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어린 쑥이 날 때면
1986.
이맘때가 되면 겨울이 겨울인지도 봄이 봄인지도 모르는 어린 딸을 데리고 바구니 하나, 작은 과도 하나, 정체 모를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밖을 나선다.
빼곡히 붙어 지어진 집들 사이라 햇빛도 지나쳐버리는 골목을 한참 지나다 보면 뻥 뚫리듯 하늘이 드러나고 개발의 경계선에 들어서게 된다. 꼭 성벽을 나온 것과 같이 안과 밖은 다른 세상 같다.
울퉁불퉁 정리도 안된 시멘트 바닥이 끝나고 흙을 처음 밟을 때면 푹신푹신하게 신발 바닥을 들어주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조금 더 걷다 보면 작은 언덕들이 펼쳐지고, 그 언덕들마다 초록초록 잎들이 한창이다.
민들레, 냉이, 쑥, 머위, 씀바귀……
어린 딸은 엄마 치맛자락을 꼭 움켜쥐고 곧잘 여기까지 따라왔다. 엄마가 들고 온 물건들을 주변에 내려놓자 딸아이는 그제야 움켜쥔 손을 풀고 멀지 않은 주변을 탐색한다. 그 사이 엄마의 손은 쉴 틈 없이 바삐 움직인다. 잠시 숨 고르며 쉬어도 될 텐데 누가 시켜서 하는 것 마냥 빈틈이 없다.
어린 딸은 민들레홀씨도 불어대고, 토끼풀도 찾아다니며 사부작사부작 거린다. 가끔 엄마가 있는 자리를 확인하는 것도 빼먹지 않는다. 이 모든 일들이 익숙한 마냥 서로 말이 없이 그렇게 봄 햇살을 가득 맞고 있다.
엄마는 몇 번의 자리 이동만 있었을 뿐 여전히 쭈그려 앉아 땅에다 과도 끝만 쑥쑥 찔러 넣고 있다. 그렇게 땅에서 바구니로, 바구니에서 비닐봉지로 옮겨간 봄은 풍년이다. 볼록하게 가득 차 묶인 비닐 모둠이 멀리서 보니 할머니댁에 있던 커다란 솥뚜껑 만하게 보인다.
엄마가 딸아이 이름을 부른다. 이곳에 와서 처음 들리는 말소리다. 전력을 다해 아이는 달려오고, 그 사이 엄마는 또 다른 비닐에서 우유와 빵을 꺼내어 준비한다. 어린 딸은 낮은 언덕도 쉽지가 않은지 한 발 한 발 오를 때마다 양손으로 무릎까지 꾹꾹 눌러가며 엄마에게 돌아간다. 엄마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이가 도착하자 우유팩을 열어 건넨다. 아이가 자리에 앉자 빵을 건넨다.
딸아이는 생각한다.
‘오늘은 술빵이네. 맛있겠다’
간식은 때에 따라 변한다. 집 앞 가게에서 산 보름달 같은 봉지빵이었다가 삶은 계란이기도 한다. 고구마 말린 게 나올 때도 있고, 밥이랑 반찬이 나오기도 한다.
음료는 우유, 요구르트, 식혜, 보리차 정도로 바뀐다.
딸아이는 그래도 이 술빵을 제일 좋아한다. 베어 물면 폭신폭신하게 씹히고, 쫄깃하면서도 달달하다. 모양도 부채모양이라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술빵에서 나는 그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이상하게 좋았다. 그 냄새가 집에서 날 때면 괜히 설렌다.
그렇게 간식인지 점심인지를 먹고 나면 엄마는 다시 땅을 콕콕 찌르고 딸아이는 슬슬 지루한지 엄마 곁을 맴돈다. 그럼 엄마는 숟가락을 딸아이에게 건네주면서 쑥 캐는 방법을 알려준다. 투박하지만 그래도 온 힘을 다해 숟가락을 땅에 꾹꾹 박아 넣고 꺼낼 때면 어린 쑥하나에 땅속 흙이 가득 함께 쏟아져 나온다. 흙이 때론 아이 얼굴로 날아들 때면 눈을 꿈뻑이며 엄마를 찾는다.
