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방법
● 야심한 새벽, 한적한 도로 위를 누비는 드라이브는 우울한 자본주의를 향한 인간의 비겁한 외침이다. 경쾌하지만 묵직한 엔진 소리는 언제 들어도 열정과 무기력을 무마시키는 안도감을 선사한다.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을 잠재우는 묘한 안도감, 프로메테우스로부터 불 조각을 몰래 받았을 인간의 감정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작가를 꿈꾸는 C는 오늘도 늦은 퇴근이다.
가볍게 액셀에 발을 올려놓는 것만으로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초월하여 지구의 중력도 거스를 수 있다. 감각적인 플레이리스트와 함께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느끼며 고독한 자신의 존재도 뺨을 스치는 바람처럼 날려 버린다. 무엇인가 빠르게 나의 뒤로 사라진다는 느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다. 속도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집착은 여기에서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더 빠르게'는 더 많은 것을 잃고 있다. 지나친 풍경 중에는 '나'를 변화로 이끌 기회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빨리한다는 것은 효율성에 대한 경배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효율을 높이는 또 하나의 방법은 같은 시간에 '더 많이' 하면 된다. 무조건 많이 하다 보면 그중에 가치 있는 것도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한편으론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틀린 말은 아니지만, 위험한 생각이다. 노자는 『도덕경』(현대지성, 2018)에서 "하늘의 도는 자신의 남은 것을 덜어내어 부족한 것을 채운다. 그러나 사람의 도, 인도人道는 반대로 남의 부족한 것을 빼앗아 이미 넘치는 자신의 것에 더한다(天之道, 損有餘而補不足。人之道則不然, 損不足以奉有餘。)."라고 말한다. 자연의 섭리와 다르게 끊임없이 채우기만 하다 보면 내 주변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신에게 남는 것을 베풀 줄 알아야 사람도 모이고 지혜도 모이는 법이다. 따라서 '더 많이'의 가치를 높은 효율성에 두는 것은 착각이며 오히려 허탈한 공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더 빠르게' 그리고 '더 많이'를 맹목적으로 쫓다 보면 '나'를 찾을 기회도 사람들과 함께할 기회도 사라진다.
반면에 여유 있는 산책은 숨 쉴 뜸 없는 우리에게 오아시스 같은 존재다.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가 그랬듯이 길을 걷는 것만으로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다. 코스모스의 작은 극장인 지구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지 못한 호모 사피엔스가 존재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길 중 하나가 산책이라고 생각한다. 느긋하게 그리고 온전히 풍경을 즐기며 걷다 보면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지나치는 풍경보다 즐기는 풍경이 훨씬 아름다운 까닭이다. 그렇게 느리게 걷다 만난 사람들과 나누는 반가움은 우리의 삶을 더욱더 풍요롭게 만든다.
독서에 있어서 우리가 속독(速讀)과 다독(多讀) 보다 숙독(熟讀)을 지향해야 할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선 '숙독하다'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1) 글을 익숙하게 잘 읽다. 2) 글의 뜻을 잘 생각하면서 차분하게 하나하나 읽다.'이다. 뜻을 새겨 가며 자세히 읽는 정독(精讀)과 유사하지만 이보다 한 단계 발전된 형태의 독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읽었으면 달라져야 진짜 독서』(북포스, 2018)에서 서정현 작가는 숙독 의미를 자신만의 언어로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숙독은 정독 + 사유 + 체화로 구성된다." 책을 읽기 위함에 있어서 '정독'만으론 부족하다. 밑줄과 메모 그리고 요약을 이용해 주체적인 '사유'로 나아가야 하며, 반복 읽기와 같은 '체화'하는 과정을 통해 숙독은 완성된다. 그렇다면 숙독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독서에 있어서 우리는 속독과 다독보다 숙독(熟讀)을 지향해야 한다.
