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집안일 하는 남자 Oct 11. 2021

조미료

나는 n연차 가정주부다 #8

요리의 꽃, 그것은 바로 조미료이다. 나는 단언한다.


우리 집 주방의 찬장에는 무척이나 많은 종류의 조미료들이 있다. 간장, 고추장, 소금, 후추 같은 기본적인 것들은 물론이고, 일본식 쯔유, 중국식 굴소스와 두반장, 베트남의 피시소스, 서양식 파프리카, 파슬리, 오레가노 가루, 한때 한국에 화재였던 트러플 버섯이 들어간 소금과 오일 등. 다 적자면 그것만으로도 한 페이지가 사라질 만큼 많은 조미료가 있고, 또 있었다. 물론 이렇게 사들인 조미료들 중 대부분은 처음에 몇 번 써 보고 이내 찬장의 구석에서 조용히 잠들어있다 유통기한이 지나 버려지기 일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바닥을 드러내며 새로 보충할 것을 요구하는 조미료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다시다'이다. 


나는 다시다를 사랑한다. 주방에 서기 전부터 나는 다시다의 맛을 좋아했다. 그것이 갖고 있는 그 폭력적인 감칠맛에 중독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제는 아저씨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음에도, 나의 입에 싱겁고, 구수하기만 한 음식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맛이다. 날카롭기 그지없는 소금의 맛도 조금은 어렵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그 감칠맛에 적당한 염도로 이해하기 쉬운 맛을 전해주는 다시다가 들어간 음식이 나에게는 맛있는 음식이었다. 그랬기에 이따금 내가 하던 음식에는 상당히 많은 양의 다시다를 넣어왔다. 아니 상당히 많은 양의 다시다를 넣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생각이 깨진 건 캐나다에 도착하고 처음 푸드코트에서 일을 시작하면서였다. 


