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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넨브릴레 May 22. 2022

편광렌즈, 색안경

존넨브릴레는 선글라스라는 뜻의 독일어 3/4

최근 나는 어떤 정보를 접하며 편광렌즈를 끼고 조종실의 계기판을 보듯 불완전하게 받아들였다. 전자 불빛으로 보여주는 비행계기들은 편광을 거치면 잘 읽히지 않아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존넨브릴레의 색은 다양하다. 색안경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상황이나 인물을 바라볼 때 좋지 않은 감정이나 주관적인 선입견을 갖는 것을 '색안경을 쓰다'라고 표현한다. 정보의 일부는 사실과 다르게 이해했고, 내가 이해한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했다. 결과적으로 내가 색안경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매우 창피함을 느꼈다.


창피함을 느꼈다는 것은 그만큼 사실과 다르게 이해한 믿음의 강도가 컸다는 뜻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에 정확한 판단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다른 계열사의 기장님으로부터 정보를 얻어야 했을까?

각 회사 담당자의 성향 탓으로도 생각할 만 한데, 일의 진행 과정을 계속 공유하는 담당자가 있는 반면 우리 회사처럼 결국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굳이 먼저 공유하지 않는 담당자가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책 '마음을 읽는다는 착각(니컬러스 에플리, 을유문화사)'은 타인의 마음을 읽는 세 가지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타인의 관점을 수용하여 그 입장을 상상해보는 방법,

지각 능력을 키워 상대의 표정이나 행동을 읽어내는 방법,

타인의 관점을 직접 물어보는 방법이다.


팀장으로부터 외국인 기장 급여 인상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 내가 했던 첫마디는 "중국인 기장들의 급여도 함께 인상되었으면 좋겠다."였다. 팀장은 중국인 기장이기도 하다. 그들의 기본급은 1,900달러 정도로 현재의 외국인 기장보다 낮다. 이런 사정에 더하여 외국인 기장의 급여를 더 올린다고 하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중국인 기장들의 입장이 먼저 고려되었다.

이는 팀장과 대화하는 당시에 떠오른 생각이 아니다. 내가 시뮬레이터 훈련 중에 교관과 대화할 때도 그랬다. 그는 중국인 조종사 팀장이기도 하다. 내가 "얼마나 올려주는지 알아?"라고 물었을 때, "나도 몰라. 그래도 우리보다는 높게 올려준데."라고 했다. 우리보다 더 높게 올려준다는 표현이 무얼 의미하겠는가?

중국 기장들의 기본급이 1,900달러인 것을 아는 이유는 어느 중국인 기장이 "너희 급여 오른다며? 지금 기본급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13,000위안(1,900달러 상당)을 받아. 비행도 한 달에 10시간 정도밖에 못하고 있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나의 MBTI는 인구의 2% 정도밖에 없다는 ENFJ-A인데 특히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고 한다.

진정으로 타인을 생각하고 염려하며, 그들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발 벗고 나선다.

별 어려움 없이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며, 사람들과 직접 얼굴을 보고 의사소통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를 설명하는 데 MBTI 결과가 정확히 맞든 그렇지 않든, 나는 타인과의 정서 교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외국인 조종사의 급여가 더 높은 것은 시장 논리 상 당연하다. 이 점을 중국 조종사들도 수긍하고 있겠지만, 아쉽다는 개인적인 감정이 생기는 것도 타당할 것이라고 그들의 입장을 짐작했다. 팀장과 대화할 때, 좋아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기보다 "너희는 왜 안 올라? 같이 올랐으면 좋겠다."라는 감정을 전달하고 싶었다(직접적으로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그는 대화 중에 "우리도 올랐으면 좋겠다"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때 나는 그가 살짝 아쉬워하는 듯한 표정에 주목했다. 상대의 표정을 읽은 것이다. 심지어 팀장과의 대화 중에 옆 사람들의 표정도 둘러보았다. 팀장과 나의 주변에 중국인 기장과 부기장이 여럿 있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일을 하다가도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급여 상승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꼼꼼히 물어보는 것은 상대방에게 우리 급여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느낌을 줄 것 같았다. 직장 생활 아니겠는가!

'얼마나 올릴 예정인가?'라는 핵심 정보를 이미 들었기 때문에 추가 질문의 필요성에 신경 쓰지 못했다. 대신 '팀장이 나에게 말할 때 보여준 행동'으로 정보를 함께 읽으려고 했다.   

소와 다른 행동은 쉽게 인지된다.

지금까지 구체적인 정보는 말해주지 않으려고 했던 태도와 달리 설명하는 내용이 꽤나 구체적이다.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말한다.

말하는 본인도 다소 신이 나 있는 것 같다.

