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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앞니맘 May 01. 2023

인연이라고 하죠.


경찰의 조사를 마지막으로 남편의 핸드폰은 잠겨진 상태 그대로였다. 내가 모르는 남편의 지인들에게  부고 문자를 보내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우연이라도 알게 되면 찾아와서 인사할 수 있는 인연만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나를 만나러 온 사람들을 우선 맞이했다. 태어난 고향은 아니지만 30년 넘게 같은 곳에서 직장생활을 했고 프리랜서인 남편도 여기서 20년 넘게  살았다. 하지만 그 인연이라는 것이 직장을 통해서 만난 교사 또는 원장과 학부모사이라는 점에서 친밀감은 얇다고 느꼈다. 물론 졸업을 하고도 가족이나 친구처럼 지내는 분들도 있었지만 그 숫자는 매우 적었다. 특히 유치원교사는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가 성립하기 어렵고 학부모들과의 친분이 졸업을 하고 아이가 이어준 관계가 끝나면 대부분 시절인연으로 잊히는 게 대부분이다. 나 때문에 살게 된 이곳에서  쓸쓸 장례를 치르게  될까 봐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생각은 나뿐만이 아니라 직장 동료들부터 지인들하셨는지 첫날부터 오셔서 우리와 함께 자리를 지켜주셨다. 나만에 슬픔에 빠져서 주변을 돌아볼 수 없이 지내다가 말없이 일을 도와주고  남편의 사진과 나와 아이들을 번갈아 보면서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후  보고 싶었지만 미루고 미루면서 만나지 못한 지인들이 하 둘 남편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하기 위해서 찾아왔다. 멀리 지방에서부터 바로 옆집 사람들까지 한 걸음에 달려와서 내 손을 잡아 주었다.


 나 때문에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된 30년 지기 친구 선희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달려와서 별말 없이 내 곁을 지켜주었다. 가난했던 시절 비가 오면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은 받아주고 부엌에서 솟아나는 물을 퍼내면서 함께 자취를 했던 친구도 먼 길을 매일 찾아와서 나와 막내딸을 챙겼다. 내 삶의 아픔과 기쁨의 전부를 알고 있는 진영이는 말없이 나를 토닥여 주었다. 이렇게 하던 일을 미루고 달려와 준 사람들로 장례식장은 쓸쓸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장례식장은 나와 인연을 시작으로 남편과의 추억을 함께 간직한 제자들이 함께하는 유치원 동창회 자리가 되어갔다. 부모님께 소식만 전해 들으면서 길게는 몇십 년 짧게는 몇 년 만에 한 가정의 가장이 되기도 하고 아빠와 엄마로 성장한 제자들의 등장에 나는 잠깐 반가운 미소를 보이기도 했다. 울다가 웃는 모습은 감정분화가 덜 된 아이들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른들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생님~"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를 덥석 안고 우는 두 제자를 보면서 우리 부부의 처음과 끝을 함께하는 운명에 내 마음은 더 아파왔다. 우리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연주해 주었던 나의 첫 번째 제자들이다. 둘 다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도 멋진 여성으로 성장했고 이제는 내가 부러워하는 대상들이 되었다. 지인이는 결혼을 하고 아이 엄마가 되었고 내가 늦둥이 딸을 출산하면서  나와 육아 동기 이면서 워킹맘인 것도 닮았다고 친정에 오면 가끔 집에 오기도 하고 딸의 옷도 물려받아 입기도 하면서 오랜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민정이는 결혼을 한다고 비남편과 인삼주 한 병을 들고 와서 밤새 술을 마시면서 앞으로의 결혼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 인삼주가 맛이 들 때쯤 다시 와서 마시겠다고 남편과 약속했는데 남편이 그 약속을 깨고 떠났다.

신혼 때 우리 집에 을 때 내가 만들어 준 치킨이 정말 맛있었다는 얘기를 무한 반복하던 꼬꼬마 아이들이 나를 위로해 주기 위해서 몇 시간을 왔다.


"사부님은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예요. 힘내세요."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답게 나를 위로해 주는 오빠.

"선생님 너무 슬퍼요."

