 된다.


중국은 언어에서 존대 표현이 점점 사라지고 있고, 나이에 따른 상·하가 한국의 문화와 다르다. 상대방이 싸가지없다고 받아들이는 개인감정의 생성이 한국에 비해 덜하다는 것이다.


처음 중국에 왔을 때, 조종실 내 비행에서도 문화의 차이를 느꼈다. 부기장이 비행기 조작 중 무언가를 놓치고 있을 때, 이에 대응하는 기장의 태도였다.

예를 들어, 10,000피트 이하에서는 속도를 250노트(463km/h) 이하로 줄여야 한다. 부기장이 PF(Pilot flying, 비행기 조작 담당)였고 깜빡 잊었다고 해보자. 한국에서는 기장이 말로 알려주는데 "속도를 250으로 줄일까요?"라고 하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중국 기장들은 본인이 속도를 250노트로 줄인다. 그러고는 아무 말하지 않는다.

한국 기장들이 직접 속도를 줄이지 않는 이유는, 부기장이 비행 조작을 하면 기장은 관제사와의 교신과 모니터링을 해야 한다는 업무 구분의 명확성 때문이다. 한국에서의 높은 PDI를 감안했을 때 또한 가지 다소 놀라운 이유는 부기장이 비행 조작 담당인데 내가 조작에 직접 관여하면 기분 나빠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비행 지침서에 '업무를 확실히 구분하는 문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조종사들은 업무 구분의 명확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말로 알려주는 것과 행동으로 관여하는 것 중 어떤 행위가 더 나은 것이라고 정의하기가 쉽지 않은데, PDI 즉, 조종실 간 권력 지수의 기준으로만 봤을 때는 말로 알려줄 때가 상대방의 실수 앞에 권력을 내세우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속도를 250으로 줄여야 하는 거 아냐? 그것도 몰라?"와 같이 실수 하나를 가지고 부기장의 비행 실력 전체를 폄하하는 발언을 하게 되기 쉽다.



외국인이어서 낮은 PDI, 그리고 문제 해결

중국에서, 기장인 나와 부기장이 소통하는 언어는 영어다. 존댓말이 없다. 상대도 나를 "you"로 부르고 나도 상대를 "you"로 부른다. 물론 표현적으로 "Captain" 또는 "Sir"와 같은 존대의 형태를 쓰는 부기장도 있지만 대체로 영어의 사용은 PDI를 낮춘다. 2002 월드컵 때 히딩크 감독이 "후배가 선배에게 형이라 부르고 존댓말을 쓰면서 어떻게 지시를 할 수 있겠느냐"라며 선수들 간 존댓말을 금지시킨 사례와 유사한 효과가 있다.


외국인 신분인 내가 굳이 PDI를 높이려 하지 않는 것도 있는데, 이는 상대의 평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위치의 차이시간의 흐름에 따른 위계 전환 때문이다. 


상대의 평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위치: 기장이 부기장보다 권력 지수가 높은 이유는 당연히 직책 자체에 주어진 권한이 많기 때문인데, 이러한 권한이 확장되어 부기장의 평판을 만들어낼 수 있는 위치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장은 여러 사람들로부터 부기장에 대해 평가하기를 요구받는다. 반면, 부기장이 기장에 대해 평가할 경우, 내용과 상관없이 "부기장이 감히? 싸가지없다"는 식으로 부기장 본인의 평가로 되돌려 받게 되기 쉽다.

(비단 중국에서 뿐만은 아니겠지만) 외국인 신분 입장에서 회사에 부기장에 대한 평가를 전달할 기회는 매우 드물다. 싸가지가 없다고 느꼈더라도 "쟤 싸가지없더라"라고 소문낼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반면, 부기장들은 다른 부기장 또는 중국인 기장에게 외국인 기장에 대한 평가를 전달할 기회가 많다. 그럴 의도가 있다면 어떤 외국인에 대한 선입견을 타인에게 부정적으로 심어줄 수도 있다. 회사 내에서 상대의 평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권력이 외국인 기장에게 보다는 중국인 부기장에게 더 많다. 외국인 기장이 굳이 애매하게 권력을 내세웠다가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얘기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위계 전환: 앞서 오늘 함께 비행하는 중국 기장은 불과 1년 전에 나와 함께 비행했던 부기장이었다고 했다. 설날에 세뱃돈도 줬었다고 했다. 지금은 팀장이 되었고 곧 교관이 되어 비행 중 공식적으로 나를 평가하는 사람이 될 예정이다. 중국에서 외국인 기장과 중국인 부기장 사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위계질서의 교차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관계다.


활주로 변경에 따른 추가 체크리스트 요청에 대해, 부기장의 반응이 없었을 때 내가 어떻게 했을까?

우선, 만약 한국에서 기장인 내가 체크리스트를 요청했는데 부기장이 반응이 없었다면 이를 큰 문제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기장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 절차 위반으로 회사에 보고하면 일이 커지므로 즉석에서 부기장에게 알려주고 따르도록 했을 것 같다. 그러면서 나무라는 듯한 표현을 쓰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쨌거나 그건 뭐, 한국에서나 그렇다는 얘기고...


