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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앞니맘 May 29. 2023

소중한 동생들에게


"언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 정리 같은 거 하지 마. 내가 2주 있다가 다시 올 거니까 그때 같이해."

"알았으니까 걱정 마."

"엄마 아무것도 못하게 해라."

5일 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여동생은 터미널에  도착해서 차문을 닫지 못하고 당부 또 당부를 하고 있었다.  나를 걱정하는 엄마 같은 말 뿐이었다. 남편의 소식을  듣고 달려온 그날부터 오늘까지 동생은 내 보호자로서 장례식은 물론 정신적인 지지까지 모든 것을 해결해 주고 오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내 걱정 말고 조심해서 내려가. 내일 출근도 해야 하는데 집까지 데려다주지 못해서 미안해. 네 얼굴도 엉망이야. 빨리 가서 푹 쉬어."

"나는 차에서 자면 되니까 운전조심해서 들어가."

동생은 그제야 차문을 닫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듯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면서 손을 흔들었다. 고속 터미널 입구로 향하는 동생의 뒷모습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이대로  동생을 따라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엄마가 계신 내 어릴 적 집으로 가면 가난해서 불편했지만 꿈이 있었고 웃음이 있었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2남 2녀의 중에 장녀다. 명의 소중한 동생이  있다.


대학을 빨리 졸업하고 돈부터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언니와 누나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월급을 타서 동생들에게 용돈과 학원비를 주는 것이  연했고 행복했었다.

동생들이 태어나면서 얻게 된 장녀로서의 책임감은 자연스럽게 습득 사명 같았다.


"여자가 대학 가면 뭐 해. 여상 들어가서 고등 끝내면 빨리 취직해서  돈 벌어.  그래야 동생들 가르치지."

"동생들을 왜 내가 가르쳐. 엄마랑 아빠가 있는데. 그리고 아빠가 나는 대학교 가서  변호사 하랬어." 

"그걸 다 누가 해줘."

"할머니가 해주지."

여상 가서 동생들 뒷바라지하라는  할머니의 말에 콧방귀도 뀌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이 나를 살림밑천으로  강요하지 않고 키우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빠의 바람이나 기대만큼 공부를 잘하는 아이보다는 말을 잘하고 다양한 재능이 있는 아이였다. 재수라는 말을 꺼냈다가  혼만 나고 결국 돈이 적게 드는 국립전문대 유아교육과에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바로 밑에 여동생은 못하는 게 별로 없는데  공부까지 잘했다. 동생의 꿈은 컸지만 아버지의 설득으로 집 근처 교대에 다녀야 했다. 서울로 원서를 쓰겠다고  울던 동생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난은  우리의 선택의 폭 좁게 만들어 줬고  장녀와 딸의 역할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지만 동생은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 했고 이제는 교감 선생님이 되었다. 아내와 엄마 역할도 놓치지 않고 잘 해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장녀로 성장한 나는 50 이 넘고 40 이 넘는 동생들이 아직도 내가 보살펴야 하는 동생들로만 하고 살고 있었던 거 같다. 큰일이 생기고 나서그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가장 먼저 도움을 청한 것은 동생들이었다. 장례식 경험이 전혀 없고 정신도 못 차리는 나를 대신해서 동생들은  원팀으로 움직이며 일을 처리해 주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4남매 모두가 나가서  힘을  모았던 어린 시절처럼 동생들은 나와 아이들을 챙기면서 그렇게 형부와 매형을 잘 보내기 위해 노력한 덕분에 장례는 잘 마무리가 되었다.


동생과 남편은 남매 같았다. 동생이 1997년 학교에 발령이 나고 예비 형부에게 사줬던 겨울 점퍼가 아직도 남편 옷장에 걸려있다. 번들들한 원단에 간이 지나도 너무 지나서 유행이 다시 돌아올까 두려운  티피코시 점퍼다. 중요한 미팅을 나갈 때도 입고 나가다가 내 눈에 보이면

"오늘 그거 입고 나가면 당장 버릴 거야."

고 으름장을 놓면서도 버릴 수가 없었다.

"사준 건데. 그리고 멀쩡해. 절대 버리지 마."

지난겨울까지도 나 몰래 입고 다녔던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우리가 내려가면 온 가족이 모였다. 좁은 거실에 앉아서 처남들과 처제의 다양하게 살아가는 얘기를 듣고 '대단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 큰 형이고 오빠 같았다. 소박한 술상에  술 한잔 하며 웃는 잔잔한 사랑을 나누는 시간을 안하게 생각하고 소중하게 생각했 사람이었다.


"언니, 나 잘 도착했어. 내가  형부 3제 때는 차를 끌고 갈 테니까 힘든 일 하지 말고 기다려.  다음 주부터 출근도 해야 하니까 푹 쉬어. 밥도 대충 시켜 먹어. 약도 알람 켜 놓고 잘 챙겨 먹고."


형부와 매형을 누구보다 좋아했고 형제처럼 느꼈던 동생들에게도 남편의 일방적인 단절은 커다란 아픔으로 남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남겨진 나를 도와주고 이별을 선택한 남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동생들에게 한 없이 미안하고 고맙다. 


동생이 '사망 후에 처리해야 할 서류와 기간'이라는 폴더와 함께 동영상 하나를 보내왔다. 바로 몇 주전에 가족 여행으로 친정에 간 날 둘째 동생 생일파티를 했었다. 평소처럼 노래하고 손뼉 치면서 찍은 생일파티 동영상을 동생이 보내왔다.


"언니  미안. 형부가 보고 싶다."


저기 저 상 아래에 밤 막걸리를 따라주던        그 사람이 나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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