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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안일 하는 남자 Sep 21. 2021

정수기

나는 n연차 가정주부다 #6

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종종 그 유격훈련장이 떠오른다.

수통에 물은 다 떨어지고, 가벼운 탈수증 마저 느껴지던 그때. 오후의 훈련이 끝나고 돌아가던 길, 손 발을 씻으라고 받아 놓았던 물을 교관들의 눈을 피해 마셨다. 참으로 달고 맛있었다. 정신이 들고 고여있는 물을 바라보니 새카만 벌레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여름이었다.

대부분의 대한민국 남자들이라면 하나 둘 정도는 가지고 있을 평범하고 지루한 군대 이야기.


어릴 적, 물은 집에서 어머니가 '휘파람 소리가 나는 주전자'에 보리차를 끓여 냉장고에 넣어두신 것을 꺼내 마시는 것이었다. 그 당시 모든 집이 그랬듯 빈 주스병에 담겨있곤 했다. 마시는 물은 언제나 투명한 갈색. 그러던 어느 날, 단칸방을 벗어나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 새로 생긴 커다란 냉장고는 무려 답을 알고 있는 물, '육각수'를 만들어주는 물건이었다. 우리 가족이 마시는 물은 보리차 육각수가 되었다. 식수를 전용 물통에 넣고 냉장고 안의 물통 케이지에 두면 평범하던 식수는 육각수가 되어 가족들의 건강을 책임진다. 육각수가 정말 병자를 치료하고, 소경을 눈뜨게 하며, 죽은 자를 일으키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게 무어 그리 중요할까. 버튼을 누르면 냉장고 안에서 물이 저 혼자 소용돌이치며 돌아간다. 9살 남자아이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렇게 빠르게 타오른 흥미는 금방 식어버리고, 육각수를 만들기 위해 제공된 전용 물통마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무렵, 우리 집의 식수는 어느새 평범한 보리차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에 정수기가 생겼다. 당시에도 나이가 많지 않았으니 자세한 이야기야 알 수도 없고, 기억도 안 나지만 그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보리차를 끓여 냉장고에 식혀놓는 과정이 어디 보통일이겠는가. 참다못한 어머니에게 지름신이 내려온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그렇게 우리 집에는 정수기가 생겼다. 언제고 어느 때고 간편하게 차가운 물을 마실 수 있다는 일은 무척이나 매력적인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뜨거운 물이 나오는 기능이 없다는 사실에 남모르게 아쉬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정수기는 빠르게 우리 가족의 삶에 침투했고, 특히 나는 정수기에 대한 의존증이 더욱 심했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집에 있는 정수기 물이 아니면 갈증이 좀처럼 해소되지가 않았다. 바로 그 정수기에서 나오는 온도와 목 넘김, 그리고 심리적 편안함. 그게 아니면 좀처럼 가시지 않는 갈증이 목구멍 한편에 자리한다. 그러다 돌아온 집에서 바로 한 컵 마시는 정수기의 물은 그 모든 목마름을 말끔하게 해소해준다. 내가 집퉁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집에서 마시는 물은 언제난 맛있다.


그렇게에 캐나다로 와 새로운 가정을 꾸렸을 때, 생각지도 못하게 고민했던 부분이 바로 물이었다. 처음에는 수돗물을 마셨다. 끓이고 뭐하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주방의 싱크대에서 바로 컵에 담아 마셨다. 생각보다 별로 꺼림칙한 기분은 아니었다. 편하기도 하고, 찬물이 바로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어딘가 한 구석의 갈증은 남아있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이제 다시는 채워질 수 없는 것이리라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침대에 누워 인터넷으로 여기저기 뒤적거리다 우연히 보게 된 한 장의 사진. 그것은 눈뜨고 보기 힘들 만큼 더러운 어딘가의 아파트 물탱크 내부 모습이었다. 혹시 우리가 마시는 수돗물이 저 물통으로부터 나오는 건가? 잠깐만, 그럼 이 아파트의 수도 배관은 깨끗한가? 며칠 정도 집을 비우고, 오랜만에 물을 틀면 갈색의 녹물이 먼저 마중하는 우리 집 수도가 떠올랐다. 설거지를 하고 물기가 남은 그릇을 건조할 때면 마치 물때처럼 남는 석회 자국들도 떠올랐다. 극도의 찝찝함이 전신을 뒤덮었다. 멀쩡하던 속이 절로 메스꺼워진다.


