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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원 Aug 30. 2024

11. 공기 위로(慰勞)_가을, 시도 때도 없이

코스모스

계절은 시간을 붙잡고 기억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10월로 접어든 어느 날이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그 계절에 잡초풀들이 무성하게 자란 둑길을 조심스레 걷고 있다. 오늘은 아무래도 길을 잘못 선택한 것 같다.


' 이 길은 좀 무서운데. 어제 갔던 길로 갈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를 하고 뒤돌아보니 걸어온 길이 이미 꽤나 되어 되돌아가기는 뭔가 기운이 빠진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저 멀리 버스길이 보인다. 이 길 따라 쭉 가면 어떻게든 저 큰길은 나올 것이 확실하다. 다시 용기를 내어 무릎을 90도까지 들었다가 풀을 꾹꾹 눌러 밟으며 한발, 한발 나아간다.


 


10살.

전학을 왔다. 오전/오후반까지 나누어 등교하던 도시에서 한 학년이 2개반인 작은 시골 동네로.

친한 친구들과 헤어져 낯선 곳으로 떨어진 순간은 불혹이 넘은 나이에도 잊히지 않는다. 아이들은 금방 적응하고 잘 지낼 거라는 부모님의 안일한 생각이 있으셨겠지만, 사실, 전학이란 것이 나에게는 엄청난 트라우마로 남은 힘든 기억이다.


원래 다니던 학교에서는 가을 운동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친구들은 모두 운동장으로 나갔고 나는 혼자 교실에 남았다. 전학을 가는 나는 굳이 운동회 연습에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소외되는 외로움을 느끼고 당시 그 감정이 무엇인지 몰라서 한없이 불안했던 것 같다. 창 밖으로 친구들이 한창 연습 중인 부채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어린 나의 뒷모습을 또 바라보는 내가 있는 그 시간, 그 장면으로 가끔 소환된다.


엄마는 성실한 삶을 강조하셔서 엄마의 사전에 결석이란 인정할 수 없다. 아파도 학교 등교는 해야 했고, 정말 아프면 차라리 조퇴를 하라고 가르치셨다. 전학 일정인들 달랐을까.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나만 먼저 이곳으로 보내졌다. 이곳은 아빠의 고향이다. 그래서 할머니를 비롯해서 친가 친척분들이 한집 걸러 한집에 살고 계신다. 우선 사촌들이 많은 고모집에서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 첫 등교를 했다. 내가 학교를 끝난 뒤면 부모님의 이사가 마쳐서 다시 가족 상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학 온 학교는 이상하다.

아이들도 이상하다.

학교 정문에서 교무실까지 몇 걸음 걷지 않은 것 같다.

 

'원래 학교는 교실까지 한참 걸었는데, 여기는 왜 이렇게 조그만한거야! 휴.'


고모가 교무실에서 전학에 필요한 절차를 밟을 동안 교무실 밖에 혼자 서 있었다.

아직 수업이 시작되기 전이라 온 학교가 부산스럽다. 그러다가 몇몇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고 지나가더니 이내 곧 수많은 아이들이 내가 있는 곳으로 몰려나오기 시작한다. 계단 위에도 서있고, 교실 창문 밖으로 내다보는 아이들도 있다. 학년들은 다양해 보였다. 아마 전교생이 다 나온 것 같다. 곧 그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귀에 들려온다.


" 전학 왔는갑네"

" 어디서 왔노!"

" 몇 학년이고!"

" 몇 반으로 올란가!"


너무 많은 아이들에 둘러싸여서 그 순간이 너무 무서웠다. 이내 곧 또래 여자아이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 뭔데~ 저아 원피스도 입고 구두도 신었다. 원래 저래 입고 학교 다니는기가!. 무슨 지가 공주인 줄 아나."

" 아이고 불편해라. 저라고 어찌 노노. 고무줄도 못하긋다"

" 머리 땋은 거 봤나! 어찌 땋은 기고!"

