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선배?"
전화기 너머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톤이 높았다. 며칠 동안 통화가 안 된 이유를 빨리 얘기하라는 소리 같았다.
"연수 갔었어. 너야말로 무슨 일 있어?"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걱정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그에게 나는 담담하게 되물었다.
"연락이 안 되니까 걱정이... 별일 없다니 됐어요."
"내가 걱정됐어? 왜?"
그는 대답이 없었다.
"여보세요? 왜, 내 걱정을 했냐고요."
전화가 끊기지 않았는데 말이 없었다. 그의 표정을 상상하며 소리 없이 웃었다.
나는 2박 3일 동안 직무 연수를 갔었다. 연수 기간 동안 내 빈방에 전화벨이 울렸을 것이다. 미리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이 없었기 때문인지 전화하지 말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연수원에서 생각했지만, 그에 대한 생각을 잠시 멈추고 싶었다. 그의 집에 다년온 후, 그를 향한 내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판단이 필요한 만남, 특히 그런 연애는 하기 싫었다. 짝사랑 말고 뜨거운 사랑도 필요했고 모두가 축하해 주는 연애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는 시작부터 집중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대학교에서 처음 만났던 그때가 딱 좋았다. 고구마 먹고 목 막힌 상태 같은 연애는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가끔 심심할 때 편하게 만나, 밥 먹고 얘기하는 선후배 사이로 지내자고 정리하고 나니 그를 놀려줄 여유도 생겼다.
"그렇게 재밌어요? 이번 주에 서울에서 만나요."
"싫은데. 나는 바쁜데."
우리는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기로 했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대학로에 뮤지컬을 보러 다녔다. 파랑새극장에서 어린이뮤지컬을 주로 봤다. 아이들과 하는 수업에도 도움이 되고 내 주머니 사정과 딱 맞았다. 오늘은 연극을 보기로 했다. 햄버거집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북적거리는 거리 풍경이 흥미로웠다. 한 편에 영화를 보듯 오가는 사람들을 관람했다. 전에는 혼자 걷는 젊은 남자나 부모님과 나온 아이들이 주인공이었다면 오늘은 연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손을 잡고 앞만 보고 걷는 연인, 남자의 한쪽 겨드랑이 사이에 깊숙하게 팔을 찔러 넣고 걷는 남녀로 내 시선이 옮겨졌다. 가끔 마주 보며 주고받는 미소도 시선을 잡았다.
"오래 기다렸어?"
달려오듯 걸어오던 남자가 나와 함께 서 있던 여자를 안아줬다. 나는 소매를 걷고 시계를 들여다봤다. 학전 소극장에서 지하철 1호선을 보기로 했다. 영우가 늦으면 기다리지 않고 연극을 보러 갈 것이다. 나는 시계를 한 번 더 보고 가방을 고쳐 맸다.
"알아서 오겠지. 애도 아니고."
공연장을 향해 혼자 걸었다. 은행잎이 쏟아진 가을 공원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얼굴을 마주 보고 캐리커처를 그리는 모습. 연주하는 사람을 구경하는 사람들 속에 우뚝 선 목마 탄 아이. 그 아이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솜사탕을 파는 오토바이 아저씨. 바쁘게 교차하는 사람들 속, 벤치에 앉아 책을 보는 여학생 모습이 명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공원에서 보는 다양한 모습과 단조롭게 살고 있는 내 생활이 대조적으로 다가왔다.
생각할수록 화가 났지만, 연극을 보겠다는 목표만 남기고 걸었다. 입장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건물 입구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멈췄다. 이곳과 통하는 골목을 살폈다. 지난번 영등포 지하철역에서 만났던 사람과 흡사한 모습으로 달려오는 그가 보였다. 나는 빨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는 발걸음을 빠르게 옮겨 나를 향해 달려왔다.
늦은 이유에 관해 이야기할 시간도 없이 자리에 앉았다. 옆에 앉아 숨을 고르는 그를 흘끔 쳐다봤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가 빛났다.
"땀나게 뛰었구먼."
가방에 넣어둔 손수건을 그의 무릎 위에 올려놨다.
말없이 땀을 닦던 그가 나를 보고 웃었다. 연극이 시작되고 벗었던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가만히 있어."
"땀이 식어서 추워요."
그는 그렇게 옷을 입고 잠이 들었다. 그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내 어깨였다. 나는 어깨를 빼지 않았다.
"아, 진짜. 데자뷔야?"
신촌극장 뒷자리에 앉아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친구 K와 영화관에 갔었다. 마이키 이야기를 보다 내 어깨를 베고 숙면하던 그가 떠올랐다. 친구 말고 연인은 어떠냐고 고백하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긴장감 1도 없이 편안하게 잠든 모습은 고백 같은 어색한 사건을 막아줬다.
배우들의 무대 인사가 시작됐다. 박수 소리에 그도 잠에서 깼다. 두리번거리며 손뼉 치는 모습을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꿈속에 영자는 누구냐?"
그의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뺏으며 물었다.
"설마요. 지연이었겠죠."
"어쭈, 너 진짜 많이 컸다."
사람들은 아직도 공원에 가득했다. 캐리커처를 그리는 사람들이 극장에 들어가기 전보다 많았다.
"너도 캐리커처 잘 그리니?"
"제일 못하는 게 그거예요."
잠시 캐리커처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늘, 한 끼도 못 먹었어요"
"원고가 바빴구나."
매번 끼니도 건너뛰고 약속 시간도 못 지키며 뭐 하고 사냐는 말은 꾹 삼켰다.
"밥 먹으러 가자."
앞장서 걷던 내가 은행잎을 양손에 잡아 하늘로 뿌렸다.
"선배, 오늘은 밥 말고 레몬 소주 한잔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