엄마는 아이의 얼굴과 몸에 붙은 흙을 털어주고 눈을 억지로 열어서 후후 불어댄다. 그러기를 또 한참. 들어왔던 입구 쪽을 보니 집들의 그림자가 엄마와 아이 쪽으로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엉덩이를 탈탈 털고는 주섬주섬 물건들을 챙긴다. 딸아이는 한 손에는 비닐봉지, 또 한 손에는 엄마 치맛자락을 움켜쥐고는 콘크리트 경계선을 향해 걷는다.
돌아온 오후부터 밤늦게까지 가스레인지 위에는 찜기가 쉴 새 없이 하얀 증기를 뿜어내는 덕분에 온 집안이 촉촉하다. 그리고 향긋하게 퍼지는 쑥 내음은 이상하게 잠이 솔솔 오게 한다. 딸아이는 거실 한 귀퉁이에서 언제인지 모르게 낮잠 곯아떨어지고 엄마는 여전히 달그락 바쁘다.
늦은 저녁에는 하얗고 보송한 쑥털털이(쑥버무리, 경상도 방언)가 한가득해진다. 달달하고, 향긋하고, 쫄깃한 이맛. 이 봄 어린 쑥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웠고 하얀 눈 속에 홀로 푸른 소나무 마냥 초록초록 존재감을 뽐냈다.
그렇게 완성된 쑥털털이는 한번 먹을 양만큼 봉지, 봉지 쌓여 냉동실로 들어가 자리 잡는다. 이렇게 엄마는 한동안 아이들 간식 걱정 하나 덜었다.
2024.
하루종일 정신없이 일을 하고 출퇴근 3시간이 넘는 길을 보내고 집에 오면 녹초가 된다. 저녁 식사 후 아이와 몇몇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하품이 쏟아진다.
그런 일상 중 퇴근길에 현관 앞 스티로폼 박스를 만날 때면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친정에서 이것저것 챙겨 보내신 모양인데,
‘ 냉동실 자리도 없는데…… 냉장고 정리 좀 해야 이것들 들어갈 텐데……’
한숨만 난다.
일단 씻고, 저녁 차리고, 아이 케어 해줄 동안 그 박스는 열어볼 엄두도 못 내고 시간이 지나간다. 평소 같으면 잠자리 들 시간이 되어서야 박스 테이프를 뜯어본다.
‘ 테이프는 뭘 이렇게 많이 감아 둔 거야’
투덜거림 장착하고는 박스 안에 물건들을 하나, 하나 정리 시작한다. 죽순, 조개, 생선들 다 손질되어 냉동고에 넣기만 하면 되는데 그래도 왜 이렇게 반갑지만은 않은지. 채소며 건어물도 다 챙겨 넣고 나니 박스 맨 아래 칸에 봉지 봉지 쌓인 쑥털털이가 눈에 들어왔다. 작은 메모도 함께.
‘ 올해 첫 어린 쑥으로 만든 털털이’
이미 배는 부르지만 전자레인지에 돌려본다. 금세 집안에 쑥냄새가 퍼지고 뜨거운 쑥털털이는 맛깔스럽다. 후후 불면서 한입 베어무니 쑥들이 줄줄이 따라 나온다. 딸 줄 거라고 많이도 넣으셨나 보다. 초록이 가득하다.
‘ 역시, 엄마 쑥털털이가 제일 맛있네’
그제야 좀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 어린 쑥을 찾으러 봄 들판을 얼마나 돌아다니셨을까. 혼자서 다니신 건 아닌지, 뭐라도 챙겨 드시는지. 걱정도 밀려온다. 언젠가 엄마가 말씀하시기를 봄이면 나와 봄마실 겸 쑥을 캐던 그때가 자주 생각이 나신단다. 너무 행복한 기억이라고.
너무 멀지 않은 어떤 봄에는 다시 한번 엄마랑 같이 쑥 캐러 나서봐야겠다. 쑥털털이 만드는 것도 배워둬야지 싶다. 이 맛을 찾을 사람이 주변에 꽤 많다.
어린 쑥이 올라오는 봄이면 잠시나마 추억으로 위로를 받는다. 나도, 엄마도. 내일은 전화 한 통화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