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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원 Jul 29. 2024

02. 공기 위로(慰勞)_걱정인형

걱정 인형(Worry Dolls)

"어부어부 어부바~"
TV. 광고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다. 평생 행복으로 가는 내비게이션이 되어 주겠다는 금융 광고였다.

또 '걱정 인형'들이 사람들의 걱정을 대신 해결해 준다는 내용의 금융 광고도 있었다. 이런 콘셉트의 광고들이 나오는 건 세상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걱정들을 실시간 해결해 주는 누군가, 무엇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기대 때문에 나온 것이리라 예상된다. 하지만 내가 아닌 타인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걱정이란 것이 한정적이며, 대부분 유료다.(게다가 정기적, 장기적 납부를 요구한다.) 또한 약관을 잘 읽어 계약이 필요하다. (빠르게 읽어 내려가거나, 띄엄띄엄 읽거나, 글씨가 작다고 대충 훑으면 정작 나중에 필요한 보장을 못 받는 경우가 꼭 생긴다.)


나는 유난히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뭔가에 안절부절못하다기보다는  '나중에 이렇게 되면 어쩌지? 저러면 어쩌지?' 같은 미래형 걱정이 대부분이다. 지금이 괜찮다고 이 상황이 계속 유지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정신학적으로 나의 유년기, 성장기, 현재까지 이어온 삶에서 그 발생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이런 나를 난 부정 하거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래를 걱정을 하는 나의 정신세계가 내 삶을 방해하거나 문제를 일으키기보다는 오히려 나를 지키는 스킬로 장착되고, 정착되고, 진화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로써 지금의 나는 스스로 걱정 인형이 됨을 주저하지 않는다.  발생될 수 있는 사고, 사건을 예측하고 걱정하며 이를 해결할 최소한의 대비를 하는 것. 살아가는 동안 여러 학습을 통해서 조금 더 안정적으로 준비하게 되는 것. 그래서 현실에서 누리는 안정감이 행복임을 인지하고 사는 것. 그것이 내 삶의 방식이다.


 물론 굳이 발생되지도 않을 문제에 대해 과잉 걱정으로 현재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내 삶에 방식을 다른 누군가에게 강요하거나 설득하거나 답을 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랬듯 그들도 그들만의 환경에서 학습해 온 성장형 인간임을 너무나 인정하니까. 단지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나란 어떤 사람인가를 테어다운(Teardown) 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한 부분의 부품 같은 것으로 한 부분으로 전체를 설명하는 오류는 범하지 않을 생각이다.  


 단지 약간의 연민이 있다면 과거 어느 시점 어린 나에게 걱정 인형을 한 개쯤 잠자리에 놔주는 어른이 있었으면 조금은 더 긍정적인 사고를 더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부분이다. 무한히 의존하고, 무엇이든 해결해 줄 걱정 인형이란 것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너무 빨리 알아버렸던 어린 내가 조금은 마음이 쓰인다. 나 스스로가 걱정 인형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유년기는]

그리 유복하지도, 궁핍하지도 않은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 근로소득을 납부하는 부모님 아래서 특정 날짜를 기점으로 계획적 소비를 하는 일반룰 내에서 살아왔다. 그럼에도 엄마 말에 따르면 나는 집안 경제 상태에 대해 유난히 걱정이 많았다고 이야기하신다.


첫 번째로 일단 돈이 생기면 쓰지 않았다.


아이에게 발생되는 수입원이란 명절, 생일, 기타 친인척 만남 등에 따른 용돈이 그 출처다. 오빠는 받는 족족 문방구, 마트로 달려 나갔다. 내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오빠에게 나는 소위 '삥'을 뜯겼다.


  "오빠가 이걸로 더 재미있는 것을 보여줄게"라는 말을 믿고서 말이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단 사실을 다른 아이보다 빨리 깨닫게 하는 내 인생의 중요한 캐릭터다. 20살 어린 나이에 '나 혼자 산다'를 시작하면서도 어지간해서는 주변에 휩슬리지 않는 주체성은 완성형이었다.  또한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조심성은 어린 시절 수많은 경험으로 학습된 나의 중요 자산이 되어 있었다.


