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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 하는 남자
Sep 11. 2021
칼과 도마는 세트다. 칼을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마가 필요하다. 좋은 칼이 요리에 재미를 느끼게 해 준다면 잘 맞는 도마는 요리에 흥을 돋우는 역할을 한다. 마치 난타를 하듯 도마 위에서 타타 타타 음식을 다지기라도 하면 마치 내가 실력 있는 요리사라도 된듯한 기분이 든다. 햇살이 나지막이 들어오는 주방. 보글보글 끓는 찌개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통통통 경쾌한 도마 소리.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이게 만드는 이 소리들을 내 손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물론 이 상상의 대부분은 그저 상상일 뿐 현실은 조금 달랐다.
수년 전 부모님과 함께 살던 당시에 우리 집에서 쓰던 도마는 어머니가 홈쇼핑에서 산 두꺼운 실리콘 도마였다. 꽤 오래 사용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는 언제나 쓰던 것이라 별생각 없이 썼었다. 당시에는 칼질에 많이 서툴렀어서 도마에 신경을 쓸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집을 떠나 캐나다라는 만리타향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나는 도마의 중요성에 대해 느낄 수 있었다. 캐나다 생활의 처음은 아는 지인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했었는데, 이곳의 도마는 유리로 된 도마였다. 표면에 상처가 나지 않아 세균 번식을 막을 수 있어 가장 청결을 유지하기 좋은 이것의 사용 후기는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단단한 유리로 되어있으니 도마의 탄력이 없어 재료를 썰때의 느낌이 영 좋지 않았다. 재료는 쉽게 밀리고, 유리 표면에 날카로운 칼날이 긁히는 느낌은 소름이 돋았다.
이 당시에는 토론토 시내의 푸드코트에서 주방보조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주방장을 겸임하고 계신 사장님의 지시로 칼질을 할 일조차 없는 허드렛일이 대부분이었다. 이때 언제나 자신의 칼과 나무 도마를 따로 두고 절대로 건드리지 못하게 했던 모습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나와 동료를 남겨두고 먼저 퇴근할 적이면 언제나 자신의 칼과 도마를 수건으로 잘 싸매고는 서랍 안쪽 깊이에 숨겨두고는 했다. 자신에게 길이 든 칼과 도마가 망가질 것을 걱정하는 마음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마치 서당 벽장에 몰래 꿀을 숨겨놓고 몰래 먹었다던 훈장님의 이야기가 생각나 조금 우습기도 했다.
아내와 함께 살게 되면서 홈스테이를 나와 우리의 집을 갖게 되었을 때에는 도마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당시에는 그야말로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이 주요한 과제였던 시절이었고, 가성비조차 아난 싼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였던 시간이었다. 행복하기 그지없던 나날들. 칼도 도마도 아웃렛에서 세트로 산 물건들로 품질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둘이어서 좋았고, 둘 뿐이어서 좋았다. 돈을 벌고, 돈을 쓰며 함께 살아나갈 궁리를 했다. 칼도 도마도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다.
그러다 도마가 눈에 들어온 건 작년 무렵이었다. 앞으로 집안 살림을 내가 전담하기로 결정하고 난 뒤였다. 남는 시간, 머리를 비운채 마주하는 무수한 썸네일들, 그러다 우연히 마주친 유튜브의 도마 만드는 영상. 정말 홀린 듯이 보았다. 기다란 나무토막들이 잘라지고, 다시 붙고, 칠하고, 말리고, 깎아내고, 다듬고, 닦아서 만들어진 그것은 조리도구라기보다는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사용하는 도마는 유튜브에서 본 것과 비슷하게 생긴 집성목 도마이다. 근처 월마트에서 구입한 20불 조금 넘는 싸구려 나무 도마이다. 아직까지 내가 사용하는 가장 마음에 드는 도마이다. 재료를 자를 때면 칼날을 적당히 받아주며 기분 좋은 소리를 내준다. 파나 마늘을 다질 때는 그 소리에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조심스럽게 소고기나 생 연어를 손질할 때도 재료를 단단히 잡아주어 한결 편하게 작업할 수 있게 도와준다. 언제나 깨끗하게 닦아 잘 말려 보관한다.
나에게 도마는 그랬다. 부모님 밑에서 그저 주어진 것처럼 써오던 것이 어느 날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그것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금기가 되었으며, 나아가 하나의 이상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상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충분한 만족에 머무르고 있었다. 언젠가는 이 만족이 부족이 되고 어쩌면 이전과는 조금 다른 이상을 원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 그렇기에 오늘도 나의 서투른 칼질에 여기저기 거칠어진 표면을 깨끗하게 닦아 서투르게나마 기름을 먹여본다, 오늘의 만족이 조금 더 오래가길 그렇게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