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넨브릴레는 11세기 중국 송나라에서 판관이 처음 사용했다는 설이 있다. 죄인 심문 때 본인의 눈을 가려 표정을 숨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연수정 등 광물로 만든 안경에 연기를 그을려 만들었다고 하는데 따라서 도수는 없었다.
권력형 비리에 강하고 공평무사한 판결로 유명한 중국의 판관 '포청천'은 실존했던 인물이다. 근거는 없지만 시대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가 존넨브릴레를 착용했을 것 같은 재밌는 상상이 가능하다.
1430년대 이탈리아 재판관도 비슷한 용도로 색안경을 이용했다고 한다.
불확실성이 지속되는 상황은 '운'이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다음은 최근에 있던 사건을 시간 순서로 나열한 것이다. 굳이 시간을 신경 써가며 이해할 필요는 없다.
4월 말, 중국에 계속 있을지, 한국으로 갈지에 대한 고민을 하던 중 결국 5월 4일 광저우를 통해 한국으로 귀국하려고 계획했다. '한동안 비행 스케줄이 나오지 않는다면...'이라고 가정했는데 실제로 비행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5월 2일이 되자 갑자기 광저우에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했다며 외국인 출국이 제한됐다. 한국으로 떠날 수 없었다.
갑자기 6일에 비행 스케줄이 나왔다. '갑자기'는 예상을 못했다는 뜻이다. 한국에는 못 갔지만 비행이라도 하게 됐다.
그 5월 2일에 회사에 갔다가 팀장으로부터 외국인 급여 인상과 관련된 구체적인 얘기를 듣게 됐다. 한국으로 가려는 계획을 바꿔도 될 만큼 예상을 뛰어넘는 좋은 소식이었다. 동료 기장님들께도 이 좋은 소식을 알렸다.
5월 5일 나의 생일에 동료 기장님들과 축하 파티를 가졌다(파티랄 것도 없지만 그냥 파티라고 하자). 다음 날 예정돼 있는 새벽 비행 스케줄 때문에 나는 저녁에 회사로 가야 했다. 그래서 축하는 점심 식사 때 했고 식당도 회사로 가기 편한 동선에 있는 곳으로 정했다. 나는 다음날 비행 때문에 축하주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오후 12시부터 시작된 파티는 후식까지 먹고 난 4시 40분 즈음에 마무리됐다. 이제 기장님들과 인사하고 회사로 출발하려던 찰나, 내일 스케줄이 취소됐다는 통보를 문자로 받았다. 너무 짜증이 났다.
현재 우리 회사는 나를 포함 총 4명의 외국인 기장이 비행 중이다. 한 분은 시물레이션 훈련을 막 마친 상태였고, 다른 두 분 기장님은 그 주에 3일씩 비행했다. 상대적으로 나는 그나마 하나 나왔던 6일 스케줄이 취소되어 결국 1주일간 전혀 비행을 하지 못했다.
다음 주인 5월 9일이 있던 주에 나는 세 번의 비행을 했고, 두 분은 아예 스케줄이 안 나왔으며 한 분은 스케줄이 3일 나왔는데 그중, 두 번이 취소됐다.
다시 1주일 후, 팀장으로부터 들었던 급여 관련 정보에 더해 나의 인간적인 성급함이 일부 추론의 오류를 이끌어 낸 것을 알았을 때, 기장님들 앞에서 너무 창피했다. 한국으로 복귀할지, 중국에 남아있을지 고민하는 상황이 있지도 않은 긍정을 더욱 배가시킨 것 같아 역시나 한국으로 돌아가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5월 16일이 있던 주에, 다른 세분의 기장님들은 모두 비행 스케줄이 나왔던 반면, 나는 비행 스케줄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한 번의 비행이 나왔지만 전날 취소됐다는 문자를 받아야 했다.
몇 개월째 장기적으로 반복되는 '운'과 '정보 혼란'의 향연이다. 때로는 정말 짜증이 났다. 제삼자 입장에서 "어차피 장기간 반복되는 상황에서 굳이 스케줄이 없거나 취소된다고 신경 쓸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물어볼 수도 있다. 비행을 한 번 다녀오는 급여가 적게는 70만 원에서 많게는 110만 원임을 감안해 보면 어떨까?
캠릿브지 대학의 연결구과
한 단어에서 첫 번째와 마지막 글자가 올바른 위치에 있다면, 중간의 글자가 어떤 순서로 배열되어 있는지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문제없이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의 두뇌는 모든 글자를 하나하나 읽는 것이 아니라 단어 하나를 전체로 인하식기 때문이다.
위의 볼드체 소제목을 읽고 넘어오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듯이 말이다. 다시 찬찬히 보자. 뭔가 이상할 것이다. 이것을 불변표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불변표상(不變表象, Invariant representations)이라는 신경계 표현이자 어려운 한자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 조종사에 관한 개념을 생각해 보자.
매번 같은 인물의 조종사를 보더라도 우리가 보게 되는 각도는 다르다. 모든 조종사는 얼굴 생김새, 키, 몸무게, 성별 등이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한 조종사를 여러 번 본다고 해도 정확히 같은 각도에서 다시 볼 수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조종사에 관한 다양한 경험들은 ‘조종사’라는 마음속 개념으로 구체적 형상화(표상화)되며, 모든 조종사에 관한 모든 경험들에 대해 안정성을 지니게 만든다.
