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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원 Sep 02. 2024

12. 공기 위로(慰勞)_겨울, 황진이에게 대여 드림.

기억 영상 삭제

동짓날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봄바람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정든 임 오신 날 밤이거든 굽이굽이 펴리라  - 황진이


나의 겨울은 황진이 언니에게 장기 대여를 해드린 모양이다.




나는 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나 물건, 사건등을 접할 때면 기억버튼을 누른 것처럼 어느 순간으로 끌려들어 가서 자체적 영상을 재생시킨다. 아프기도, 행복하기도, 슬프기도, 즐겁기도, 화가 나기도 한 그 영상들은 나와 참 많이 닮아서 내 몸 곳곳에 카테고리별로 너무 잘 정리되어 있나 보다. 그래서 지체 없이 혼선 없이 재생되곤 한다. 글을 쓰고 싶은 사람에게 있어 이 능력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내가 꼭 신이 된 것 마냥 상황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경험을 하다 보니 나의 마음도 그곳에 다른 이의 마음도 자꾸만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된 또 다른 능력은 똑같은 장면이 재생이 되어도 해석이 달라지고 있는 부분이다. 20살의 나는 아무리 애써도 이해가 되지 않던 누군가의 말과 행동이  40에 내가 재생하니 휴먼드라마가 되어 있을 때가 있다. 때론 주인공이 내가 아니고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이 되기도 하면서, 그의 인생 서사를 이해하는 과정을 겪곤 한다. 그렇게 아픈 기억은 아프지 않은 기억으로 장르 변경을 하기도 한다.


이런 나에게 겨울이 던져졌을 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겨울은 장면은 있는데 이야기가 없다. 재생할 영상이 없단다. 아주 오랜만에 조금 당황스러운 경험을 했다. 정말 나에게 겨울 이야기는 없나??



어린 시절) 따뜻한 남쪽 섬에서는 눈 구경이 어렵다. 20살이 되기까지 눈은 3번 정도 봤으려나! 물론 하늘에서 재처럼 휘날리는 눈은 더 있었지만 땅에 내려앉아 자리를 잡을 만한 호기로운 녀석을 만난 것은 정말 몇 안된다. 날씨 자체가 온화하다 보니 겨울도 그렇게 추웠나? 떠올려도 잘 기억이 안 난다. 바람이 많이 분 날들이 꼬리를 물긴 하는데 그건 겨울이 아니더라도 바닷가는 바람이 늘 많으니까!


 " 춥다! 호!"


이런 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없다.


20대) 바보스럽게도 늦게 공부 욕심이 나서 아침부터 밤까지 학교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둘러봐도 실험 가운을 입은 선후배들 밖이라 그 안에 반팔을 입었는지 니트를 입었는지 계절을 느낄 단서가 없다. 공백 없이 취업도 하는 바람에 그 맘때 사회 초년생들이 다 그러했듯 새벽같이 출근해서 야근을 하거나 1차, 2차, 3차 원하지도 않는 회식에 자리를 지키다 한밤중에게 기어들어가는 날들의 연속을 보냈다. 여기에도 계절의 단서가 안 보인다.


그러다가 문득 든 생각인데 이 시기에는 기억의 파편들이 있고 영상이 별로 없다. 떠올라도 왜였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오히려 어린 시절의 영상 기억은 생생한데 젊디 젊은 나의 20은 왜 이렇게 흐리고 뿌옇지? 곳곳에 잘려나간 듯, 퍼즐 조각들이 사라진 퍼즐판 같기도 하다. 많이 아프고 힘든 시기여서 자체적 기억 삭제를 한 걸까?


30대) 스노보드를 좀 탔지! 아마!

다시 꼬리를 물어본다. 슬로프에서 구르는 나, 하얀 눈에서 어설프게 폼 잡고 내려오는 나, 장면이 있는데 또 그게 다다. 고향과 다르게 이곳은 눈도 많이 오고 많이 봤을 텐데 그와 관련된 기억도 없다. 결혼을 했고 아이가 생겼고 많은 여행을 했다. 아! 스위스 융프라우도 갔는데! 재생 버튼이 드는 장면이 없다.


40대) 12월 어느 날 무안에 갔다가 예보에 없던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어려움이 있었지만 너무 재미있었던 여행도 있었는데, 이것도 여기까지. 작년 겨울은 너무 추웠는데, 한 달간 발리를 갔었지, 따뜻했지. 끝. 소처럼 되새김질을 해대도 건질만한 것이 없다.


이 정도 되면 드는 생각이,

'혹시, 누가 내 겨울 기억을  훔쳐 간 게 아닐까!!'


조선시대 황진이 언니까지 소환해 가며 이유를 찾아본다. 언니의 연애사를 위해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내 겨울 시간까지 장기 대여해드렸나 싶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외롭고, 아프고, 무서운 기억들이 있었는데, 재생을 수없이 당하다가 장르 변경을 넘어서 그냥 수많은 포스터로만 쌓여 있게 된 것이 아닐까라는 추론도 해본다. 애써 떠오르지 않는 것들은 또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이러다가 또 어느 날, 어떤 무언가로 인해 나의 과거 겨울을 만나게 되면 꼭 다시 글을 쓰겠다 마음을 먹었다. 하긴, 오늘도 나중에 그 어느 날에는 과거가 되는 시간이겠구나! 곧장 별 의미 없는 다짐임을 인지하고 웃음이 피식 난다.


이렇게 나의 겨울 찾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늦은 퇴근길 버스를 내려 한적한 길을 걸어가는데 어두 컴컴한 길 한쪽에 빛이 나오는 천막이 보인다.

"잉어빵"


참고로 지금은 덥디 더운 8월 말이다.

잉어빵, 국화빵, 붕어빵은 겨울 거 아냐!!!???


그러고 보니 편의점에서는 12달 내내 군고구마를 팔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배신감은 뭐지?


나만 겨울을 잃어버린 건 아닌가 보네.

우리가 계절을 잃어버리는 이유가 지구가 아프기만 해서는 아닌 듯하다.


어쩌면 계절도 내 기억의 경계도 세상의 이치처럼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오늘의 기억을 흘려보내지 말고 붙잡아 글을 써야겠다는 의무감 한 스푼이 더해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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