그렇게 우린 새로운 물을 구해야만 했다. 생수도 사 마셔보고, 브리타에 물을 걸러서 마셔도 보았지만, 결국에는 다시 컵을 꺼내 수돗물을 받아 마시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수돗물이 목구멍을 넘어갈 때마다 미미한 불쾌감이 기어올라왔지만, 그럼에도 그 간편함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나 매번 보리차를 끓이고, 식혀, 물통에 담에, 냉장고에 넣으셨던 어머니의 수고에 새삼 감사함이 느껴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결국 정수기를 계약하기로 했다. 그때는 나름 생활이 안정되어 조금 여유가 있던 시기였다. 드디어 원하는 물을 마실 수 있는 정도의 삶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 집 부엌 한편에 정수기가 자리 잡게 되었다.


새로 계약한 정수기는 오직 정수만을 지원하는 소박한 기능에 비해 꽤나 묵직한 외관을 자랑하는 모델이었다. 나는 찬물이 아니면 좀처럼 갈증이 가시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정수기에 냉수 기능이 추가되는 것으로 렌트비가 두 배가량 올라는 가는 것을 보고 어렵지 않게 포기할 수 있었다. 결국 지금은 너무 차가운 물이 좀 부담스러울 정도로 미지근한 물에 익숙해졌다. 돈은 취향을 쉽게 바꿀 수 있다. 처음 정수기가 들어오고 물을 마셨을 때는 꽤나 감동적이었다. 수돗물과도, 생수와도 다른 그 정수기만의 맛이 있다. 그게 실제로 어떻게 다른 것인지, 정말 다르긴 한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지만 내가 그렇게 느끼고, 믿는다면 그게 맞을 것이다. 믿음이 중요한 거다. 덕분에 지금은 깨끗하고 안전한 물을 마음껏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더러운 수도관의 찝찝함과, 부족용을 알 수 없는 석회수와, 무겁고 맛없는 싸구려 생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물론 수년간의 렌트 계약서가 그 대가였다. 자유를 위해 새로운 굴레를 기꺼이 뒤집어써야 한다는 게 바로 현대사회의 묘미 아니겠는가.


다시금 그 유격훈련장을 떠올려본다. 날을 덥고, 목은 말라, 냄새나는 오래된 수통의 물 한 방울조차 아쉽기만 하던 그때. 그렇게나 질색을 하는 벌레들이 떠다니는 물조차 달게 마시던 그 순간. 결국 물은 기분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집에서 마시는 물이기에 비로소 갈증이 해소된다. 그 갈증은 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오는 것이리라. 지금은 '우리'집의 미지근한 물만 나오는 정수기의 물이 아니면 갈증이 다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는 진정으로 여기가 우리 집이 되었다. 비록 저 정수기 안의 물탱크가 정말 깨끗할 것인지, 필터는 광고대로의 역할을 잘하고 있는지는 나는 알 수가 없지만, 그럼에도 내가 그렇다고 믿는 그 순간까지 우리 집 정수기의 물은 나에게 감로수일 것이며, 생명수이다. 나의 갈증을 채워줄 유일한 것이다. 그게 나의 물이며, 나의 집이고, 나의 가정 이리라. 


소박한 기능의 우리 묵직한 정수기는 오늘도 주방 한 편에 조용히 자리해있다. 

마치 그것만이 자신의 미덕인 듯, 이런저런 기구들로 시끄러운 주방에서 홀로 묵묵하다. 

묵묵히 그렇게 우리 가정의 갈증을 해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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