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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안일 하는 남자 Sep 30. 2021

냉장고

나는 n연차 가정주부다 #7

"여자라서 행복해요."


옛날 어느 냉장고 광고에 나왔던 멘트이다. 내가 여자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크고 좋은 냉장고가 있으면 행복할 것 같기는 하다. 요즘이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과거에는 냉장고의 크기가 바로 가정의 재력을 상징하지 않았던가. 크고 좋은 냉장고가 주방에 있는 것만으로도 주방의 분위기는 한층 고급스러워질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아름다운 여배우도 행복하게 만들 만큼 좋은 물건은 아니지만 우리 집에도 냉장고가 한 대 있기는 하다. 


캐나다의 주거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하우스, 콘도, 아파트가 그것이다. 그 외에도 다양한 방식이 더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집을 구할 때는 이 셋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게 된다. 이 중 우리 부부가 살고 있는 곳은 아파트인데, 건물을 통째로 오피스가 관리하고 있어 모든 입주자가 월세를 내며 살고 있다. 때문에 한국과는 달리 아파트는 집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가난한 건물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무척이나 오래되어 마치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가난한 주인공이 살법한 이미지를 풍기고 있다. 그만큼 가격도 저렴하다는 장점이 나머지 단점을 죄다 씹어먹는 바람에 어디 가지도 못하고 살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아파트의 월세에는 전기 요금이 포함되어 있는 부분이 바로 큰 세일즈 포인트이다. 


우리 아파트의 수도와 전기 요금은 사용량으로 부과하는 방식이 아니라 월세에 포함되어 매달 일정량을 내는 정액제이다. 그렇다 보니 물과 전기를 많이 잡아먹는 외부 전기 제품들이 금지되어있는데, 특히 세탁기, 식기세척기, 그리고 냉장고가 바로 그것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냉장고 없이 살 수는 없으니, 다행스럽게도 아파트 측에서 냉장고를 기본 옵션으로 비치해 놓고는 있다. 월세도 저렴한(캐나다 기준이다.) 집에서 전기 요금도, 수도 요금도 따로 안 내면서, 냉장고까지 주는 숙소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니 뭔가 되게 좋아 보이는데, 세상이 또 다 좋은 것만 있지는 않다. 


아무래도 아파트가 오래된 탓인지 아파트에서 제공하는 냉장고도 굉장히 오래된 물건이다. 대략 20년 정도 전 즈음에 한국에서 쓰던 물건을 연상케 한다. 안 그래도 남루한 주방을 한 층 더 남루해 보이게 만든다. 그리고 작다. 다행히도 우리는 두 명이 살고 있는 집이기에 겨우겨우 맞춰 넣고는 있지만, 솔직히 조금 빡빡하다. 그러다 문득 한국의 부모님들로부터 구호 물자라도 오는 날이면 코끼리를 집어넣는 기분으로 냉장고의 공간을 활용해야만 한다. 이 문제 앞에서는 온도 조절이 안돼서 냉장해놓은 야채들이 죄다 언다거나, 고무 패킹이 낡아서 종종 문이 열린다거나 하는 문제 등은 사소해진다. 하지만 아무리 불편하고 불평해도 냉장고를 바꿀 수는 없다. 계약사항이 그렇다고 한다. 아마도 전기 사용량이 달라진다거나 하는 이유 때문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이렇게 작고 오래된 냉장고를 5년 넘게 사용하다 보니 좋은 점도 있다. 일단 냉장고 재고관리에 굉장히 민감해진다. 수시로 냉장고를 뒤엎고 내용물을 확인하지 않으면, 뭘 할 수가 없다. 냉장고는 가득 차 있는데, 해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비극적인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이에 더해서 한인 마트에서 일 한 경력이 합쳐지니 선입선출과 유통기한, 재고관리에 굉장히 예민해지고, 틈틈이 냉장고를 털어 보다 작은 용기에 옮기고 상할 것 같은 재료들을 빼고 하는 일이 굉장히 자연스러워졌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눈을 감으면 대충 냉장고 어디에 뭐가 있는지가 그려진다. 덕분에 '냉장고를 부탁해'가 우리 집 부엌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장을 볼 때면 냉장고 상태를 고려해서 딱 먹을 만큼만 사도록 강요당한다는 장점은 덤이다. 


최근 보고 있으면 매우 다양한 냉장고들이 시중에 나와있었다. 누군가의 로망이었던 '양문이 냉장고'도 이제는 옛날 물건이다. 보다 세련되고 깔끔한 디자인을 중시하면서도 정수기가 달려있고, 얼음도 나오며, 심지어는 스마트폰의 OS가 들어가 각종 편의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렇게 신형 냉장고를 보다 우리 집의 작고 오래된 냉장고를 떠올리면 어쩔 수 없이 그 불편한 비좁음에 씁쓸함이 올라온다. 하지만 마음을 추스르고 냉장고 문을 열어보면 반갑기까지 한 익숙함이 나를 반긴다. 단출하지만 단순하고, 작지만 한눈에 들어오는 적당함에 마음이 놓인다. 낡고 오래되었지만 단 한 번도 멈춘 적 없는 성실함에 믿음이 간다. 차마 '여자라서 행복하게' 만들어줄 만큼 좋은 신형 냉장고보다 더 좋다는 말은 못 하겠지만, 그럼에도 못지않게 쓸만하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덕분에 나는 집안에서 식재료를 관리하는 방법을 배웠고, 적당하게 장 보는 법을 배웠으며, 불편함으로부터 견뎌내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니 이 낡고 오래된 냉장고를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야겠다. 저 예쁘고 똑똑해 보이는 신형 냉장고들을 너무 부러워하지는 말아야겠다. 결국 나를 발전시킨 건 그 부족함과 불편함이었으니, 우리 냉장고와 함께 나도 충분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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