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룬다고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편의 사망신고를 미루고 있었다. 재판이 아니었다면 더 미루고 있었을 것이다. 소송승계 때문에 정리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도 머뭇거리다가 변론 날짜에 맞춰서 서둘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면사무소에 앉아서 신고서를 작성하기 싫었다. 그래서 신고 서류를 집에 가져와서 빈칸을 채웠다. 그리고 딸이 현장체험을 가서 집에 없을 때 사망신고를 하기로 결정했다. 하루쯤은 혼자서 맘껏 울고 싶었기 때문이다.
잉꼬부부도 아니었고 달달한 부부도 아니었다. 지극히 평범한 25년 차 부부였다. 한참 연애 중인 둘째 아들이 밤새도록 전화기를 붙잡고 쓰잘 데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면서 우리 부부도 그럴 때가 있었다는 것을 겨우 기억해 내고 그 기억을 바닥에 깔고 살아온 연인은 이제 엄마 같은 마누라요. 어떤 날은 편한 친구였다가 전우가 되는 날도 있었다. 기분 나쁜 날에는 원수가 되기도 했지만
"밥 먹어."
"오늘 순두부찌개 먹고 싶었는데. 맛있네."
이렇게 밥을 먹고 나면 다 풀려서 맥주 한 잔까지 하는 그런 별거 없는 부부였다. 가끔씩 사소한 감정에 꽂혀서 화를 주고받기도 하고 위로와 격려로 덮어씌우기도 하면서 덤덤하게 살아가는 중이었다. 그래서 남편과의 이별도 우리의 삶처럼 무던하게 잘 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뭐가 그리 안타까운지 내 맘을 나도 알아채기가 힘이 들었다. 남편이 잘해줬던 모습만 생각나고 내가 못해줬던 일만 생각나는 참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똑똑한 뇌가 나를 살리려고 원망과 미운 기억은 삭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분명 남편은 사소한 일부터 큰 일까지 화나게 또는 분노하게 하는 일이 많았다는 증거 자료는 차고도 넘친다. 그런데 나는 일방적으로 나만 미안한 것 같은 반성의 시간을 보내면서 꿈속에도 찾아오지 않는 남편을 원망하기도 했다. '남편보다 내가 더 사랑했나?' 싶은 억울한 마음을 가득 담고 사망신고를 하기로 했다.
'꿈에서도 한 번 찾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정말 좋은가 보네. 그래, 보내주자.' 나는 면사무소로 향했다.
면사무소를 가는 사거리는 읍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꼭 지나가야 하는 길이다. 좌회전 신호를 받기 위해서 기다려야 한다.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는데 남편이 하던 말이 기억났다.
"차도 없는데 그냥 지나가."
"왜, 불법을 저지르라고 시켜."
"불법 저질러도 잘만 살더라."
"됐으니까 자기나 그렇게 살아. 난 살던 대로 살 거야."
언제부터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남편은 약속을 지키고 규칙을 지키는 나를 고지식하다고 말하는 일이 많아졌다. 남편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에 화가 나서 대놓고 욕은 못하고 브런치 서랍에 남편의 행동에 대한 내 불편함을 글로 채워 놓기도 했다.
내가 알았던 남편은 긍정적이고 순수한 사람이었다. 20대 초에 학교에서 만났을 때는 물론이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전부터 화내는 일이 많아졌고 불법이 합법인 세상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처분을 바라며 기다려야 하는 재판이라는 제도 앞에서 자신이 무력함을 인정하는 시간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짧은 좌회전 시간조차 기다리는 것을 참지 못하고 나의 합법적인 기다림을 융통성 없이 시간만 낭비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남편이 점점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사람의 근본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런데 남편의 변화를 보면서 삶의 어떤 포인트가 남편을 변하게 만들었는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변한 것이 아니라 본래 공존했던 여러 모습 중에서 생존을 위한 모습으로 바꾼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오늘 나는 좌회전 신호 앞에서 잠깐 기다리면서 고민을 했다. 남편의 말대로 좌회전 신호가 떨어지기 전에 좌회전을 했다. 아무 일 없이 그곳을 통과했다. 남편이 어딘가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면 웃으면서 말했을 것이다.
"이제는 자기 하던 대로 하면서 살아. 그게 맞아."
내가 이렇게 믿고 싶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처럼 신호를 지키면서 살아갈 계획이다.
불법 좌회전으로 차를 돌려서 산과 산 사이, 나무와 나무 사이로 펼쳐진 언덕길을 달렸다. 마치 터널을 통과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리막 길에 보이는 파란 하늘에 흰구름이 가을 하늘 같았다.
"참 더럽게 좋은 날씨네."
혼자서 중얼거렸다. 신기하게도 오늘의 내 마음을 말해주듯이 어떤 청취자의 신청곡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그중에 그대를 만나'
대단한 인연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떠나고 나니 만남도 헤어짐도 운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키지 못한 죄책감과 버리고 갔다는 원망이 뒤엉켜서 하루에도 몇 번씩 용을 쓰고 있지만 나는 오늘 정확하게 사망을 인정하러 가고 있다.
햇살이 눈부신 어느 봄날에 별처럼 수많은 사람 중에 이우영을 만나서 사랑을 하고 인연을 맺고 이별을 하게 된 남편의 사망 신고를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