두 번째로 돈은 모으면 목돈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우체국에 계좌를 텄다. 제일 안전한 수단이었다. 그 당시에는 학교가 주체적으로 학생들에게 계좌 개설을 도와주고 정기적 저금을 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금융실명제 전이었으리라!)

 

100원이든, 1000원이든 정기적으로 넣으면 졸업할 때 꽤 큰돈을 손에 쥐는 성취를 맛보게 해주는 제도였던 것 같다. 내 계좌 내역이 학교, 선생님, 친구들에게 공개적 오픈되어 금융 보호란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지만 덕분에 돈이란 게 위탁을 통해 불려진다는 걸 알게 된 경험임은 맞다.


내가 조금만 더 똑똑한 경제관념이 있었다면 이 돈을 더 불렸을 텐데, 아쉽게도 난 안전/안정주의 파다.

(한마디로 겁이 많다.)  그리고 그 당시 이자율은 지금과 다르게 꽤 괜찮았다. 그리고 오빠와 부모님으로부터 내 돈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코 묻은 돈이라 비웃을지 몰라도 이후 이 돈은 내 대학 입학금 정도는 충분히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 당시 우리의 부모님은 '나중에 줄게' 라며 아주 정교하고 세밀하게 쪼개진 돈들을 생활에 많이들 보태 쓰셨을 것으로 예상된다. 모으면 큰돈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아이를 위해 미리 통장을 마련해 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을 것이다.


요즘이야 아이가 태어나면 청약 통장을 만들어서 20살까지 넣어주고, 아이 이름으로 주식 계좌도 만들어서 수익 발생에 대한 절세 방안도 미리 세워 주는 똑똑한 부모들이 많지만 말이다.

(나의 이야기는 1980~1999년 사이가 배경이었으니 세기의 변경을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할지도 모른다.)


내가 조금 유별나게 돈을 모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엄마의 기억을 잠시 빌어보자.

아버지는 오빠와 내가 어렸을 때까지는 외국으로 나가는 무역선에서 요리사로 일을 하셨다. 일 년의 대부분의 날들은 해외에서 보내셨고(정확히는 배 위), 한국에 돌아올 때면 몇 달 정도 계시다가 출항 일정에 따라 다시 배를 타시곤 하셨다.


때는 내가 5살 무렵, 아버지께서 몇 개월 집에 계시는 시기였다. 엄마는 밥을 하시려고 쌀통에 담긴 쌀을 내리는 아침이었다고 한다.

 ( '쌀을 내리다? 가 무슨 뜻이야' 여기서 사전 정보가 좀 필요한데, 80년대 초반에는 집집마다 쌀통이 있었다. 대부분 플라스틱 기둥모양의 정/직사각형 형태의 통으로 아래 2~3개 버튼을 누르게 되어있고, 그 아래 서랍이 있어서 버튼을 누르면 일정량의 쌀이 아래로 내려오는 아주 단순한 프로세스의 살림템이다. )


그런데 여러 번 버튼을 눌러도 쌀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통 자체를 흔들어 쌀통 벽면에 붙은 쌀알까지 내려보시려는 엄마를 내가 물끄러미 보고 있더란다.


 " 엄마! 쌀 없어?"


라고 묻는 아이 모습이 귀여워서 엄마는 놀려주려고 상황극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 리원아! 우리 쌀이 없어서 이제 밥 굶게 생겼어! " 라며 슬픈 표정을 지으셨다고 한다.


어린 나는 뭔가 결심한 듯 쪼르르 안방으로 달려가더니 문을 빼꼼 열고서 한 발은 거실, 한 발은 안방에 걸치고서는 아빠를  물 끄러니 바라만 보고 서 있더란다. 아빠는 왜 안 들어오고 그러고 있냐며 물으니, 어린 딸아이는 여간 잔망스럽지 않게 대답했다고 한다.

