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오래 버티기 VS 한국에서 가족과 지내기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맞닥뜨렸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과정에 대한 글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분석에서,
우리는 보통 하루에 150가지 선택을 내린다고 한다
나는 중요한 선택의 고민이 있을 때, 체계적인 방식을 선호한다. AHP(Analytic Hierarchy Process, 분석적 계층화 과정) 기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어떤 자동차를 구입하는 것이 나에게 합리적인가?'라고 고민하는 예로 간단히 아래 그림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들을 정하고, 자동차별로 점수를 준 후 합계를 내면 선택하기 쉽다. 이 방법은 Hierarchy 즉, 계층으로 순위를 정해 준다. 캐스퍼를 선택했는데 출고가 너무 오래 걸린다면 그다음의 ES300h를 선택할 수 있다.
'체계적이다'라는 것이 항상 맞지 않을 수 있다. 과거 나는 출퇴근용 세컨드 자동차를 구입하는데 이 방법을 썼다. 용도에 맞게 기준을 정하고 그렇게 마티즈를 중고로 구입했다.
어느 날 비행을 마치고 회사 주차장에서 차를 탈 때였다. 주차장으로 가는 동안 우연히 그날 함께 비행했던 승무원 중 한 명과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내가 10년도 더 된 마티즈의 문을 여는 동안, 그녀는 내 차와 멀지 않은 곳에서 아우디 A6를 타고 있었다. 얼마 후, 아는 사람에게 내가 산 중고 가격보다 더 낮은 돈을 받고 마티즈를 넘겼다. 대신 520d를 샀다. '가격=품위'로 재정의 해주고 기준을 조정한 것이다. 마티즈 외에 원래 갖고 있는 차는 K7이었다.
AHP의 장점이 '체계적인 의사결정 과정'이라는 것인 반면, 단점은 '내가 아는 만큼만 체계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방법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어떤 결정을 할 때 '혹시나 내가 모를 무언가'를 놓치지 않기 위해 주변에 질문을 많이 하는 사람이 됐다.
어느 해 2월, 서초동 남부터미널 사거리에 있던 카페베네에 여자 친구와 마주 앉아 있었다. 신용카드회사에 다니다가 항공사의 부기장으로 이직하는 일로 함께 고민 중이었다. 여자 친구와는 그 해 10월에 결혼했으니 나의 이직 문제는 말 그대로 그녀에게 '남의 일'이 아니었다.
여자 친구는 상대적으로 높은 연봉, 지난 10년간의 경력 등을 이유로 항공사로의 이직보다는 현재 직장에 계속 다니는 것이 어떻냐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었다. 신용카드사는 이직할 항공사의 부기장 보다 급여가 훨씬 높았다.
우리는 카페베네의 빙수를 특히 좋아했는데 겨울 끝무렵에도 먹는 즐거움은 여전했다. 나는 빙수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하나씩 주문한 영수증을 집어 뒤집어 놓았다. 그 위에 위의 예시처럼 AHP 표를 그리기 시작했다. 여자 친구와 함께 상의하며 급여, 성장 가능성, 사회적 이미지, 정년 등을 항목으로 정했다. 각각의 점수도 함께 내보고는 합계를 구했다. 항공사 이직이 96점, 신용카드사 유지가 95점이었다. 근소한 차이로 이직을 함께 결정했다. 주문한 빙수와 커피가 나오기 전에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조종사 되기'라는 목표를 저 멀리 두고 몇 년을 노력해왔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나는 항공사로의 이직에 조금이라도 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결정이 쉬웠을 것이다.
이제, 인생에 몇 번 없을 정말 중요한 결정을 앞두게 되고 보니, 선택의 중요도가 상승할수록 선택을 위한 방법에 복잡성이 더해지는 것을 깨닫게 된다. 코로나로 변화된 환경이 만든 고민인데,
중국 항공사에 계속 남아 있을 것인가!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가!
의 갈등을 하게 되기 시작했다. 이 결정은 AHP를 그려 보아도 결론 내기가 쉽지 않다. 코로나의 '미래를 예측 불가능하게 만드는 특수성' 때문에 마치 도박을 하듯 홀수와 짝수 중에 선택하는 것과 같은 감정에까지 이르게 한다.