" 저 가방은 처음 보는 긴데."

" 집이 어디라 카데?"

......


웅성거림이 끝이 없다. 아이들의 말 하나하나에 내 모습을 살펴보게 된다. 그동안 나에게 일상이던 모습들이 여기 아이들에게는 다 특별한, 아니 이상하게 보이고 있다니. 뭔가 놀림감이 되고 있다는 생각에 한없이 주눅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모여있는 아이들 중에는 단 한 명도 치마를 입거나 구두를 신은 아이는 없었다. 누구 하나 튀어 보이지 않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 속에서 나는 너무 툭 튀어나온 사람 같았다. 어서 빨리 이 옷도, 구두도 갈아입고 싶어 진다. 저 무리 속에 숨어 들어가도 모르게.


그렇게 혼자 우두커니 서서 있는 나를 바라보는 나의 뒷모습의 장면으로 소환된다.



전학 온 지 며칠이 지났는데,

아직 딱히 친구를 사귀진 못했다. 붙임성 있게 아무에게나 다가갈 성격도 못되고, 성숙되지 못한 어린 마음에 이곳 친구들은 뭔가 나와 맞지 않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딱히 친구를 사귀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물론 이곳 아이들도 아직은 나를 살펴보기만 하는 시간들이었다.


내가 입는 옷, 말투, 쓰는 학용품 모든 것이 아이들에게는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그것도 나에게 들리도록 말이다. 쉬는 시간이면 혼자 책상에 앉아있는데 무리, 무리의 아이들이 주변에 자리하고 그 아이들의 수군거림이 그대로 다 들려온다. 애써 못 들은 채 하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우리 집은 학교에서 거리가 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10살짜리 아이 혼자 등하교 보낼 거리는 절대 아니다 싶으나 그때는, 그 시절에는, 그 마을에서는 특이한 일도 아니었나 보다. 며칠 학교를 다녀보니,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크게 4가지 길이 있었다. 누가 가르쳐 준 것은 아니지만 바닷가 시골동네다 보니 목적지가 어딜 가든 보이긴 했다. 그래서 갈 길을 쉽게 정할 수 있었다. 물론 다니라고 한 큰길을 알려주셨지만, 그 길은 아이들이 너무 많았다. 하교하면서까지 그 아이들 틈에서 외로이 걸어가고 싶진 않아서 애써 아이들이 없는 길들을 찾아다녔다.


[1번 길]

잘 포장된 도로로 버스 노선이다. 버스를 타고 가면  집까지 4 정거장정도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버스가 자주 다니지도 않고, 굳이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에 걸어가면 도착할 것 같았다. 버스를 타지 않더라도 버스길로 걸어가면 탁 트인 도로와 길 옆으로 논/밭들이 펼쳐져서 딱히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오픈된 이 길이 당시 나에게는 단점이 되었다.


[2번 길]

1번 길 옆으로 넓은 논이 지나고 생뚱맞게 중간에 산이라 부르기는 어려움이 있는 언덕이 떡하니 있다. 언덕이라고 하기도 그런 것이 높이가 그리 있는 것은 아니고 대나무 숲이 빼곡히 들어선 논 사이 숲섬?이라고 해야 하나. 그 숲 앞뒤로 길이 2개 생겨 있다. 그 2개 중 1번 길을 따라 생긴 좁은 둑길이다. 사람과 오토바이정도 지나갈 수 있으려나! 이 길은 버스를 포기하고 걸을 때 사용했다. 그런데 이 길도 단점이 있다.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나게되는데, 그 앞에 낡은 창고가 하나 있었다. 농기구들이 들어 있을 텐데, 자세히 본 적은 사실 없다. 어림짐작이나, 그 앞에 돌무덤같이 쌓아둔 것이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그 돌무덤이 애기무덤이라 비 오는 날이면 아이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물론 사실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 당시에는 지나갈 때마다 그 말이 떠올라서 어지간하면 그 길은 피했다.


