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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원 Aug 26. 2024

10. 공기 위로(慰勞)_여름, 복숭아의 저주

여름, 복숭아의 저주

Episode 1.


아침에는 무섭도록 비가 쏟아져 내리더니, 점심시간 무렵에는 햇빛이 쏟아져 내린다. 점심을 먹으러 나갈 때 보았던 젖은 바닥은 돌아올 무렵에는 이미 바짝 말라있다. 미처 다 마르지 못한 물웅덩이가 생긴 길을 지날 때면 습한 기운이 온몸을 타고 오른다. 얼른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진 곳으로 들어가고 싶어 진다. 사무실은 높은 인구밀도 때문인지, 세팅 온도가 문제인지 도통 시원함을 느끼기가 어렵다. 주저주저하다가 시원한 커피라도 한잔 사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에 발길을 돌려 카페로 향한다.


몇 걸음 지났을까! 코 끝에서 향긋한 냄새가 차 오른다. 비릿하고 찝찝한 냄새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것은 향긋함이 맞다. 주변을 두리번거려보니 생각지도 못한 곳에 과일 가게가 있었다. 이렇게 많이 오갔는데 여기에 과일 가게가 있었던가! 걸음을 멈추고 진열된 예쁜 과일들의 이름을 불러본다.(물론 마음속으로)

 

' 수박이네! 검은 줄이 선명하고 일정한 게 꼭지도 실한 게 맛있겠네. '

' 참외도 있었구나! 가름줄이 명확하고, 배꼽도 작네. 달겠다!!'

' 토마토도 여름까지 쭉 나오나 보다. 우리 집에 토마토 대장이 둘이나 살지'

' 체리는 여전히 비싸네. 미국이 수확철이 지났을 텐데 그럼 좀 더 내려야 하지 않나?'

' 어, 어, 어, 복숭아네......'


그렇게 복숭아를 한참 바라보다가 시무룩해져서 가던 길을 다시 걸었다.




Episode 2.


결혼한 지 3개월 경과 어느 여름날.


" 그릇은 그냥 다 싱크대에 넣어만 둬라. 아빠가 나중에 하실 거다! 과일 사다 둔 거랑 차나 마시자! "


주말 시댁에서 함께 점심을 먹고 난 후 설거지를 하려는 나를 막고서 어머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시댁에서의 설거지는 며느리가 하는 일이 아닌 걸로 규정하신 듯하다. 여담이지만 결혼 10년이 넘도록 시댁서 설거지를 한 기억은 손가락 2,3개 접을 정도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다 가정적인 아버님과 똑 닮은 남편 덕분에 나의 주방 생활은 아주 편안하다.


다시, 이제 과일과 차를 마실 시간으로 돌아가본다.

과일을 다용도실에 두셨다셔서 과일 찾아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던 나.


' 어, 어, 어, 복숭아네......'


상자에 들어앉아 있는 상처 하나 없이 예쁜 복숭아들 앞에 쪼그려서 한참을 바라봤다. 며느리 주려고 아마 또 제일 좋을걸로만 사다 놓으신 듯하다. 주저주저하다가 박스를 덥고 있는 얇은 셀로판 포장을 살짝 들어 올려본다. 꼭 잡지 않은 탓인지 이내 툭하고 박스 위로 다시 닫혀 버린다. 그 순간 얇고 작고 반짝이는 것들이 공기 중에  떠다니는 게 보인다.


' 어쩌지......'


"리원아! 어딨어! 뭐 해?"


나를 찾는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크게 한숨 한번 쉬고는 양손에 복숭아 하나씩 호기 있게 잡아서 꺼내 들고 나온다. 싱크대에서 빡빡 문질러 닦아 씻고는 잘 깎아서 일정한 크기로 또 잘 잘라서 부모님께 내어드렸다. 도란도란 둘러앉아서 차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식탁 밑에 내 손만 빼고.

 '벅벅, 박박, 벅벅, 박박'




Episode 3.


결혼 3년 차.


" 복숭아가 벌써 나왔더라. 오다 사 왔어"

 

" 내가 만지지도 못하는데 뭐 하러 샀어."


" 못 만져도 제일 좋아하는 게 복숭아면서. 내가 깎아줄게. 넌 먹기만 해!"




Episode 4.


결혼 8년 차


" 여보! 딱복이다! 세일하나 봐! 좀 사가자!"


남편.

" 통조림은 관심 없어? "




Episode 5. (with 작은 남자)


결혼 10년 차


" 간식은 뭘로 줄까? "


" 엄마! 난 복숭아 줘!"


고무장갑 끼고, 그 위에 위생장갑 끼고 외친다


" 매쓰!!"




Episode 6. (with 큰 남자)


" 새싹이는 나처럼 복숭아 털 알레르기가 없어서 다행이다 그렇지? "


" 너도 처음에는 안 그랬다며"


" 그랬지, 알레르기 같은 게 없었는데, 결혼 전에 한참 아프고는 이런저런 증세들이 생겨났지. 게도 삶은 건 괜찮은데 게장 같은 거 먹으면 등에만 알레르기가 나기도 했어! 진짜 웃기지!"


" 나도 뭐 갑자기 새우 알레르기 생겼는데 뭐."


" 근데 말이야. 너무 슬픈 건 게는 안 먹어도 그만인데, 복숭아는 나의 최애 과일이야. 그것도 딱복은 여름 한철 중에도 딱 거의 한 달 정도만 제대로 된 게 나오는데, 그때 그걸 못 먹으면 뭔가 서러운 마음이 든단 말이지"


" 말만 해. 내가 깎아줄게!"


" 언제는 통조림으로 최애 바꾸라며!!"


" 장난이지. 진짜 농담이야 알지? 너는 뭐든 네가 다 잘하잖아. 부탁도 잘 안 하고. 네가 전부 다 하려 하고. 네가 할 수 없는 것도 있어야 내가 잘난 척 좀 하지. 이거라도 좀 하자~"




Epilog.


나에게 복숭아는 저주 같다. 찾지 않고, 잊어버리면 되는데, 늘 이 계절이면 나를 또 괴롭힌다. 그 향긋함을 무기 삼아 내 발을 붙잡고는 결국 어떤 식으로는 내 곁에 오곤 한다. 이까짓것 과일 하나 평생 안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굳이 애써 이렇게 매달릴게 뭐람. 아니다 싶은 것은 심하리 만큼 냉정하게 잘 끊어내면서 이 털복숭이 과일은 결국 아직도 끊어내지를 못했다. 아플 것을 알면서도 그 유혹을 참지 못하고 담아 오고, 담아 와서는 또 먹을 일을 고민하고, 결국 남의 손을 빌어야 먹을 수 있는 과일.


복숭아를 보면 여전히 아프다. 마음이 아픈 것도 같고, 손이 아플 것도 같고. 그런데도 복숭아가 좋다. 맛있다. 먹고 나면 행복하다. 정말 골치 아픈 과일 아니던가! 그렇게 나는 올해 여름도 어김없이 복숭아와 소리 없는 전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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