중국에 오기 전부터, 나의 목표는 '가능하면 중국에서 오래 버티기'였다. 이미 중국에 진출했던 많은 선배 조종사들이 한국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봐왔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많은 분들이 중국 항공사에 진출하던 때, 몇 분은 부기장으로 강등되는 일이 발생했다. 강등의 사유가 납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수모로 받아들였다. 그 소식을 듣는 나 조차도 당황스러웠으니 본인들은 더 그러하셨으리라. 결국, 어렵게 중국 항공사에 진출하셨지만 한국으로 복귀하셨던 기장님들이 계셨다.
수모라고 받아들인 감정은 같았겠지만, 몇몇 분들은 부기장으로 남는 선택을 하셨다. 시간이 지나 정식 기장으로 임명되었고 원하던 높은 급여를 받고 일하실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중국 항공사로 이직하면서, 동료 기장님들과 "부기장으로 강등이 되더라도 우리는 끝까지 버티자"라고 결의를 다짐했다.
이전에 중국에 진출한 기장님들의 사례들은 내가 중국에서 조종사로 사는 어려움에 대해 극복하려는 태도를 갖도록 시스템화해주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회피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거나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회피 과제: 시물레이션 훈련, 비행 훈련, 신체검사 등에서의 불합격
회피 노력: 시물레이션 공부는 1주일 전부터 시작한다. 한 번 실수한 것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정리한다. 교관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데 대개는 자세를 낮춘다. 신체검사 2, 3주 전부터 식사량을 20% 정도 줄이고 체중을 감소시키며, 음주 및 육류를 삼간다.
극복 과제: 대부분이 감정과 연계되어 있다. 중국 생활에서 느끼는 외로움이 가장 크다. 교관과 훈련을 하러 갔는데 나를 뒤에 앉히고 부기장을 비행시키는 등 회사나 교관의 부당한 처우 등도 있다. 참고로 우리 회사는 외국인이 하는 거의 모든 비행을 3인 1조(기장 1명, 부기장 2명)로 편성한다.
극복 노력: 지속적으로 나의 감정에 대해 자각하려고 노력한다(메타인지, metacognition). 우울감으로 편향되지 않도록 한다. 중국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공부한다. 한편,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찾는다. 정신적 피로를 가중할 수 있는 육체의 피로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종합적으로, 내가 받는 높은 급여에 외로움이나 회사의 불합리함 등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포함돼 있다고 생각하고 버텼다.
중국에서 생활하면서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외로움, 부당한 일이 생겼을 때 언어와 문화의 장벽 때문에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이 있다. 이것은 큰 스트레스다.
코로나 이후로 한 달 또는 길면 석 달 만에 비행하기도 한다. 공백기간이 길면, 더 긴장되고 작은 실수라도 나오기 쉬워진다. 비행 중 실수를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회사는 외국인 기장 평가 기준을 더 강화하는 한편 교관들은 나의 비행에 대해 요목조목 따지기 시작했다. 기성 기장에게 비행과 관련해 이견을 달지 않았던 예전과 다른 양상이다.
사람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있다. 교관과 훈련을 할 때마다 평가지를 작성하는데 외국인 담당 여직원이 취합한다. 그녀에게는 개인정보 보호라는 것이 없다. 교관이 적은 내용들에 대해 사무실에서 공개적으로 '떠벌 떠벌'한다. 비행을 모르는 직원이 외국인 기장 개개인을 평가하는 발언을 들을 때면 가끔 화가 나기도 한다. 그녀는 본인이 좋아하는 특정 외국인 기장의 훈련 스케줄을 가장 빠르게 처리했다. 나이가 가장 어린 러시아인이다. 보통은 입사 순으로 진행되는데 그것을 역전시켰다. 그 기장의 비행시간이 월등히 많이 나오도록 뒤에서 종용했다. 많은 비행으로 급여를 더 받는 혜택을 준 것이다.