조용하게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영화감독이 된 동생이 우리와 함께 남편의 영정사진 앞에 서있었다.  오빠 동건이의 회장 선거에 포스터를 만화로 그려줬던 추억과 슬기의 첫 번째 영화촬영 숙소로 우리 집을 제공해 주면서 영화에 보조 출연도 해주고 함께 영상 작업도 했던 남편은 나보다 각별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다. 김감독은 밤늦게까지 손님 맞는 일을 하면서 나도 본인도 울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삼 남매가 모두 유치원을 졸업하고 엄마와는 친구처럼 속을 보이면서 지내는 성진이네 가족 모두가 찾아왔다. 시부모님을 모시면서 아이들을 행복하고 지혜롭게 육아하던 엄마에게 '저도 결혼하면 아이들을 성진이 엄마처럼 키우고 싶어요.'라고 말했었다. 그래서인지 나도 2남 1녀를 낳았다. 반듯하고 멋지게 자란 삼 남매와 인자하고 여유 있게 나이 들어가는 아빠 그리고 그 옆에 항상 긍정적이고 밝은 엄마의 모습은 내가 끝까지 닮고 싶었던 가족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꿈을 접어야 한다. 네 명이 만들어갈 새로운 가족의 모습을 설계해야 한다.  


매일 장례식장으로 퇴근을 하고 누구보다 비통하게 구석 자리를 지키고 있는 두 남자가 있었다. 한 남자는 나의 직장 동료 였지만  남편을 막내 동생처럼 생각했던 분이. 아들인 영철이가 대기업에 취직해서 한 턱 내겠다고 했는데 영철이의 취직 턱을 먹지 못하고 남편은 떠났다. 지난 설날에도 할머니가 농사지은 쌀 한 자루를 짊어지고 와서

"우리 아빠랑은 한 번도 못 놀았는데 아저씨가 논에서 얼음 썰매 태워주고 총싸움 놀이도 하면서 놀았던 기억이 여기만 오면 생각나요.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랬어? 기억도 안 난다. 하하하."

보일러가  얼어터지면  달려오고 전기 코드가 필요하면 기꺼이 오셔서 기계를 다루는데 서툴기 짝이 없는 남편의 과외 선생을 자처하시면서 실리콘을 쏘거나 집을 수리하는 작고 소소하지만 중요한 것들을 함께 해주신 형님 같은 분이다.

"이렇게 힘들었으면 솔직하게 말이라 해주지. 그러면 가끔 억지로라도 불러서 한 잔 하면서 얘기라고 했을 거 아니야. 학교그림 작업에 바쁜 줄만 알고 말도 못 하고 있었는데 얼마나 힘들었으면..."

나를 원망했지만 그것은 결국 나와 아이들이 걱정돼서  나오는 가족과 같은 한탄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다른 한 남자는 우리 둘째가 뱃속에서 자랄 때부터 배불뚝이 엄마들이 먼저 친구가 되었고 그 후로는 아빠들이 친구가 된 사이다. 육아 문제로 주택으로 이사를 결정했을 때도 함께 땅을 보러 다니고 옆동네에 집을 지었다. 말수가 적고 마음 표현을 잘  하는 지원이 아빠는 술 한 잔 하면 늘 말했었다.

"내가 진짜 고마워요. 나는 사업으로 만나는 사람들뿐이지 친구가 없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같이 술도 마시고 얘기도 해줘서 진짜 고마워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유명한 분이에요. 하하하."

오늘은 소주잔을 앞에 놓고 한마디 말도 표정도 없이 그저 멀리서 영정사진을 바라보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선생님, 산 사람은 살자. 일단 먹고 자야 해."

학부모라고 하기보다 인생을 살 만큼 살고 산전수전 다 겪은 인생 선배님들이 나에게 가장 많이 해준 얘기다. 연고가 없는 이곳에서 프리랜서인 남편은 아이를 돌보면서 일을 했다. 남편이 예비군 훈련이나 서울로 볼일을 보러 가야 하는 난감한 날에는 100일도 안 지난 신생아를 기꺼이  돌봐주면서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살던 젊은 부부를 응원하고 도와주신 분들의 조언이다. 나는  앞으로도 이 분들의 조언을  귀담아들으면서 살 같다. 


남편과의 만남이 좋은 인연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덕분에 남편의 장례식장은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않았다. 찾아오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크고 작게 때로는 길고 짧게  이어사연들은 추억이 되어서 남편과의 마지막이 될 이 공간을 채워주고 있는 것이다.

 

인연이라고 하죠 거부할 수가 없죠.
이 생에 못한 사랑 이생에 못한 인연
먼 길 돌아 다시 만나는 날
나를 놓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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