주방에서 나의 첫 일은 주먹밥을 만드는 것이었다. 밥에 간을 하고 간단한 재료를 안에 넣어 포장하는 비교적 간단한 일이었는데, 이때 밥에 간을 하고 나면 항상 사장님에게 잘 되었는지 확인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언제나 사장님은 밥 위에 대량의 소금과 다시다를 넣은 후에야 만족했다. 일단은 MSG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홍보하는 식당이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다시다와 MSG는 다른 것이 맞기는 하지만 수북이 쌓여 밥에 섞여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썩 좋은 느낌은 아니었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맛은 폭력적일 만큼 좋았으며, 손님들로부터 반응도 제법 좋았다. 그곳에서 나는 다시다를 쓰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양이 들어가야 조미료가 맛을 낸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전까지 내가 해온 음식에서의 다시다 맛은 그저 다시다 가루를 넣었다는 사실에 대한 플라시보였던 것이다. 다시다가 들어간 음식이 무슨 맛을 내는지, 나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반대로 나는 설탕을 싫어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십 대가 되면서부터 스스로 단 음식을 싫어한다는 생각을 갖고 자라왔으며, 그 생각은 나이가 먹을수록 굳어지며 일종의 진리가 되어갔다. 때문에 음식에 설탕이나 이에 준하는 당류가 들어가는 것에 대해 굉장히 보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그 탓에 한동안 우리 주방에는 설탕이 없던 시기조차도 있었다. 그렇다 보니 아무리 음식을 해도 어딘가 해결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오랜 시간 고민하며 소금과 간장, 다시다 등의 배합도 바꿔보고 혹시나 싶어 MSG도 넣어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해결이 될 여지는 보이지 않았고, 도리어 부족한 부분에 대한 아쉬움만 커져갔다. 원인은 단순했다. 설탕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많은 양의 설탕이었다. 요리 유튜브를 통해 음식을 배우고 있던 나에게 설탕을 두세 스푼씩 집어넣는 유튜버들의 모습은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고, 저들과 나의 입맛이 다른 것뿐이라며 애써 외면해왔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눈을 딱 감고 시키는 대로 숟가락 가득 설탕을 퍼 넣은 적이 있었다. '그래 망하면 버리고 다시 하면 되지.'라고까지 생각했었다. 그렇게 완성된 음식의 맛을 보았을 때 머릿속에서 종이 울렸다. Q.E.D.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모든 거짓은 나에게 있었다. 나는 무려 설탕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설탕 범벅이 된 식당의 음식들은 지금까지 맛있게 잘 먹어와 놓고 설탕이 들어간 음식은 싫어한다니 애당초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양념 돼지갈비를 좋아하고, 감자튀김은 케첩이 없으면 못 먹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설탕을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니. 내가 이렇게나 앞뒤가 안 맞는 사람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만큼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과거 나는 고추장과 고춧가루가 없으면 음식을 만들지 못했다. 특히 내가 할 줄 아는 거의 모든 음식에는 고추장이 들어가야만 했다. 일단 고추장이라는 조미료 자체가 온갖 맛을 내기 위한 것들이 다 들어가 있는 것이었던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보다는 당시 나는 매운 음식에 심취해있던 시절이었다. 매운 음식이 아닌 음식을 곧바로 떠올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하다못해 고추장에 청양고추라도 씹어먹어야 식사가 만족스럽게 느껴졌을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캐나다에 도착하고 한동안 그 매운맛을 잊지 못해 고생했던 적이 있었다. 그나마 먹을 수 있던 만족스러운 매운맛은 라면이 유일했고, 한동안 나의 최애 음식은 라면이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 나의 아내는 매운 것에 극도로 취약한 사람이다. 일반적인 김치도 매워하며, 라면 끓이는 냄새에도 기침을 참지 못한다. 더 나아가서 어디가 매운맛이 있다고는 상상도 못 했던 파프리카 가루에서도 매운맛을 찾아낸다. 집안에서 식사를 전담하기로 한 이상 아내의 입맛 역시 고려해야 했기에 우리 집 메뉴에는 매운맛이 조금씩 사라졌다. 캐나다 와서도 한동안 그 비싼 값에도 사 먹었던 청양고추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고, 언제나 새빨간 색을 자랑하던 나의 음식의 색이 점차 연해지더니 이제는 갈색에 점점이 박혀있는 몇 개의 빨간 고춧가루만이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게 할 뿐이었다. 덕분에 지금 내가 가장 자신 있게 만들 수 있는 소스는 간장과 설탕, 다시다를 조합한 불고기 양념이 되었다. 아내가 좋아하는 메뉴이기도 하고, 나 역시 덜 매운 음식들을 만들며 먹다 보니 간장과 설탕이 섞이며 만들어내는 맛이 마음에 들었기에 종종 응용하는 조합이 되었다. 최근에는 이를 기본으로 한 갈비양념을 만들어 LA갈비를 재우고 구워 먹는 데에 맛이 들려 종종 해 먹고 있다. 


결국 그렇게 되었다. 피자와 햄버거가 좋다며 캐나다에서도 굶을 걱정 없다고 떠난 나는 토론토에 널려있는 수많은 나라들의 조미료들을 긁어모으고는 끝내 가장 한국적인 맛을 내기 위해 간장과 설탕을 들었다. 맵지 않으면 음식이 아니라며, 온갖 음식에 고춧가루를 넣었고, 온갖 것들을 고추장에 찍어먹던 나는, 결국 라면 정도에도 맵다며 땀을 흘리고, 뒤집어질 장을 걱정하는 사람이 되었다. 싫어하는 줄 알았던 설탕이 나의 가장 큰 무기가 되었고, 그렇게나 사랑하던 다시다를 이해하면서 조금은 거리를 두게 되었다. 조미료는 요리의 꽃이다. 그리고 그 뿌리는 나다.  최근 집 정리는 하며 찬장의 많은 조미료들을 정리하며 안 쓰는 것들을 버렸다. 찬장의 빈 부분을 보며 생각한다. 나는 또 어떤 조미료를 다시 사게 될까. 어떤 새로운 맛이 우리 주방을 사로잡을까. 언젠가 새롭게 바뀐 우리 집의 조미료들을 보며 나는 생각할 것이다. 나는 어떻게 바뀌었나. 부디 바뀐 그 맛이 지금보다 좋기를 바랄 뿐이다.  

이전 07화 냉장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