 

" 휴, 우리 쌀이 없어서 밥 굶겠네.!"


아빠는 처음에는 무슨 소린가 하시다가 엄마의 설명을 듣고서야 상황을 이해하시고는 허야 웃으셨다고 한다. 아빠가 집에 계시면 쌀이 없고, 밥을 굶게 된다는 상관관계를 도출했나 보다.

(사실 내가 어릴 때 식탐이 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굳이 얄밉게만 보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집안의 둘째 설움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생존 욕구라고 난 말하고 싶다.)


어린 딸의 말에 아빠는 머리를 한 대 맞은듯한 번쩍임을 느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결론적으로 아빠는 평소보다 짧게 가족과 지내다가 빠른 출항 스케줄 배로 조율해서 다시 일하러 가셨다고 한다. 꼭 그 이유였을지 지금은 여쭤볼 수도 없게 되었지만 어린 딸아이의 생계에 대한 걱정 어린 눈빛이 많이 무서우셨던 게 아닐까?


 아빠는 몇 년 후 가족이 같이 모여서 고향으로 가서 살고 싶다고 하셨고, 그래서 우리 가족은 아빠, 엄마의 고향으로 가서 정착하고 살게 되었다. 이후 아빠에게 생긴 생활 패턴이 하나 있으신데, 월급날이면 쌀을 한 포대 직접 사 오셔서는 꼭 내 방에 놔두고 가셨다. 이미 그때는 먹는 것에는 별 관심도 없는 사춘기 아이가 되어 있음에도 그  습관 같은 일은 계속하셨다.

사춘기 소녀 방에 쌀포대라니!!


미관을 해치는 흉물 같다고 여겨졌으나 그냥 나 역시도 그러려니 하고 내버려 두었다. 내가 대학을 가느라 집을 떠나 나오기 전까지 쭉.


생각해 보면 그때 아빠는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젊은 20대 후반이셨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되면서 생계를 위해 가족과 헤어져 타지 생활을 길게 시작하셨던 것이다. 어린 가장에게 너무 무거운 책임감이었을 것 같다. 예전에 나는, 부모면 당연히 어른이어야 하고,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 생계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40이 넘고 아이를 키우고 있음에도 여전히 어른은 언제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여전히 무섭고, 어렵고, 힘들고 걱정되는 삶인 것을. 이 나이가 돼서 아빠를 만난다면 조금은 더 이해해 드릴 수 있을 텐데, 너무 빨리 떠나셔서 아쉬움이 남는다. 무뚝뚝한 경상도 아빠와 애교 없는 경상도 딸이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기회가 된다면,  5살의 그때 나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다.


 " 쌀 없음 라면 먹지, 국수 먹지 뭐. 걱정 안 해도 돼.
아빠는 열심히 일하시다가 잠시 쉬시는 거니까 네가 자주, 꼭 안아 드려!"       


세 번째로, 주저앉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대안이 필요하다.


조금은 슬픈 유년기의 경험 때문이었는지 부모님에게,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려면 비상금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졸업까지 열심히 착실하게 돈을 모았다. 중간중간 장학금이며 백일장 등 상을 받으며 생긴 돈도 꽤 되었다. 가끔 엄마가 급전이 필요하실 때는 2부~5부까지도 이자를 매겨 빌려 줬다고 한다.(사실 난 그것까지는 잘 기억 안 나지만 엄마가 세상 무서운 돈이었다고, 사채보다 비싼 돈이라며 혀를 내두르셨다고 한다. 그래도 야무지게 돈 모으는 게 기특해서 일부러 더 이자를 쳐서 주시곤 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나의 유년기가 끝날 무렵 집안에 큰일이 생겼다. 오빠가 교통사고로 크게 다쳤다. 생사를 오갈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라 온 가족이 오빠에게 붙어 있어야 했다. 내가 고3이었고, 수능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다. 오빠도 걱정이었지만 내 인생도 너무 걱정되는 암흑의 순간이었다. 수술비며, 입원비며 계획 없이 돈이 들어갔고 보험 보상등의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장 중간정산 등 필요한 돈들이 생겼고, 내 오랜 준비금은 거절하지 못할 상황으로 그렇게 오빠를 위해 쓰였다.