아직은 비밀이라고 한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하여 동료 기장님들께 급여와 관련된 새로운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팀장은 리더의 결제만 남았다고 했는데요, 여기서부터는 제 뇌피셜이에요(사실이 아닐 수도 있음을 강조하긴 했다). 내용이 구체적이었고, 저를 보자마자 묻지도 않았는데 이야기해준 것으로 봐서 아마도 새로운 급여 계약서를 지금 막 본 것 같은 느낌이더라고요(정보가 최신일 것이라는 유추). 아무튼 누군가에게 전달해야만 할 것 같은 충동을 느낄 정도로 본인도 파격적이고 좋은 소식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담당자는 이미 계약서를 작성했고, 회사의 리더만 사인하면 되는 일 같아요(일이 꽤 진행되어 실현 가능성이 높음)."


이는 팀장과 내가 대화한 날의 분위기를 포함하여 한 말인데, 팀장이 줬던 정보가 최신의 것이고 가능성이 높다는 느낌을 주도록 만들고 있다.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여전히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나'는 '인간'

누군가 실수했을 때, "인간적이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올라가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를 돌아보면, 나의 감정 상태도 한몫을 했다.


한국에서 경력 기장을 뽑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그 항공사에 지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되었다. 한 번에 20명을 뽑는다고 하니 이 기회가 지나고 나면 한동안은 다시 기회가 없을 것으로 예상됐다.

한국으로 복귀할 기회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감이 상승했다. 지금 중국에 있는 것이 힘들다는 의미인데, 당장의 행복감만으로 지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서류를 낸다고 반드시 합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의사결정의 순서로 보았을 때 '지원'이라는 행위 전에 '한국으로 복귀할지 여부'를 명확히 해야 한다. 합격하고도 입사하지 않으면 그 회사로부터 신뢰를 잃는다. 항공사의 수는 한정돼 있으므로 몇 안 되는 한국 복귀 옵션 중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다.

팀장으로부터 급여 인상의 구체적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현재 중국에서의 상황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있던 터였다. 5월 중순에 있을 것이라는 모집 공고가 마감시한이라도 된 듯, 중국 생활에 굉장한 긍정의 요소가 될 새로운 급여 인상 소식을 빨리 정리하고 싶었다.


높은 숫자를 접한 감정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로 2년이 넘는 동안 기본급이 2,200달러에 머물고 있다. 변경될 급여는 최고 8,550달러라고 한다. 팀장도 제법 신이 난 상태로 말하도록 만들었겠지만(추론) 듣는 나에게 조차 기대했던 것보다 높은 인상 금액이었다.


한국 항공사 지원이라는 고민에 대한 피로와 새로운 급여 정보가 사실이었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이 좀 더 '완성형의 급여 인상 계획'을 얻고 싶게 만들었던 것 같다.


나는 편광렌즈를 낀 것 마냥 일부의 정보만 받아들이고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몇 가지는 색안경이 되어 팀장이 주지도 않은 정보를 추가로 만들어 냈.


그렇게 정보의 최신성과 가능성을 높게 만들어 받아들인 후 다른 사람에게 옮기고야 말았다.  



질문을 했어야 한다

다시 책 '마음을 읽는다는 착각'을 살펴보자. 상대의 표정이나 행동을 읽어내는 방법 타인의 관점을 수용하여 그 입장을 상상해보는 방법에 대해 뒷받침할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보디랭귀지나 얼굴 표정을 비롯한 표지를 읽는 방법, 즉 신체에 드러난 마음을 읽는 방법은 과학적으로 신빙성이 없다. 특히 미세 표정에 대한 관심은 크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거짓말에 능숙하며, 반대로 속임수를 암시한다는 표정은 진실을 말할 때도 똑같이 드러난다.

타인의 입장이 되어 보는 방법의 성패는 타인의 관점을 정확하게 상상하거나 받아들이는 능력에 달려있다. 그러나 이 방법 역시 효과가 없다. 타인의 생각을 정확히 알기 힘들기 때문이다.


책은 직접 물어보는 방법을 포함하여 세 가지 방법을 가지고 진행했던 '연인의 입장을 예측해보는 실험'을 소개하기도 한다.

사전 질문에서 사람들은 세 방법 모두의 정확도가 높을 것으로 예상했다.

실험 결과 실제로는 '타인의 관점을 직접 물어보는 방법' 만이 정확도가 높았다. 모르면 물어보고 그를 통해 알고 이해한다는 발상은 지극히 평범한데도 우리는 육감을 과신하여 물어보지 않는 점을 꼬집는다.


내가 자연스럽게 했던 타인의 입장을 상상하고, 타인의 표정을 읽는 행동은 그 능력에 기대어 추론을 보태도록 만들었고, 구체적으로 물어보며 사실 확인했어야 할 행동을 스스로 제약하도록 했다.

 

사실 팀장의 행동을 읽고 그가 준 정보가 최신의 것이라고 유추한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만큼은 최신이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도 모른 채 외국인 조종사 급여 변동 정보 습득에 뒤쳐서 있었다면 말이다.


"정보의 출처가 어디야?"

"최종 의사결정의 리더가 누구야? 우리 회사 리더야 아니면 팡다그룹의 리더야? 팡다그룹의 결정을 먼저 받은 게 맞아?"


라는 질문을 처음 대화 때 했더라면, 팀장이 나에게 한 말이 가능성이 높은 정보라는 착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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