지금 나는 검은색 아디다스 추리닝(운동복) 바지와 목이 약간 늘어나 집에서만 입을 수 있는 하늘색 자라(ZARA) 반팔 티셔츠를 입고 컴퓨터 앞에 앉아 타이핑하고 있다.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커피 한잔 마시고 글쓰기에 집중하느라 머리카락은 여전히 산발하고 있다. "저는 조종사예요."라고 한다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조종사'라는 불변표상과 분명 불일치를 일으킬 게 뻔하다.
책 '생각하는 뇌, 생각하는 기계(제프 호킨스 외, 멘토르)'에서는 뇌 피질 기억의 세 가지 특성인 순서 저장, 자동 연상 회상, 불변 표상은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미래를 예측할 때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이라고 한다.
만약 우리가 단어의 글자 하나하나를 보면서 글을 읽는다면 시간이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의미의 흐름을 제대로 잡아가면서 파악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불변표상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이유다.
팀장은 ①25시간을 비행한 것으로 보장하여, ②매달 최고 8,550달러를 주는 것으로 진행 중이라고 했다. 이 두 가지는 정말 큰 의미다.
25시간 비행 보장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급여제도가 진행되어야 비로소 스케줄과 관련한 '운의 향연'이 감정을 괴롭히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정말 8,550달러를 준다면, 중국에서의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난 아무리 '연. 결. 구. 과'라고 쓰여 있다고 해도 '연. 구. 결. 과'라고 읽을 수밖에 없었다. 급여 인상 계획이 실제로 적용되기 전까지는 또 어떻게 달라질지 모를 일이었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못 견디겠으니까...
운과 품위
운(運)
나는 사람에 대해 혈액형(요즘엔 MBTI가 대세지만 문맥 상 혈액형으로 언급한다), 별자리 등으로 정형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믿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정형화하는 방법은 빠르게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장점이 있다.
사실 어떤 사람의 행동은 그때의 상황에 따라 영향을 받는 경우가 훨씬 많다. 타고난 본성이 있다고 해도 사회생활이나 교육 등을 통해 학습되어 바뀌기도 한다. "아~ 저 사람은 A형이라서 저런 행동을 했구나!"라며 자세한 정황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정형화된 특징으로 이해한다고 가정해보자. 그 사람은 분명 어떤 때는 B형이나 O형으로 대표되는 행동도 할 것이다. 그런 모습은 간과하고 A형의 특징에만 집중해서 이해하도록 만들기 쉽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운세나 신점 등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늘의 운세가 '운이 나쁘다'라고 했다고 '나는 오늘 운이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 짓고 싶지 않다. 운이 안 좋은 때에 생겼을 나의 마음이 '운이 안 좋다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그저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그렇게 흘려보내고 싶기 때문이다.
운세 또한 전혀 믿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닌데, 나도 "저 사람은 A형이다"라고 하면 A형의 특징으로 보게 되고, '오늘의 운세가 운이 나쁘다'라고 하면 '나는 오늘 운이 나쁜 사람이 될 것 같다'라고 믿게 되는 심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후의 상황은 확실히 항공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안 좋은 일이다. 이제 나는 인정을 해야 할 것 같다. 직업 안정성의 면에서 나는 운에 영향을 받고 있는 중이다.
품위(品位)
중국 항공사에 계속 남아 있어야 할지 한국 항공사로 돌아가야 할지 선택하는 고민은 여전히 유효하다.
어느 쪽이든 지금 선택의 결과가 나중에 "그럴 줄 알았다."라는 의미 없는 후견지명*으로 후회를 남기게 될 것 같은 불안감이 있다.
짜증 나는 불확실성이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므로 생각이 계속 바뀐다. 한 번 의사결정을 하면 그것을 다시 바꾸기가 얼마나 어렵던가! 정말 신이 있다면 이 상황에 대해 따지고 싶다.
정말 신에게 따질 수 있는가? 결론은, 내 안에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정교하게 선택하고, 운을 잘 지배한다고 해도 결국 최후는 운이 결정할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해결책은 품위뿐이다. 품위란 환경에 직접적으로 얽매이지 않고 계획된 행동을 실행한다는 뜻이다. 그 행동은 최선이 아닐 수도 있지만, 분명히 최상의 기분을 느낄 수 있는 행동이다.
...중략...
행운의 여신도 어쩌지 못하는 유일한 대상이 바로 당신의 행동이다.
책 '행운에 속지 마라(나심 니콜라스 탈렙, 중앙books)' 중 결론부에 있는 내용이다.
여기까지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불완전한 존재이며 직업 안정성에서 운이 없는 중이므로 불안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더 이상 어떤 상황에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초연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현재의 상황을 정교하게 분석하고 선택을 한다 해도, 결국 운이 어느 정도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기로 한다. 고대 그리스의 우연과 행운의 신 '포튜나(Fortuna)'도 유일하게 어쩌지 못하는 것은 내면의 존넨브릴레를 쓰고 품위를 지키는 나의 행동일 테니 말이다.
*선견지명(先見之明)의 반대말인 후견지명(사후 확신 편향)에 강한 사람이 주변에 있다. 내가 산 주식이 떨어지면, "내가 그럴 줄 알았다."라고 얘기해 준다. 팔고 나서 얼마 후 다시 오르면 "거봐~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라고 얘기한다. 사실, 결과를 알고 나서 하는 얘기는 얼마나 쉬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