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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안일 하는 남자 Sep 13. 2021

프라이팬

나는 n연차 가정주부다 #3

프라이팬은 주방에 가장 기본적인 조리도구이다. 내가 가장 처음으로 사용한 조리도구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한국인에게 가장 최초로 시도한 요리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대부분이 라면이라 답하겠지만, 내가 가장 처음 도전했던 요리는 바로 달걀 프라이였다. 동네 친구들 몇몇과 우리 집에 모여 놀던 어느 12살 오후, 모두의 어머니들은 맞벌이로 집에 없었고, 가장 나이가 많았던 나는 출출한 배를 달래고자 주방에 섰다. 냉장고의 달걀을 네댓 개 풀고 거기에 소금, 후추, 참기름에 고춧가루까지 눈에 보이는 조미료는 전부 때려 넣어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는다. 차마 뒤집지는 못하고 그냥 얇게 펴 부쳐 윗면이 적당이 굳으면 조리 끝. 한창때의 배고픈 남자아이들은 그 기묘한 완성품이 마치 진귀한 음식인양 게걸스레 달려들어 해치웠다.  그것이 나의 첫 요리, 프라이팬과의 첫 접촉이었다.


결혼 후 수년간 여차 저차 식사를 준비해온 지금도 냄비를 이용한 국, 찌개류보다는 프라이팬을 이용한 부침이나 볶음류의 요리가 좀 더 익숙하고 편한 게 사실. 그래서인지  프라이팬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는 꽤나 단호했다. 주로 사용해온 팬은 테팔사에서 나온 코팅 팬으로, 주방에 들어가 본 일이 있다면 누구나 봤을만한 바로 그것이었다. 가격은 저렴하고, 무게도 가벼우며, 조리과정에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재료가 팬 바닥에 눌어붙거나 하는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가장 처음 잡아본 프라이팬이었고, 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까지 집에서 사용하던 바로 그 제품이기도 했다.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장소가 바뀌었지만 주방에는 항상 같은 모습의 프라이팬이 있다니, 어떤 의미로는 놀라울 정도다. 나는 이 프라이팬으로 요리를 시작했고, 어머니에게 요리를 배웠으며, 아직까지 이것으로 요리를 하고 있다. 그런 나에게 최근 새로운 프라이팬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이었다.


모든 것은 새로운 레시피를 찾느라 보게 된 요리 유튜브 때문이다. 비록 내가 즐겨보는 요리 채널에서는 스텐 팬의 사용을 되려 말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유튜버가 사용하는 스텐 팬에는 알 수 없는 끌림이 있었다. 나중에 어머니와 통화할 때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어서 한때 프라이팬에 냄비까지 세트로 산 적이 있었다고 하셨다. 그저 장비병이라는 가정주부의 고질병이 도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구입한 것은 이케아의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으로, 처음 봤을 때는 그 찬란한 은빛 자태와 살짝 부담스러운 무게에 조금 주눅이 들기도 했었다.


스테인리스 팬의 사용은 그동안 내가 해왔던 요리에 중요한 것이 빠져있음을 알려주었다. 그것은 바로 불 조절. 지금까지 음식을 해오며 필요 없다고 생각해왔던 것이다. 특히 가뜩이나 화력이 약한 우리 아파트의 오래된 코일 전기레인지에서는 더더욱. 하지만 대충 센 불에 해도, 달궈지지 않은 채로 재료를 올려놔도 별 문제가 없던 코팅 팬과 달리 스텐 팬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섬세한 불 조절이 필수였다. 잘 달궈진 팬에 기름을 둘러야 하고, 그 기름의 온도가 적당해야 하며, 기름으로 잘 코팅이 되었다면 이번에는 식혀서 재료에 맞는 온도까지 식혀줘야 한다. 이 모든 작업이 경험에 의한 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안 그래도 자잘하게 할 일이 많은 주방에서 고작 이 프라이팬 하나에 많은 신경을 쏟아붓는 일은 놀랍게도 재미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요리를 하고 있구나라는 착각이 들만큼 즐거운 과정이었다. 그리고 무수한 실패 끝에 이따금 나온 성공작들은 그 모든 귀찮음을 충분히 감수할 만큼 만족스러웠다.


나는 음식을 어머니에게 배웠다. 내 나이 20대 중반, 허리 수술로 장기간 입원이 불가피해지신 어머니께서는 입원 전 손수 적은 자신의 레시피 노트를 내게 주셨다. 이거로 아버지 밥은 차려드리라고. 그때 보고 익힌 레시피는 이후 나의 음식들의 원천이 되었다. 오래전부터 사용해온 코팅 팬은 당연하게도 함께였다. 그리고 지금, 어머니에게 배운 적 없는 방법으로 스테인리스 팬을 달구며 생각해본다. 집을 떠난 지 수년이 지났건만, 나는 이제야 어머니의 레시피로부터 독립을 하는 것인가. 지금 나의 수첩에는 나만의 조리법이 애지중지 쓰여있다. 새로운 조리법들은 새로 산 스텐 팬에 새로운 흔적들을 남기며 조금씩 누렇게 색을 바라게 한다. 지금도 여전히 찬장 한편에는 오래된 코팅 팬이 자리하고 있지만, 별수 없이 뒷방으로 밀려난 그 모습에 문득 죄책감이 든다. 코팅 팬을 꺼내어 달걀이나 부쳐볼까 오래간만에 익숙함으로 손을 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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