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방법
● 상상력은 관계에 대한 적극적인 고찰이다. 인간의 상상력은 조물주가 가졌던 공허에서 존재를 창조하는 능력이 아니라 기존에 인식하고 있었지만 파편처럼 널브러져 있던 개념, 사물, 사유들의 관계를 새롭게 발견해 내는 능력이다. 즉,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의 관계를 새롭게 정리하고 정의하는 것이 상상력의 실체다.
부드러운 치즈 케이크와 상큼한 딸기의 맛은 각각의 존재 자체만으로 이미 완벽하다(개인적인 의견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당연하겠지만, 두 음식이 개발될 때 둘의 궁합을 고려했을 리 없다. 하지만 두 가지 음식을 동시에 먹을 때의 맛을 상상한 최초의 사람 덕분에 우리는 '완벽한 맛을 초월하는 맛'을 감상할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라 냉면과 갈비, 토마토와 모차렐라 치즈 그리고 고구마와 김치처럼 상상력 덕분에 1 더하기 1이 2가 아니라 3 이상의 시너지 효과를 나타내는 경우는 수없이 많다. 이처럼 환상적인 궁합의 첫걸음에는 항상 상상력이 있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 '독자'라는 역할에 무조건 충실해야만 훌륭한 독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독자가 '읽는 사람'이라는 역할에 얽매이다 보면 작가와의 관계가 불평등해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해도 수용밖에 할 수 없는 입장은 한계가 분명하다. 그리고 모든 작가가 완벽할 것이라는 착각은 버려야 한다. 느낌표까지 사용하며 참이라고 강조했던 명제를 5페이지도 못 가서 거짓이라고 번복하는 것이 작가다(필자가 그랬다). 독자와 작가가 동등한 입장일 때 독서는 진지한 대화로 거듭난다. 독서가 일방적인 공급과 수용이 아닐 때 독자와 작가의 관계는 발전한다. 다시 말해 독자가 읽는 역할에서 벗어날 때 능동적인 독서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독자가 '읽는 사람' 말고 할 수 있는 역할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영화 이야기를 잠시 해야겠다. 영화를 감상할 때 작품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재미있고 유용한 방법이 있다. 주인공뿐만이 아니라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역할이나 감정에 몰입하면 그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장면들이 새롭게 다가오는 경우가 자주 있다. 나아가 화면 밖의 상황이나 카메라 뒤의 세계를 상상하면서 감상하면 감독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선명해지기도 한다. 내가 촬영 감독, 미술 감독, 음악 감독, 스턴트 감독이라면 어떻게 했을지 상상하면서 감상하면 작품의 재미를 배로 늘릴 수 있음은 물론이고 그들(카메라 뒤에서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의 감정도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잘은 모르지만 이렇게 다양한 역할을 상상해 보는 것이 '작품을 입체적으로 감상한다'라는 말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이제 다시 독서 이야기(독자의 역할)로 돌아오자. 독서에 상상력을 더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리고 독서에 상상력을 더한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바버라 베이그는 『하버드 글쓰기 강의』(에쎄, 2011)에서 "상상력은 감각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것을 마음속에 그림으로 그려주는 정신적인 기능이다."라고 했다. 눈치 빠른 사람은 이미 알아챘겠지만, 책과 책 너머에 있는 독자의 역할들을 상상해 보는 것이 바로 독서에 상상력을 더하는 일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감정과 상황을 상상하고, 책 밖에 있는 작가의 역할에도 몰입해 보면서 작품을 더욱 입체적으로 감상하면 된다. 읽는 사람의 역할을 넘어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쓰는 사람으로 빙의(憑依)하면 책을 낯설게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
문학 작품에 한정된 이야기 같지만 비문학 작품도 마찬가지다. 이런 논리를 전개한 이유는 무엇일지, 저런 비유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지, 나라면 어떻게 썼을지 작가의 집필 상황을 상상하면서 읽는다면 그 책에 대한 훨씬 폭넓은 이해가 가능하다고 본다. 이렇게 상상력을 동원하면 책을 입체적으로 읽을 수 있다. 게다가 상상력이 더해진 독서의 추억은 우리의 뇌리에서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필자는 이것에 '상상 더하기 독서'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 이제, 상상 더하기 독서를 실천하는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상상력을 동원하면 책을 입체적으로 읽을 수 있다.