오래전 회식 자리에서 그녀는 술에 취해 있었다. "그 기장을 처음 봤을 때 오줌을 지릴 뻔했다."라는 말까지 하는 것을 보고 취했다는 걸 알았다. 유부남인 그를 좋아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는 어쩔 수 없이 좋아하게 됐다고 했다. 부모님도 그 사실을 알고 본인을 말렸는데, 스스로 통제가 안된다고도 했다.
그녀는 스케줄을 짜는 여직원과 친하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한다. 외국인 기장들이 은근 자신에게 잘 보이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같다. "그럼 그 여직원에게 잘 보이면 되는 것 아니에요?"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녀는 그것을 이용만 할 뿐 본인이 할 수 있는 노력은 한 명에게만 쏟는다.
여직원 이야기가 길어진 이유는 그만큼 회사로부터 받는 스트레스의 많은 부분이 이 여직원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병원에 신체검사하러 가는 날, 여직원과 함께 병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병원 의사들은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하다. 여직원은 연락도 없이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고 병원 의사들은 대화가 안 된다고 짜증을 냈다. 그날은 그녀가 좋아하는 기장이 이사하는 날이었다.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회사에는 외국인 기장을 위해 병원에 간다고 하고 본인이 좋아하는 기장을 보러 간 것이다. 이런 일이 많았다.
그녀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아무 상관없다. 본인의 감정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피해를 주는 것이 문제다.
코로나 이후로 기본급이 2,200불(미화)로 줄었다. 비행을 전혀 하지 못해 기본급만 받는 달이 많았다.
급여의 삭감은 중국에서의 생활을 제한시켰다. 회사 출퇴근을 버스와 지하철로 하게 만들었다. 택시로 20분이던 시간이 1시간 10분으로 늘었다.
외식하는 돈이 아까워졌다. 횟수가 현저히 줄었다. 매 끼니를 무얼 해 먹을까 하는 고민이 스트레스다. 내가 만드는 식단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최근 피검사에서 콜레스테롤 수치가 급격히 올라갔다. 매일 근력 운동과 유산소 운동을 했고, 체중을 줄였는데도 말이다.
비행 스케줄이 나오지 않는 날이 많아지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 왔건만 비행이 없으니 돈을 벌지 못한다. 중국에 있어야 할 의미가 퇴색되는 가장 큰 이유다. 비행이 나왔는데 하루나 이틀 전 취소가 되는 것을 겪을 때에도 받는 스트레스가 크다.
지금까지 잘 견뎌왔다고 생각했던 던 내가 흔들린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금의 나에게 선물하는 일인 것 같아요.
최근 동료 기장님들과 식사하면서 내가 했던 말이다. 이제는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이 인생의 선물로 여겨진다.
동료 기장님들과 고기 뷔페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할 때였다. 어떤 기장님이 한국의 모 항공사에서 경력 기장을 모집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는 보따리를 내놓았다. 2년 반만의 한국에서의 채용 소식이다.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선발될 인원들이 내정돼 있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아쉬웠다.
2주일 후, 같은 분들과 같은 식당에서 다시 모였다. 어느 때인가부터 우리는 아무리 먹어도 정해진 금액만 내면 되는 고기뷔페집을 자주 가게 됐다. 한번 가면 고기도 많이 먹는다.
이번엔 채용을 예정하고 있는 한국의 항공사가 내정이 아닌 공채로 선발할 것 같다고 정보가 업데이트됐다. 5월 중순 즈음에 공지가 날 것이며, 면접과 시물레이션 체크도 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말까지 덧붙여진 정보였다.
"우리처럼 최근까지 비행하신 분들이 많지 않을 것 같아요. 더군다나 시물레이션 체크는 여기에 비하면 한국은 껌이죠."
정보를 주신 기장님은 이미 많은 것을 고려하셨다는 듯 본인의 생각도 주저 없이 내놓으셨다. 듣고 있던 우리는 "진짜 한국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기는 거예요?"라며 아직 현실화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이때부터 나는 과연 한국의 항공사로 복귀해야 하는 게 맞는 것인지 고민하게 됐다. 고민하면 할수록 점점 어려운 선택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