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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안일 하는 남자 Sep 10. 2021

나는 n연차 가정주부다 #1

나는 1년 차 가정주부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1년 하고도 4개월 된 가정주부이자 결혼 5년 차 유부남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적부터 친구들에게는 늘 나중에는 한량이 될 것이다, 가정주부가 될 것이다 말해왔던 꿈이 이뤄진 것이고, 반면에 대학교 시절에 입버릇처럼 말하던 절대 결혼은 하지 않을 것이라던 다짐은 지켜내지 못한 것이다. 뭐 가장 놀라운 일은 영어라면 치를 떨며 절대 한국 밖으로는 안 나가리라 절규하던 청년이 지금은  캐나다의 한 귀퉁이에서 영어를 온몸으로 맞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 이겠지만. 많은 것이 그렇다. 어떤 희망은 이뤄지고, 어떤 바람들은 잊히며, 어떤 다짐들은 이뤄지지 못한다. 칼이 그러하다.


칼은 남자에게 이상한 로망을 안겨주는 물건이다. 그 본질은 무기이며, 힘과 폭력의 극치였으며, 전쟁을 상징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한들 눈앞에 칼을 막아낼 수 있는 펜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에 칼은 권력이 될 수도 있다. 힘과 권력. 그야말로 남자의 로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내가 반해있는 칼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다. 1년 차 가정주부가 사랑해 마지않는 칼, 그것은 당연하게도 부엌칼이다. 흔히 식칼이라고 말하는 이것은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게 어느 유명 호텔의 셰프이든 아니면 이제 갓 주방에 들어선 풋내기 가정주부이든 간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는 물건이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식칼이라는 게 그냥 재료만 썰리면 되는 거 아냐? 뭘 그렇게 까다롭게 따지는 건데?"


그럴지도 모른다. 여하튼 식칼의 존재 이유는 재료를 써는 데 있다. 그러니 일단 재료가 썰린다면 식칼의 의무는 다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그 결과로만 평가받는다면 '잘'이라는 말은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좋은 부엌칼은 재료를 '잘' 잘라준다. 좋지 않은 부엌칼은 재료를 '잘' 자르지 못한다. 음식을 함에 있어 이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잘'한다는 것은 곧 '재미'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좋지 않은 부엌칼로 재료를 자르면 그만큼 많은 힘과 신경을 들여야 하고, 잘린 재료의 단면도 예쁘지 않다.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좋지 않은 결과를 위해 노력을 들이는 일로부터 재미를 느끼지는 못한다. 즐겁지 않은 요리는 그저 하나의 노동이 될 뿐이며, 살림이 노동이 되는 순간, 가정에는 폭풍이 친다.


그렇다면 좋은 부엌칼은 무엇인가. 이는 사람마다 다르다. 모두가 손 모양이 다르고, 손을 쥐는 방법이 다르고, 칼을 쓰는 습관이 다르다. 그렇기에 우선 쥐어봐야 안다. 쥐어보고 썰어보면 알 수 있다. 내가 지금 쓰는 부엌칼은 총 두 자루로, 둘 모두 흔히 쌍둥이 칼로 알려진 독일의 헹켈 사의 칼이다. 하나는 양식 칼인 셰프 나이프고, 다른 하나는 날이 평평한 일본식의 산토쿠이다. 이 중 셰프 나이프를 꽤 값을 주고 구입했는데, 이 칼을 처음 잡았을 때의 감동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마치 내 손에 맞춰 제작한 듯 착하고 감기는데, 마치 눈앞에 재료가 있어 내가 칼질을 하는 모습이 바로 상상이 될 정도였다. 그리고 실제 집으로 돌아가 칼질을 해 봤을 때 느낀 그 도마가 잘려나갈 듯한 예리함에는 전율이 일었었다. 마치 예민한 스포츠카를 몰듯 조심조심 재료를 손질하며 그 아름답게 잘려나간 단면에 감탄하는 일은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집에 좋은 스포츠카가 있다한들 일상에서 곧잘 쓰는 차는 따로 있지 않던가. 나에게는 일본식 산도쿠가 그랬다. 아는 분이 이사 간다고 잡동사니를 처분하며  넘겨받은 이 칼은 여기저기 날 면에 흠집도 많이 나있고, 날도 대부분 죽어있었다. 그리고 무게도 가벼운 편이라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가장 많이 쓰고 있는 칼은 바로 이 아이였다. 날이 곡선을 그리고 있는 셰프 나이프에 비해 산도쿠의 날은 직선으로 되어있는데, 그래서 야채를 썰때 덜 잘리는 부분 없이 빠르게 썰 수 있었다. 그리고 날이 적당히 죽어있어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칼질을 해도 손을 다칠 염려가 적었다. 무게도 가벼우니 피로감도 적었다. 마지막으로 공짜로 얻었으니 관리에 그리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아쉽지가 않았다. 신경 쓸게 적어지니 칼질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도 적어진다. 비싸게 주고 샀고, 날도 잘 들고, 쓸 때마다 감탄하면서 쓰는 애지중지하는 셰프 나이프. 공짜로 얻었고,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언제고 가볍고, 편하게 꺼내 쓸 수 있는 산도쿠. 정말 좋은 것은 무엇인가.


나는 1년 차 가정주부다. 그런 나에게 좋은 칼은 갖고 싶었던 하나의 소망이었다. 좋은 칼이란 것이 무조건 비싸고 날이 잘 들고 그런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그런 비싸고 날이 잘 드는 칼을 능숙하게 다루며, 척척 음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모습을 바라고 있었다. 그랬기에 돈을 들여 좋아 보이는 칼을 샀다.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 유튜브 등을 챙겨보며 칼을 쓰는 법, 관리하는 법을 공부한다. 하지만 정작 내가 빠르게 꺼내 쓰는 칼은, 내가 이상으로 생각하던 그 칼은 아닌 것이다. 나의 칼질은 여전히 어설프고, 그렇기에 내가 쓰는 칼은 뭉툭하고 가볍다. 그렇다. 어떤 희망은 이뤄지고, 어떤 바람들은 잊히며, 어떤 다짐들은 이뤄지지 못한다. 내가 그러하다. 그렇기에 잊힌 바람들을 억지로 떠올리며, 이뤄지지 못한 다짐들을 이뤄내기 위해 몸부림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손에 익지 않은 그 칼을 다시 쥐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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