역할 놀이
롤플레잉 게임(Role Playing Game, RPG)은 참가자들이 각자에게 할당된 캐릭터를 조작하고 서로 협력하여 가상의 상황에서 주어지는 시련을 극복하는 게임의 일종이다. (출처: Wikipedia) RPG는 책으로도 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몰입과 상상력뿐이다. 감정을 이입할 주인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혹은 설명하려는 주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몰입의 대상을 살짝만 바꾸면 된다. 그리고 다양한 역할과 주제에 집중할수록 독서의 질은 오히려 올라간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민음사, 2018)에서 독자들에게 카레닌이라는 개에 몰입할 기회까지 주지 않았던가.
나만의 제목
책의 내용과 제목이 어울리지 않아 불편하다면 내가 직접 제목을 지어주는 용기를 발휘해 보자. 책에 가장 적확한 제목을 상상하는 과정은 책을 요약하고, 책의 핵심을 파악하는 지름길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와 표현을 노트에 직접 써본다면 더욱 효과가 좋다. 그렇게 결정된 제목은 훗날 쓰일 나의 서평 제목으로 활용되면서 제대로 주목받게 된다.
친구에게
친한 친구에게 설명해 주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가정해 보자. 책 전체를 하기 힘들다면 한 챕터만 설명한다고 가정해도 좋다. 어떤 상상도 없이 무작정 책을 읽을 때보다는 잘 읽고 싶지 않을까. 분명히 한 줄이라도 밑줄을 더 치게 되고, 한 문장이라도 더 기억하게 된다. 어려운 부분을 어떤 비유를 들면 이해시키기 쉬울지 고민한다.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책에서 제시한 사례 이외의 다른 자료까지 찾아볼지 모를 일이다.
설명할 때 사용할 효과적인 단어와 문장을 떠올리니 고개를 끄덕일 친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왠지 뿌듯하다). 저자의 메시지를 명확하게 나타내는 키워드는 무엇인지, 책 전체의 핵심을 가로지르는 문장은 어떤 것인지, 가장 공감했던 부분은 어디인지 선택하고 비교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요약하는 능력도 키울 수 있다. 만약 친한 친구로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면 부담스러운 담당 교수는 어떤가? 직장 상사는 어떤가? 상상력의 한계는 마음먹기 나름이다.
이미지 독서
조미정 작가는 『30일 완독 책방』(블랙피쉬, 2022)에서 "만일 여러분이 어떤 책을 읽어도 잘 읽히지 않는다면 머릿속에서 소설을 영화화 즉 이미지화해보세요. 독서를 잘하려면 어휘력만큼이나 상상력이 좋아야 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책에서 묘사하는 장면을 막연하게 떠올리는 것보다 '이 장면은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일 정도로 주인공 얼굴 가까이서 촬영하면 좋겠어.'라고 상상하면서 읽는 것이 공감하기에도 좋고 기억하기도 쉽다. 이렇게 문자를 이미지화하는 연습을 자주 하다 보면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사소한 일을 다르게 관찰하는 일에 익숙해진다. 추가적으로 이미지를 문자화하는 연습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이런 연습과 경험은 독서의 수준을 한 단계 올리는데 큰 도움을 준다. 상상력은 독서를 키우고 독서는 상상력을 키운다.
어렸을 때 책을 읽으며 펼쳤던 상상의 나래는 '지금의 나'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의 마음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 독서는 한결 풍성해진다. 작가가 어떤 감정으로 이 문장을 썼을지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 우리는 작가와의 깊이 있는 교감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갈 수 있다. 또한 뛰어난 상상력은 독서하는데 큰 보탬이 되고 반대로 탁월한 독서는 상상력을 키우는 훌륭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같이 상상 더하기 독서는 책을 잘 읽을 수 있는 기특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