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리원 Jul 20. 2024

00. 공기 위로(慰勞)

Prologue

가끔 나는 묻고 싶어 진다. 


아주 슬프고 힘든 날은 어떻게 하면 괜찮아질 수 있는지, 아니 괜찮아짐은 두고라도 휘몰아치는 이 감정을 진정시키고 나를 나로 다시 찾아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살아온 기억에는 그 답이 없다. 여전히 그런 날들이 올 때면 많이 아프고, 괴롭고, 슬프다. 인간으로서 부여받은 긍정적 감정과 세트로 묶인 당연한 부정적 감정이라서 무조건 견뎌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까지도 해보았다. 그래도 여전히 명쾌한 답은 없다. 또 내일이 아플지도 모르는데 해결 방법을 몰라 늘 무섭다. 


인간의 역사를 보면 질병과 싸워왔고, 수없이 지면서 안타까운 목숨을 잃은 과거가 있다.  지금은 약 몇 번이면 나을 간단한 병도 그 옛날에는 죽음의 병이었고, 그래서 너무나 많이 두려워했다. 더 가벼운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우리가 너무나 가까이 두고 먹는 토마토라는 과일도 다른 나라 어느 역사 안에서는 사탄의 열매로 여겨져 두려워했다고들 한다. 제대로 알지 못해서 우리는 그렇게 일부러 멀리 해왔다. 해결책을 찾지 못해서 그렇게 두려워해 왔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 저편, 그러니까 지금 내가 사는 세계에서는 더 이상 토마토를 멀리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녀석이 어떤 것인지 잘 아니까. 


그 역사 안에는 깨우친 자와 용감한 자와 현명한 자, 그리고 똑똑한 자들이 있었겠지? 그렇기에 과거의 그때보다는 현재는 이기는 싸움이 훨씬 더 많아진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이기기까지 긴 시간들이 필요했는데, 감정적 아픔을 다스리는 방법도 시간과 그 역사 안의 그들 같은 존재가 있다면 완전히 해결될 수 있을까? 아무렇지 않게 될 수 있을까? 물론 정신의학적으로 약의 힘을 빌어 신체적 안정감으로 유도는 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하지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사람이, 아니 멀리 확장하지 않고 내가 바로 내가 마음이 아플 때 그 순간에 나를 안심시키고 생각을 전환하고 평안에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다. 


" 나는 내가 아픈 게 참 슬프다."


그래서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걷다가 넘어져 다쳐도 곧 아물 것을 알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마음이 다치는 순간에도 그 대수롭지 않음을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오늘도 나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


깨우치지 못해서, 용감하지 못해서, 현명하지 못해서, 그리고 똑똑하지 못해서 이번 생에서는 내 문제를 해결해 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많이 실망스럽지만 이런 나의 역사 안에서도 가끔씩 일어나는 기적이 있는데 이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일어난다. 


" 나도 네 마음과 같은 날이 있었어! 나도 그렇게 속이 터질 것처럼 아프더니 지금은 괜찮아. 기억이 희미해져. 그때의 그 감정 말이야!"


나의 마음이 아주 아픈 어느 날 그렇게 친분이 많지 않던 누군가의 진심 어린 위로를 활자로 받은 적이 있다.  친한 사람들이 다독이던 그 위로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여겨서 오히려 일부러 흘러 보내던 시기였다. 자기 세상에 빠져 몽매하고 옹졸한 시간, 나의 그 어느 날은 그런 때였다. 그런 나에게 낯선 이라고 해도 될 만큼의 먼 사람의 위로가 머리보다는 소화기를 타고 내려가듯 분산되어 내 몸 전체에 흩어져 나갔다. 


그 순간을 설명하자면, 우습게도 빈속에 높은 도수의 술 한잔을 털어 넣었을 때의 그 느낌이랄까? 삼켜진 술이 내 몸을 통과하고 지나가는 자리가 느껴지며 찰나지만 이상하게 그 길에 집중하게 되는 순간이다. 곧 뜨겁게 차오르는 묵직함이 밀려오고, 약간은 쓰리지만 곧 위에 자리하는 순간 넓게 퍼져나가는 안정감에 알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승모근 잔뜩 올리던 어깨도 툭 떨어뜨리며 하늘보다는 바닥 쪽으로 내 몸을 더 당겨 늘어뜨리게 되는 수순을 밟는다. 온전히 내 몸에만 집중하던 그 시간이 지나고 주변이 보이기 시작한다. 누군가와 함께였던 자리라면 맞은편 사람에게 술을 한잔 권할 것이고, 혼자 인 자리라면 내 잔에 술을 한잔 더 따라 붓겠지. 그런 느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소위 우리가 자주 말하는 '공감'과 '위로'라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도 너와 같아!' 


주변의 사람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들도 겪는 그런 일들이구나! 특별한 게 아니구나! 그런 마음에 안심하고,


'기억이 희미해져'


그 말이 처방약 같아서 믿음이 갔다.

- 경험한 사람이 한 말이잖아. 괜찮아진다잖아. 


그제야 주변의 위로도 들리고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로하고 있었구나! 나의 일상을 다시 응원하는구나! 그 생각에 이상한 용기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 괜찮아지겠지. 희미해지겠지'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소용돌이치는 부정적 감정에 부딪쳤을 때 적어도 주저앉지는 않을 방법은 찾았다. 일으켜 세우거나, 걷거나, 뛰는 기적을 행사할 수는 없어도 그래도 포기는 하지 않는 방법이니 이 얼마나 대단한 깨우침인가!


이렇게 난 나의 역사를 바꿀 여러 조건 중 '깨우침' 아이템 하나를 장착하고, 추가로 용기도 함께 장착해보려 한다. 글을 통해 내 이야기를 쓰고, 또 때론 누군가의 이야기를 쓰면서 공감과 위로를 나눠 볼 용기 말이다. 이 결심에 가장 큰 견인은 시그널에 대한 인정에서 비롯된다. 


나의 이야기 속에 가장 중요한 전제가 생략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너와 나의 연결고리 양방향 신호를 알아채는 부분이다. 이것은 시간, 장소, 방법, 언어 등 여러 가지 요소를 포함한다. 나에게 맞는 그 순간 그것이 나에게 와닿아야만 알아챌 수 있는 시그널일 것이다. 여러 요소 중 하나라도 틀어져도 나에게 닿기란 실패다. 이처럼 일대일의 위로는 사실 하늘이 허락해야만 상호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일인지라 내가 선택한 방법은 최대한 많은 시그널을 보내는 것이다. 그것도 뭘로? 공기로!  공기처럼 확산된 위로(慰勞) 안에서 나의 시그널을 찾아 꽂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한다. 


전화가 아니어도 좋고, 편지가 아니어도 좋고, 댓글, 문자가 아니어도 좋다. 그냥 그렇게 공기로 전해지는 위로가 있다는 것을 믿으면 그 안에서 나와 같은 일은 하나는 있겠지라는 연대감이 생기지 않을까! 내가 느끼게 되는 수많은 감정들에서 함께 공감하고 위로하고 위로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극단적 슬픔, 괴로움이 아니라도 일상에서의 오묘한 감정들도 그냥 뱉어내다 보면 "나도 그랬어요!" 란 말에 괜히 하루가 재미있어지기도 할 것 같다. '공감=위로' 안에서 모두의 주변에 따스한 공기가 가득했으면 한다. 


나를 위로하고 너를 위로하고 우리를 위로하는 밤. 

위로의 공기를 퍼뜨려 봅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