대학 못 가는 거 아니냐고 울며 불며 주저앉는 딸에게 부모님은 무엇을 해주실 수 있었을까.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은 보낼 테니 걱정 말라던 부모님은 힘든 상황 속에서도 약속은 지키셨다. 아마 그 이후 몇 년은 우리 가족이 참 많이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그래도 다행히 오빠는 회복했고, 나는 대학을 잘 마쳤고 모두가 안정을 찾아갔다.


돈의 흐름을 따지자면 내 돈은 오빠를 위해 쓰였지만 결론적으로는 나를 위해 쓰였다.

나는 내 돈으로 대학을 갔지만 부모님의 희생으로 갈 수 있게 된 상황이 만들어졌다.

당당하게 독립을 외칠 수 있을 준비를 마친 나였지만 돈은 돌고 돌아 내 마음의 빚을 남겼다.


한 가지 위안을 삼자면 그래도 나를 위해 최소한의 준비를 해왔기 때문에 최악의 주저앉음을 피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이런 경험들로 나는 더더욱 나를 위한 경제적 준비를 꾸준히 해야 한다는 마음을 먹었다.


[20살이 지나면서]


대학을 가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려는 내게, 엄마는 그냥 그 시간에 공부를 하라셨다. 이어서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아르바이트 보단 장학금을 타는 게 집에 도움 된다는 뜻이었으리라. 덕분에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는 다닐 수 있었지만, 여전히 부모님께 경제적 의존도가 높다는 것이 날 계속 불안하게 했다. 대안 마련이 필요했다.


학부제였던 당시 2학년이 되면 전공을 선택해야 했는데, 나는 많은 여자동기들이 회피하던 식품공학을 선택했다. 그쪽 공부가 재미있기도 했고, 교수님 실험실에서 석, 박사 선배들 실험 및 논문을 도우면 얼마간의 용돈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당시 BK21 등 생명공학 관련 정부 사업등으로 연구비가 많이 투자되던 때였을 것이다. 선배들의 연구 실험 중 필요한 잡다한 여러 일들을 하면 해당 학부생도 연구비 사용 내역에 이름을 올리면서 예산 일부 혜택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한 시스템은 모르겠으나 용돈으로 사용 하긴 충분했다. 집에서도 일부 생활비를 주시고 계셨기에 이를 쪼개서 생활하며, 교수님이 주시는 연구 용돈은 적금을 넣었다.


이때의 목적은 대학원 또는 취업을 위한 금전적 준비였다. 4학년 때 뭔가 선택해야 했을 때 돈 때문에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시간이 흘러 4학년이 되었고 열심히 공부하고 실험실 생활을 한 탓에 대학원은 학비 무료로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생활비 지원은 또 몇 년 필요했기에 많은 고민에 빠졌던 때다. 공부는 더 하고 싶었고, 가능하다면 해외 대학과 연계된 곳으로 교환 학생으로 가고픈 욕심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는 내가 준비해 온 것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란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거의 포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일말의 혹시나 한 마음으로 부모님께 말씀드려 봤다. 역시, 내 인생의 반전은 없었다. 취업을 해서 경제적 활동을 스스로 했으면 좋겠다는 말이 돌아왔다. 내가 고등학교~대학교를 지나는 동안 IMF라는 국가부도사태가 있었다. 부모님도 여러 일 겪으시며 힘드셨던 거겠지. 안 밖으로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더는 때는 쓰지 않고 깔끔하게 포기했다.


