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드라이브 삼아 지나가던 납골당에 이렇게 남편의 유골함을 들고 오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죽어도 저런 곳에 가져다 놓지 마 그냥 아무 곳에나 뿌려."
"나도 그냥 자연으로 돌아갈 거야. 애들한테 미리 말해야겠다."
우리 부부가 합의한 일 중에 한 가지가 사후 처리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평소 의사와는 상관없이 늘 지나치던 납골당 입구로 버스가 들어서고 있었다. 파릇파릇 잎이 돋아나기 시작한 입구를 따라 산중턱까지 올라가는 길은 봄이라는 계절을 뽐내 듯 예쁘기까지 했다.
납골당에 도착한 우리는 마지막 제를 올리고 이틀 전에 막내 동생이 미리 보고 온 유골 봉안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유골함을 넣고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유골함 외에 사진 한 장 제대로 넣어 줄 공간도 없는 그곳에 남편을 가두고 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죽으면 다 끝'이라고 말하지만 살아 있는 내가 끝이 아닌 것이다.
남편은 답답한 것을 싫어하고 간지럼을 많이 타서 면티는 기본 스타일로 한 치수 큰 것을 입었고 겉옷도 앞이 막힌 옷보다 벗기가 수월한 난방 셔츠만 입었던 사람이다. 새 옷보다는 오래 입어서 낡은 헐렁하고 자극이 없는 옷을 즐겨 입던 사람에게 몸에 딱 붙는 쫄티를 입혀서 좁은 다락방에 가두고 나오는 기분이었다. 나는 다시 납골당 사무실로 발길을 옮겼다.
"혹시 봉안 장소를 바꿀 수 있을까요?"
"가능합니다. 어떤 자리를 원하세요?"
"2인용으로 바꿔 주세요. 사진이라도 넣어주고 싶어서요."
적지 않은 비용을 추가로 지불했다. 남편이 보고 있었다면 납골당에 온 것부터 화를 내고 있었을 것이고 2인용으로 변경한 나의 선택은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산 사람의 선택인 것이다.
평소 남편의 생각을 알고 있었지만 아이들의 입장을 무시할 수 없었다. 막내가 아직 어리고 아이들이 아빠가 보고 싶을 때 찾아 올 곳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자기야, 우리 막내딸이 성인이 될 때까지만 답답해도 참아줘. 나중에 자기가 원한대로 자유롭게 뿌려줄게."
남편의 유골함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아이들도 아빠에게 전하는 말을 각자 한 마디씩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49제를 위해 법당에 들러서 사진을 올리고 간단한 기도를 끝냈다. 앞으로 이곳에서 남편이 떠난 날부터 49일 동안 기도를 할 것이다.
5인가족에서 4인가족이 되어 아빠가 없는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에 모든 것이 그 자리에 남편의 습성대로 있는데 남편만 없다. 딸이 중문을 열고 들어 오면서 말했다.
"우리 오는 소리 나면 저기 소파에 앉아서 왔어? 하고 말해야 하는데 이상하다."
"왔어?"
뒤에서 큰아들이 아빠 흉내를 똑같이 내주었다.
"대박, 아빠인 줄."
앞으로 나와 삼 남매는 아빠가 필요할 때 보고 싶을 때 오늘처럼 1당 2의 역할을 하면서 5인가족으로 지내게 될 것이다. 남편을 걱정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