[3번 길]

2번 숲길의 반대쪽 너머 길이다. 이 길로 들어서려면 동네의 몇몇 집들을 지나치면서 중심을 뚫고 들어와야 한다. 그 과정에서 동네 아이들과 많이 마주치게 된다. 불편하다. 그래도 일단 숲길에 들어서면 이곳이 제일 좋다. 일단, 왼쪽으로 숲섬이 있어서 적당한 그늘이 생겨있다. 시원한 바람도 불고 사람들이 주로 다니는 대로가 보이지 않아서 조용하다. 포장도로는 아니지만 길 자체는 넓어서 경운기가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다. 땅도 단단하게 다져져 딛고 걷는데 어려움이 없다. 오른쪽으로는 논뷰와 마을뷰가 펼쳐지고 정면에는 바다가 보인다. 저 멀리 집도 보인다. 안심하고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보통은 이 길을 이용한다.


[4번 길]

3번 길로 다니다가 오른쪽을 바라보면 아주 좁은 둑길로 오토바이 한 대가 웅~하고 지나가는 게 보인다. 얼핏 보면 논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는 것으로도 보이는데, 우체부 아저씨다. (여담이지만 이분은 우리 삼촌이다.)


언젠가 학교가 끝나고 터벅터벅 나오는데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봤더니 삼촌이었다. 우편배달 중이었던 삼촌은 전학 온 내가 마음에 걸려 잠시 시간 맞춰 학교 앞에 들렸던 것이다. 삼촌은 동네 아이들에게는 인기인이었다. 젊고, 유쾌하고, 아이들이랑 잘 놀아주던 재미있는 우체부 삼촌이었다. 삼촌이 나를 부르자 또 온 동네 아이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봤다.


'뭐고! 자는 우체부 삼촌이랑 무슨 사이고!'


라고들 했을 것이다. 안 들어도 안다.


삼촌은 학교 앞 문방구로 날 끌고 가서 먹고 싶은 것을 고르라고 한다. 딱히 고르지 못하고 삐쭉삐쭉 서있으니 삼촌이 몇 개 집어서 계산하고 온다. 문방구 아줌마는 낯선 아이에게 과자를 사주는 삼촌에게 모두가 궁금해하는 것을 묻는다.


"삼촌! (손위 여자 어른들이 손아래 남자분들에게 이런 호칭들을 많이 쓰시던 것 같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자는 못 보던 안데 누굽니까!"


" 야는 제 조캅니다. 둘째 형님 아~라예. 이번에 행님네가 다 이사 와서 이제 여서 살끼라예. 오다가다 야 보이면 잘 좀 챙겨주이소."


" 맞나! 그라고 보니 닮은 것도 같고. 그래 알았다. 몇 학년이고!"


"3학년이에요." 어른 물음에 어쩔 수 없이 입을 떼어 본다.


"아이고, 울 아랑 동갑이네. 니 은정이 아나! 친하게 지내면 되겠다. 다음에 같이 놀러 온나 "


"네."

(사실 졸업할 때까지도 난 은정이랑 별로 친해지진 않았다.)


" 삼촌이 그쪽 배달이 있다. 내가 집까지 태워주끄마. 타라!"


그렇게 삼촌 배달 오토바이에 올라타서 그 4번 길을 달렸다. 그렇게 경험을 한번 한 후 혼자 그 길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한발, 한발 꾹꾹.  4번 길은 사실 걸어 다니기 좋은 길은 아니다. 우체국 앞에서 시작되는 길이라 엄마 심부름으로 삼촌을 보러 가거나, 3번 길이 싫증이 날 때 가끔 들렀다.




그렇게 4가지 길은 결국 하나의 길과 합쳐진다. 해안도로가 시작되는 길에서 만난 이 길 초입에는 코스코스가 길 옆으로 쭉 줄지어 핀다. 어릴 때도 난 꽃이 참 좋았다. 이 길에 들어설 때면 기분이 좋아졌다. 여기로 이사 와서 나를 반기는 단 한 가지의 것이란 느낌까지 들었다.