이제 취업으로 방향으로 전환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교수님과 선배들의 걱정과 아쉬움을 뒤로하고 실험실을 나왔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취업공고 뜨는 정보를 열심히 들여다봤다. 누군가 알려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맨땅에 헤딩하듯 무조건 열심히 살아야 하는 순간이었다. 취준생 기간이 길어지면 안 되고, 당장 끊어진 용돈도 채워야 했다. 대학원 준비가 목표이다가 취업으로 바꾸니 자격증이며 기타 스펙도 부족하고 막막했다.


선배 한 사람이 OOO  회사에 공채 공고가 떴는데 오늘이 서류 접수 마감이라며 마음 있으면 써보라고 지나가듯 이야기를 건넨다. 이력서란 거 한번 경험이나 해보자는 심정으로 촉박한 마감시간 내 어떻게든 이력서를 제출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걸려온 전화 한 통.


 " 모리원님! OOO 회사 인사팀입니다. 이번 공채 모집 전형에 1차 서류 심사 합격하셨습니다. 기한 내 인/적성 검사 진행해 주시고 2차 실무진 면접 일정은 다시 공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접한 기쁜 소식에 이어 몰려드는 걱정에 식은땀이 났다. 면접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금 내가 여기서 뭘 준비해야 하는지......


 ' 면접 가려면 정장도 필요하고, 이것저것 돈 들 일도 많을 텐데.'

 

그간 준비해 둔 잔고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예상된 상황을 준비하는 데에는 스스로 해결이 될 듯했다. 아르바이트하는 가게에 사정 설명 드리며, 며칠 자리 비워도 되겠냐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젊은 시작을 응원해 주시는 인성 좋은 분이셨기에 한 달 치 월급을 그냥 채워 다 주시며 면접 잘 보고 오라셨다. 가능하면 한 번에 붙어서 다시 돌아오지 말라는 말까지 덤으로 하시면서 말이다. 사회에서 만난 고마운 은인 한분이었던 것으로 지금까지 기억한다.

(사장님! 건강하게 잘 계시죠? 편안한 행복과 건강을 늘 빕니다.)


2차 실무자 면접, 3차 대표 최종 면접까지 정신없이 치르고 최종 합격 발표를 받았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뭔가 쉽게 풀린 적이 있었을까? 오히려 이런 행운이 독이 될까 무서우면서도 오래지 않은 취준생 생활을 끝내서 너무나 다행이었다. 그렇게 사회인으로 세상에 나왔다.


[나는 회사원입니다.]


이제는 진짜 홀로서기 시작이다. 원래도 부모님께 손 내밀 형편이 안 되는 것을 알기에 홀로서기의 기반 다지기도 오로지 내 몫이다. 그래도 그동안 준비해 온 것도 있고, 연수 및 인턴과 같은 기간이 있었기에 회사 근처 집도 구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젠 진정한 한 인간으로서 나를 책임지며 살아가야 한다.


내가 맡은 일은 거창하면서도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리스크를 예방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식품에 있는 영양성분이나 원료들을 분석해 내는 일이었고, 연차가 쌓임에 따라 식품 내 유해물질 분석 및 사전 관리등으로 확대되었다. 2000년대 초반에 아직 식품 이슈나 리스크가 그렇게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때라 내 일이 큰 빛을 보진 못했다. 같이 입사한 동기들은 신제품 개발등 부서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내고 있었고 부러움으로 바라봐야 했다. 그런데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매체가 발달하고 소비자의 의식 수준도 올라가면서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유전자 재조합식품(GMO), 멜라민 분유, 쓰레기 만두 등 그 진위와는 상관없이 해당 카테고리로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을 불태웠다. 이제는 식품의 표시, 위생, 안전, 예방, HACCP, 법규 보장 등에 그 중요성이 넘어가면서 대기업들은 앞다투어 연구소 내 안전관리/사전 예방 부서등을 포함해서 연구 센터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부서가 대부분 신생이다 보니 내 업무 경력을 필요로 하는 회사가 많아졌다. 운이 좋게도 첫 회사에서 8년여 근무 후 경력 이직을 했다. 당시에는 경력 입사가 그리 많은 때가 아니라서 어디를 옮겨가더라도 텃세에 다들 한동안은 힘들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선택이 필요한 순간에는 생각보다 결정이 빨랐다.  


