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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 하는 남자
Oct 20. 2021
칼이 요리를 즐겁게 만들고, 냉장고가 여자를 행복하게 만들어준다면, 부엌은 주부의 자존심과도 같은 장소라고 나는 생각한다. 살림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요리. 그 준비가 하루에도 몇 번이나 반복되는 장소. 집안의 다른 어느 장소보다 가장 나의 손을 많이 탄 장소이며, 그렇기에 가장 안심이 되면서도, 동시에 지금의 나에게는 가장 꺼림칙한 장소이기도 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부엌 아니 주방이 좋은 집을 부러워했다. 언젠가 나의 주방은 이랬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 보기도 했었다. 두 개의 싱크대, 대리석이 올라간 아일랜드, 세련된 디자인에 넉넉한 수납공간을 보유한 찬장. 전반적인 조명은 밝게 하고, 창문이 있어 환기도 잘 되었으면 좋겠다. 이게 바로 나의 꿈의 주방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런 주방을 갖춘 집이라는 게 보통 비싼 게 아니었다. 어디 그뿐이랴 비싼 집이라 해도 원하는 주방을 꾸미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리모델링이 필요하다고까지 하니 지금 보면 꿈꾸는 것조차 사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러 번 이야기하지만, 우리 집은 굉장히 오래된 낡은 아파트이다. 그런 빌딩 중에서도 보수를 안 한지 못해도 20년은 넘을 것 같은 낡은 유닛. 거의 모든 것이 반쯤은 삭아있고, 거의 모든 곳에 세월의 흔적인양 오랜 때들이 남아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장소가 바로 부엌이다. 그렇다. 내가 상상해온 꿈의 주방, 그 모든 요소에 정확히 대칭되는 장소가 바로 지금 내가 서있는 우리 집 부엌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이 아파트에 들어와 주방을 마주했을 때의 절망이 떠오른다. 애당초 계약 당시에는 최대한 빠르게 집을 옮기고 싶은 마음뿐이었고, 이런저런 걸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곳에 우리가 들어갈 집이 있으면 그것으로 되었다. 그리고 입주시기가 되어 비어있는 집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을 때, 우리 부부만의 집이라는 로망은 산산이 조각나고, 먼지와 곰팡이 가득한 현실이 대신했다.
꿈에 바라던 건 주방이라면서 우리 집 부엌이라 표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부엌은 요새 나오는 현대적인 주방과는 그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다. 흔히 가정집의 주방이라 부르는 장소는 어느 정도 거실과 이어져있으면서 조리를 할 수 있는 공간과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을 통합하여 부르는, 어느 정도 현대식 공간을 이야기한다. 히지만 우리 집 부엌은 마치 방처럼 따로 분리되어 있는 닫힌 공간이다. 우리가 들어온 당시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잘 보면 문이 달려있던 흔적도 발견할 수 있었다. 좁고 닫혀있는 조리공간. 거기에 창문조차 없는. 그뿐이 아니다. 조명이 약해서 부엌 안은 어둡기 그지없었고, 환풍기는 의미도 없이 시끄럽기만 할 뿐. 아래쪽 찬장은 곰팡이로 가득했다. 갇힌듯한 공간에 창문이 없으니 벽은 온통 기름때로 가득. 그리고 마치 중학교 복도 인양 테라조 소재를 부엌 바닥은 새카만 색이었다. 아아, 나는 정말이지 이런 주방을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이런 부엌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 역시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버리고 닦고 치워본들 나아지는 것은 크게 없었다. 그것이 내가 처음으로 갖게 된 나의 온전한 부엌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모질어도 살아지는 게 사람이라 했던가. 정말이지 놀랍게도 익숙해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싫은 것은 빼고, 수습이 안 되는 부분은 포기하고, 부족한 것을 더해가며, 차가운 현실보다도 더 절망스러웠던 부엌은 점차로 나의 공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익숙한 공간에 익숙한 물건들이 들어서고, 조금씩 부엌을 쓰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물론 잊을만하면 이따금 모습을 비춰주시는, 이름조차 적기 싫은 벌레들을 마주할 때면 정말이지 다 때려치우고 나가버리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요새는 그조차도 드문 일이 되었다.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다. 나도 사람이었다. 그리고 적응은 마치 마약처럼 녹아들어 나태함을 만든다. 나는 최초에 이 부엌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로부터 느꼈던 절망을 잊지 않고 있다. 그로부터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어느덧 익숙해진 지금 이 공간을 둘러보면 가슴 한 구석이 따끔따끔하다. 무수한 불만들이 있지만, 그들 중 일부는 사실 시간을 들여 닦아내고, 긁어내고, 페인트칠을 새로 하면 해결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기름때로 찌든 벽들도 약품에 녹이고, 문대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틈틈이 유지해나갔다면 아마 지금보다는 좀 더 쾌적한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할 수도 있었다. 그리하지 않고 방치된 부엌은 전보다 조금 나아졌을 뿐,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큰 차이도 없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그렇기에 가장 익숙하고, 안심이 되는 공간인 부엌은 종종 거울이 되어 나의 나태함을 비춘다.
나의 부엌에는 나의 욕망을 반영하는 꽤 많은 물건들이 놓여있다. 손에 맞는 식칼과, 나무로 된 도마, 크고 작은 냄비와 프라이팬처럼 기본적인 조리도구를 고르는데도 심사숙고했었다. 에어프라이어와 밥솥에는 좀 더 맛있고 다양한 메뉴를 위한 욕심이 담겼다. 실력을 늘리고자 각종 조미료를 모아 써보았던 흔적들도 남아있다. 하지만 나는 정작 그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부엌이라는 장소에 대해서는 아무런 것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외면이었을지도 모른다.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 대한 외면이며, 언젠가라며 끝없이 미뤄둔 계회에 대한 외면이고, 그런 나의 나태함에 대한 외면이기도 할 것이다. 외면이 이어지다 결국 적응이 되었고, 순응이 되어 그저 모든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우리 집의 부엌은 절망적이지 않다. 절망에 순응한 나는 그것을 어느덧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캐나다에 오고 여러 해가 지났다. 애당초 이 나라에 오게 된 이유가 120만 원 월급을 위해 한 달을 꼬박 바쳐야만 했던 자신의 삶에 절망했기 때문이었다. 캐나다에서는 무슨 일을 해도 좋으니 그보다는 낫기를 바랐다. 눈앞에 닥치는 일을 무엇이든 해 보았고, 이 정도면 의외로 살만하겠구나 생각도 했다. 절망하고 포기하고 순응했다. 나의 부엌은 나의 삶이었다. 현실에 마주하고 그 차가움에 놀라 모든 것을 놓아버린 나의 모습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미 그렇게 방치된 부엌에 온갖 비싸고 화려한 물건들을 놓아둔들 그곳은 낡고 오래된 더러운 부엌일뿐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생각한다. 이제는 나도 부엌도 달라져야 하리라. 앞을 포기하고 당장 눈앞에 놓인 일들을 허덕이며 해치우는 것에서 벗어나, 더 멀리 보고, 더 좋아지기 위해 바꿔가야만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몹시 기대된다. 나의 새로운 부엌이 과연 어떤 모습일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