모든 꽃들이 그러하겠지만 코스모스도 꽃이 피기 전 꽃봉오리가 공처럼 부푼다. 멀리서 보면 줄기잎의 색과 같아서 피기 전에는 봉우리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가까이 살펴보면 한 줄기에 여러 개 봉우리가 작게 작게 들어앉았다. 볼을 가까이 대고 봉우리를 두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면 '톡' 하고 물이 나온다. 그게 뭐라고 놀이처럼 톡톡 터트려보며 걷는다.(커서 생각한 건데, 그렇게 고의적으로 터트리면 꽃이 피는데 피해를 준 게 아닐까라는 미안함이 있다. 아직 답은 찾지 못했는데 궤도님에게라도 물어봐야 할까? ) 그래도 불안하고, 외롭던 나의 시간을 잊게 해 주는 하루에 몇 분 안 되는 평온함의 시간이다.


그렇게 또 코스코스 꽃봉오리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있는 어린 나를 바라보는 나의 뒷모습 장면으로 잠시 멈춤이다.



현재.

8월의 무더운 여름날 주말 아침(아니 남들에게는 새벽). 언제나처럼 아침형 인간 집단 우리는 집 앞 산책을 나갔다. 며칠 동안 너무 더워서 낮에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새벽 출근길 아침 공기가 조금 달라졌던 기억에 한번 나와본다. 선선한 바람도 불고 잠시 걸을만할듯하다. 큰 남자와 아이손 하나씩 나누어 잡고 천천히 걸었다. 산책길로 들어서자 아이는 역시나 앞으로 뛰쳐 내달린다. 그 뒤를 큰 남자가 따라 뛰고 나는 뒷짐 지고 천천히 보폭을 옮기며 그들이 지나간 자리를 걷는다.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펴보다가 코스모스 3줄기를 만났다!


아! 코스모스!


순간 10살로 내가 저장해 둔 그 시간으로 소환된다. 사실 그 기억은 나에게 딱히 떠올리고 싶지 않은 시간들이나 그나마 클로징은 코스모스라 조금 위안이 되는 기억이다. 그런데 이내 든 생각이,


" 벌써?"


처서도 지나지 않았는데 코스모스라니. 정말 시도 때도 없이 피는구나!

나의 소환된 계절은 10월 가을인데 8월 한여름의 코스모스와 부딪치면서 뭔가 기억의 오류를 일으킨다. 잠깐 이런저런 꼬리를 무는 생각에 집중하다가 아이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돌아온다. 너무 거리가 벌어져서 빨리 오라는 손짓을 한다. 잠깐 꽃봉오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가 이내 그냥 놔준다.


나에게 계절은 계절 나름대로 가지는 추억의 힘이 있다. 때론 그것이 슬프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지만 또 때론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도 많다. 그래서 그 소환에 임하고 현실로 돌아올 때면 열심히 잘 이겨내고 살아온 나를 토닥이며 칭찬할 때가 많다. 그런데 그런 나의 계절의 힘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 같다. 계절이 사라져 가는 바람에 너무나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와서 그 특별함이 더 이상 특별해지지 않게 된 것이다.


물론 아픈 기억은 그 힘을 잃어서 좋지 않냐고 하겠지만, 그 아픔도  '나'이지 않은가!

나를 돌아보는 기억이 사라져 가면서 왠지 나도 조금씩 잃어버리는 것 같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나에게 있어서 가을이라는 계절은 가장 먼저 사라져 가는 아쉬운 계절이 되어간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 고마우면서도 그래서 특별함을 잃어가고 점점 잊혀가는 계절. 이렇게 기억을 글로 남겨 붙잡아도 보지만 이 또한 완전하지 않음을 안다. 나의 아이에게도 계절의 힘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은데......


가을을 걱정하는 한 여름 새벽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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