이직한 회사에서는 기존 업무에서 더 확장된 안전관리를 해야 했다. 이제는 국내 공장에 웬만한 회사들은 HACCP관리로 위생/안전은 체계화되었고, 작업자 의식 수준도 많이 올라와서 글로벌한 안전관리 인증으로 눈을 돌리던 시기였다. 예상되는 리스크를 분석하고 무엇을 보완하고 준비해야 할지 분석 보고 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업무였다. 알다시피 회사는 사고란 게 안 터지면 일을 안 하는 줄 알아서 말이 쉽지, 예방 관리 부서는 항상 회사에서 눈치 받는 부서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성과 인정도 낮고 말이다. 그래도 난 이 일이 좋았고 잘 맞다고 생각했다.


내가 뭔가 분석하고 대안을 준비해 두면 언제가 될지 모르나 당황하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될 테니 말이다. 유년기부터 내가 쭉 해오던 나의 인생처럼.


회사가 점점 커지고 해외 시장으로도 뻗어나가면서 해외 식품이슈, 법규 동향도 스스로 찾아서 정리해 보기 시작했다. 자료가 많으면 많을수록 정확한 데이터를 도출할 수 있으니까. 그러는 과정에서 스스로에게도 많은 공부가 되었고, 나도 모르게 많은 스킬들이 쌓였던 것 같다. 한 가지 아쉬운 건 그 당시에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니란 것이지.


나의 상사도 늘 내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붙이셨다.


" 너무 좋은 자료보고서인데 우선 당장 급한 거부터 하고 다시 한번 보죠!"


나는 추후 너무 중요한 문제가 될 거라 미리 준비해야 될 것 같은 것이라 강조해도 회사는 내 마음과 같지 않았다. 당연히 업무 평가도 중간정도? 상사가 원하는 것은 당장에 성과가 빵빵 드러나는 보고거리였다. 그런 업무에 특화된 직원들은 또 따로 있더라. 그들은 항상 인정을 받았다. 서운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의 페이스로 길게 내다 보고 천천히 준비해 두었다. 내가 나중에 없더라도 나의 결과물이 회사와 누군가에 도움이 되었음 하는 마음으로 임했다. (쓸데없는 인류애)


해당 부서에서 7년 정도 근무하다가 다른 부서로 옮기게 되었다. 내가 해오던 일에 업무 범위를 확장해서 일해줬으면 하는 요청이 있었다. 나의 의견에 귀 기울여 주고 중요하다는 예상 부분을 공감해 주는 새 부서였기에 옮겨서 일해보겠다고 받아들였다. 옮긴 부서에 적응하는 데는 2년은 걸린 듯하다. 내가 이곳에서 필요한 사람으로 아웃풋 할 것들을 열심히 찾고 있을 때쯤이었다. 이전 부서 팀장님과 동료에게서 잦은 연락이 왔다.


 " 예전에 몇 년 전에 ~ 내용의 분석한 거 기억나요? 자료 가지고 있나요? 좀 찾아 줄 수 있을까? 모 과장이 예상하고 우려했던 이슈들은 5년~10년을 내다봐야 하는 일이군요!! 이제 그것들이 이슈가 갑자기 많이 되는데 자료 찾기가 힘들어서요!"