숨 고르기
운동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인터벌 트레이닝을 실행하는 것처럼 독서에도 숨 고르기가 필요하다. 적당한 멈춤은 단순히 쉰다는 의미를 넘어 지금까지의 상황을 회고하고 보다 나은 다음 실행을 준비할 수 있는 계기다. 게다가 개인별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의 집중력은 한계가 있다. 뚫어지게 책을 쳐다본다고 더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책 읽기가 벅차다고 느껴지면 가만히 책갈피를 꼽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주변을 조금 서성거리면 된다. 물을 한잔 마셔서 지친 뇌에 수분을 공급하는 것도 좋다. 실내를 벗어나 상쾌한 공기를 폐로 보내고 고생한 눈을 위해 푸른 하늘을 지긋이 바라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래야 더 길게, 더 멀리 책과 함께 할 수 있다. 숙독은 길고 멀리하는 독서다.
완벽한 발명품
한 챕터의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면 바로 다음 챕터로 넘어가지 말고 책의 맨 앞으로 돌아가 표지, 제목, 목차, 저자 이력 등을 한 번씩 더 읽어보자. 상상과 예측만으로 대했던 책의 표지 이미지와 제목이 읽은 챕터가 늘어날수록 다르게 다가온다. 목차는 지금 내가 책의 어디까지 읽었는지 알려주는 GPS다. 왜 이런 순서로 글을 배치했는지 상상하다 보면 저자의 내면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다. 맨 처음 책을 고를 때 스치듯 읽었던 저자의 이력도 이제는 어떻게 이런 글을 쓰게 되었는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시작한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32~2016)의 말처럼 책은 완벽한 발명품이다. 천천히 들여다볼수록 더 완벽해진다. 숙독은 책을 완벽하게 만든다.
공감과 비판
공감과 비판은 동일한 현상의 서로 다른 측면이다. 독서에서 공감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책과 언어라는 한계를 넘어 할 수 있는 독자와 작가의 정신적 교감이다. 책에 있는 글자를 읽었을 뿐인데 사랑하는 작가가 생기는 이유도 공감 때문이다. 작가가 좋아하는 풍경을 같이 좋아하고, 작가가 사랑하는 인물을 같이 사랑하면서 그 애정의 깊이는 더욱 깊어진다. 하지만 연애에서도 무조건 동의한다고 둘 사이의 관계가 발전하지 않는 것처럼 작가의 오류를 정당하게 비판할 줄 알아야 관계도 건강해진다. 나의 비판을 작가가 봐줄 리 없겠지만, 작가가 아닌 나를 위해 객관적인 입장이 될 필요가 있다. 애정이 담기지 않은 지적은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다. 이렇게 독서는 저자와 독자의 끈끈한 대화다. 공정한 공감과 애정 어린 비판은 속독과 다독만으로는 하기 어렵다.
한 손에 펜을 들고
『제텔카스텐』(인간희극, 2021)의 저자 숀케 아렌스는 "정말로 해야 할 일은 책을 읽을 때 펜을 들고 메모하는 것이 전부(노트를 펴고 책을 읽어라)."라고 말한다. 밑줄, 메모, 필사, 나만의 강조 표시 무엇이든 상관없다. 마음에 드는 문장, 나중에 인용하기 좋은 문단, 기억해야 할 단어를 만났다면 일단 무엇이든 흔적을 남겨보자. 또렷한 기억보다 흐릿한 메모 자국이 났다. 손을 움직이며 읽으면 눈으로만 읽을 때보다 느릴 수 있지만 남는 것은 확실히 많다. 흔적도 남고 기억도 남고 추억도 더 많이 남는다. 마음에 드는 노트나 필기구와 함께하는 독서, 숙독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길이다.
물론 숙독이 독서의 모든 폐단을 한 번에 잠재울 수 있는 절대적 해결책은 아니다. 드라이브가 인간에게 주는 긍정적인 면이 있는 것처럼, 지식이 아닌 정보를 얻기 위해 빠르게 읽고 넘어가야 하는 순간도 분명히 있기 때문에 속독이 유용한 경우도 있다. 또한 일정한 수준의 독서량이 독서의 질적 전환에 필요하다는 점에서 다독이 필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럴 때마다 떠올려야 할 생각이 있다. 정보의 빠른 습득과 읽은 책의 양은 독서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사유의 확장, 자아의 발견 그리고 지혜로의 접근이야말로 독서의 진정한 목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이루는 방법은 숙독에 있다. 단순한 독해 차원의 독서를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해결책이 바로 숙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