체크리스트는 기장석과 부기장석 사이 선반 위에 A4 사이즈의 책받침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나는 왼손으로 여전히 지상이동 조작을 하면서 오른손으로 체크리스트를 빼내어 주며 다시 요구했다. 그제야 부기장은 체크리스트를 읽으며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비행에 집중했다. 결국 내가 주문한 것을 하도록 했지만 처음에 부기장이 하지 않으려고 했던 행동이 부각되지도 않았다. 기장의 권위를 낮추지 않으면서 권력으로 강요하지도 않는 나름의 방법이었다.



PDI의 발전

말콤 글래드웰은 '공손하게'가 문제였다며 한국만의 고유한 문화적 유산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실수로부터 배운 점은 언급하지 않았다. 요즘은 "착륙, 포기합시다"라고 하는 대신에 "고어라운드(Go-around, 복행, 재이륙)"라고 얘기하도록 콜아웃이 (오래전에) 바뀌었다. '공손하게'가 아니라 '단호하게' 조언을 하도록 한다. 


한편, 한국과 중국의 비행기 사고 사례 중에는 위의 801편처럼 착륙 과정에서 부기장이 "고어라운드(Go-around)"를 외쳤지만 기장이 무시하고 그대로 착륙을 시도하다가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들이 최근까지도 종종 있다. 반드시 '공손하게'만이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왜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질까? 나는 이것을 '100m 달리기를 하는 사람이 중간에 갑자기 멈추기 어렵다.'는 표현으로 설명하고 싶다. 외부에서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운동하는 물체는 계속 그 상태로 운동하려고 하는 관성의 법칙과 랜딩 직전인 마지막 순간에 갖게 되는 고도의 집중력이 결합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고어라운드를 외쳐야 한다는 것은 여건이 안 좋은 상황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랜딩을 위한 집중력이 최고조에 달한다. 다른 상황을 보지 못할 경우도 생기고, 착륙이라는 목표에 집중하던 일을 갑자기 포기하기도 쉽지 않다. 

중국 항공사의 교범에는 비행기 착륙 중에 One vote veto(하나의 거부권 행사)를 정의한 것이 있다. 조종실 내의 어느 누구라도 "고어라운드"를 외치면 반드시 고어라운드를 해야 한다는 것으로 위와 같은 위험성을 중요하게 고려한다. 



부기장, 조심스러우면서도 정서를 공감하고 싶은 관계

비행 중에 조종석 뒷자리에 앉아 있던 중국인 기장이 화장실을 갔고 나와 부기장 둘이 있었다. 부기장이 갑자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정치 얘기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라고 대답했다. '할많하않'이었다. 중국과 러시아가 친하기 때문에 부기장 개인의 성향이 어떻든 굳이 언급해봐야 좋은 얘기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오늘 시안 공항에 되돌아온 상황을 잠시 살펴보자. 우리는 승객들이 모두 비행기에서 내린 후 하기(下機)한다. 비행기 옆에 미니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를 비행기에서부터 회사까지 바로 데려다준다. 한국에는 없는 시스템으로 중국 비행에서의 편리한 장점 중 한 가지다.

함께 타고 있던 중국 기장은 승객이 모두 내리자마자 비행기에서 내려 버스로 갔다. 나는 비행기 도어 앞에서 부기장이 정리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상대방을 기다려 주는 무언의 정서 나눔 행동이다. 승무원들까지 모두 내려 버스로 갔는데도 부기장이 조종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들어가 보니 휴대폰이 없어져서 찾는 중이란다. 함께 찾아보았다. 조종실 주변을 샅샅이 찾는데도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부기장의 비행 가방도 꼼꼼히 찾아보았으나 없었다. 

부기장이 갑자기 본인이 쓰레기와 함께 버린 것 같다며 갤리(Galley, 비행기 안의 주방)의 쓰레기통을 뒤졌다. 결국, 그가 맞았다. 한 손만 겨우 들어갈 정도의 쓰레기통 입구에 왼 팔을 팔꿈치까지 들어갈 정도로 넣고 한참을 뒤적이더니 기어코 휴대폰을 찾아 꺼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부기장의 작은 실수에 이은 작은 성공의 순간을 함께했다. 곧, 이것이 정서 나눔이 될 것으로 예상했던 것은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비행기로부터 대략 5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미니 버스로 가는 길에 부기장이 빠른 발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의례 같이 찾아줘서 고맙다며 교감의 대화를 하면서 나란한 걸음을 걸을 만도 한데 나를 제치고 가려고 했다. 이에 질세라 나도 걸음을 빠르게 했다. 내가 늦게 도착하면 나 때문에 늦은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었다.

버스에서 기다리고 있던 Crew들은 아무도 "왜 늦었냐?"라고 묻지 않았다. 버스를 올라서는데 모두들 스마트폰을 보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하느라 늦었겠거니 하는 동료로서의 이해가 있었으리라.

나를 뒤따라 부기장이 들어와 자리에 앉으며 중국어로 "휴대폰을 쓰레기통에 버렸어"라는 한 문장을 내뱉었다. 멋쩍은 웃음을 머금은 말이었다. 순간 버스 안에 있던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들더니 "와~ 하하"하고 크게 웃었다.


중국 문화인 듯, 항공인의 문화인 듯한 순간을 추억의 스냅샷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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