당연히 자료들은 찾아서 다 넘겨줬다.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과 안도감을 느꼈다. 쓸모없는 일을 했던 게 아니었다는 인정을 받은 느낌이었다. 스스로 괜찮다 괜찮다 했어도 은연중 주눅이 많이 들었나 보다.  물론 미래를 내다보는 시야를 더 단축시킨다면 회사 입장에서는 너무나 더 훌륭한 직원이겠지만. 그래도 필요한 순간에 나의 결과물이 도움 되고, 회자되고, 보고 된다고 생각하니 위안이 된다. 물론 현재 해당 부서가 아니라 어떠한 성과가 나에게 오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그랬듯, 나는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냥 그런 사람이다.


그 후로도 난 내가 하는 일 안에서 리스크가 될 것들을 찾고, 대안을 만들고, 프로세스화 하는 일을 여전히 하고 있다. 물론 실시간 처리해야 하는 실무적인 일들을 하면서 말이다. 나의 다음 사람에게, 회사의 몇 년 후에 필요할지 모르는 그런 일들을 정례화해 두고 잘 사용될 수 있게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쌓인 경험치로 나는 걱정 인형을 면치 못한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눈에 보이는 리스크를 해결하지 않으면 조마조마하고 예상되는 문제를 미리 해결해두지 않으면 밤잠을 설치는 예민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런 내가 있어서 내 주변에는 많은 사고를 예방되었을 것이라 믿는다. 발생되지 않았기에 모르지만 난 그렇게 믿는다. (믿고 싶다.)


[나는 이제 엄마입니다.]


이제 장년층으로 넘어가는 나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경험한 많은 사례를 나누어 주는 일 일 것 같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후배들에게 그간의 경험과 자료를 아낌없이 공유하려 한다. 내가 쥐고 어딜 가겠냐!! 어차피 그 자료들이 필요할 때는 그들이 일할 미래니까.


집에서는 늘 그렇듯 나의 준비로 가족이 건강하고, 안전하고, 평온할 수 있기를 바라며 주변을 챙길 예정이다. 과거의 나는 너무 어린 나이에 혼자 고민을 떠안았지만 내 가족에게, 내 아이에게는 망설임 없이 걱정 인형이 되어주려 한다. 내가 너무나 잘해줄 수 있는 일이니까!  


* [8살 남자아이의 고민] 마스크를 벗기 무서워요.


" 엄마!! 나 마스크 안 하면 신경 쓰여. 친구들이 내 얼굴 보고 놀리면 어떡하지? 학교 가기 싫어. 잠을 못 잘 것 같아. "

 - 엄마가 살아보니까, 사람들은 생각보다 주변 사람에게 그렇게 관심 있지 않아! 내일 마스크를 안 쓰고 가도 아마 이야기 꺼내는 사람 없을걸! 있더라도 한두 명? 그냥 원래 안 쓰고 왔던 건가 보다라며 생각할 거야. 친구들 대부분 마스크를 다 벗었는데 네가 계속 마스크를 고집하고 쓰고 가면 그게 더 눈에 띄고 더 궁금해할 거야. 지금이 바로 자연스럽게 마스크를 벗을 때야!! 걱정 접수~ 내일 되면 해결될 테니 걱정 마!


(다음날 하교 후)

 " 엄마! 아무도 못 알 봐! 엄마 말이 맞았어! 에이 별거 아니었네"


가족에게만은 평생 무료로 별도의 계약 없이 제약 없이 걱정 인형을 자처합니다.!

여러분은 경험치 만렙 걱정 인형과 함께 하고 있으십니다.!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제 옆에서 편안하고 행복하세요.


* 걱정인형(Worry Dolls)
 : 과테말라에서 유래된 인형으로 '걱정일랑 내게 맡겨, 그리고 너는 잠이나 자'라고 속삭이는 인형.

  잠자리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어린아이에게 작은 천 가방 혹은 나무 상자에 6개 정도의 인형을 넣어 선물하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하루에 하나씩 인형을 꺼내서 걱정을 말하고 베개 밑에 넣어두면 부모는 베갯속의 걱정 인형을 치워 버린다.  그리고 아이에게 " 네 걱정은 인형이 가져갔단다"라고 말해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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