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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SMO Oct 07. 2022

걸림돌을 디딤돌로

책을 읽는 습관

●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다. 답답하고 열악해서 위기라고 느끼는 상황도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바라보면 어려움을 타파할 기회가 분명히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모두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수승화강(水昇火降)의 자세로 미래를 내다보며 결연히 자신만의 길을 걷는 사람이 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란 그런 사람이다. 책 읽는 일이 당신에게는 심각한 위기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행복한 기회일 수 있다. 한 걸음 더 들어가서 독서 습관을 기르는 데 있어서 '재독(再讀)'과 '서평'은 위기일까 아니면 기회일까?


질문을 살짝 각색하면 우리가 원하는 주제에 훨씬 가까이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재독과 서평은 독서 습관을 기르는 데 걸림돌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디딤돌이라고 생각하는가? 사람마다 상황에 따라 대답은 다를 수 있겠지만, 무조건 질문에 알맞은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매몰되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생각을 획기적으로 전환한다. 아예 '재독과 서평을 독서 습관을 기르는 수단으로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판을 바꾼다는 말이다. 이제부터는 걸림돌이냐 디딤돌이냐가 아니라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꾸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예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으면 변화된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재독의 가치


한국인이란 정체성을 간직한 사람들은 1년에 두 번씩 같은 열병에 시달린다. 아무리 험난한 역경이 있더라도 향수를 찾아서 떠나는 그들의 강렬한 염원은 막을 길이 없다. 자연의 순리마저 거스르며 자신의 기원을 찾아가는 연어처럼 추석과 설이 되면 모두가 고향을 찾아 떠난다. 딱히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명절에 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하면 마음이 불편하다(평소에 자주 찾아뵙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누구나 겪는 괜한 자격지심 같은 것일까, 아니면 국가라는 시스템에 나도 모르게 길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고향에 가고 싶을까? 반대로 우리는 왜 고향을 떠났을까?


'그리움의 열병'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그리워서 고향을 찾는다. 뒷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놀이, 골목길의 마지막 귀퉁이를 돌아서면 맡을  있는 명태전 냄새가, 해묵은 농담도 반갑게 웃어주는 고향 친구의 웃음소리가, 마지막으로 그곳에 살았던 자신의 과거가 그립기 때문이다. 아울러 빽빽한 귀성행렬을 보며, 그리움이 나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식과 위로를 동시에 얻는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은 과거 자신이  흔적을 들추는 것과 다를  없다. 우리는 자신이 지나온 발자취를 다시 보며 추억하고, 반성하고, 미래로 나아갈 힘도 얻는다. 좋았던 영화를 다시 보는 것도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명절이 돼도 고향을 찾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 방향이 바뀌었을 뿐 원인은 같다고 생각한다. 귀성길은 더 이상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다. 필자도 처음에는 같은 책을 두 번 읽는다는 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막연한 느낌에 효율성도 떨어질 것 같고, 무엇보다 재미도 없을 것 같았다. 유명한 작가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재독의 기쁨에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읽은 책이 늘어날수록 나에게 맞는 책도 늘어나고 책에 대한 그리움도 커졌다. 그리운 마음에 집어 든 책에는 또 다른 내가 있었다.


처음에는 가볍게 목차만 다시 확인했다. 목차를 훑으면서 떠오르는 문장과 분위기가 추억처럼 다가왔다. 휘리릭 그 장면이 나오는 페이지로 가서 그때 읽으며 느꼈던 '나'의 감정을 다시 추억한다. 또 과거의 내 감정을 관찰하면서 변화된 지금의 나도 깨닫는다. 이렇게 예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으면 변화된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덧붙여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험난한 귀성길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처럼, 책에 대한 그리움은 독서 습관으로 연결된다. 습관은 의외로 그리운 마음과 잘 어울린다.


또한 귀성길처럼 재독도 위로를 건넨다.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사이언스북스, 2001)에 조각된 명문들을 다시 읽어보는 것은 지치고 힘들 때 힘을 얻는 필자만의 안식처이다. 담담하지만 따뜻한 칼 세이건의 문체는 한 편의 시가 되어, 모두의 가슴속에 희망의 씨앗을 심어 놓는다. 오래된 친구처럼 책과 함께한 시간이 쌓이면 그 책의 표지만 봐도 입꼬리가 올라가고, 그 책의 냄새만 맡아도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그리움을 공부하면 위로가 된다. 따라서 독서 습관은 그리운 책을 다시 읽을 때 기를 수 있다. 재독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서평은 독서의 완성?


특수한 경우에만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다. 독서 습관을 기른다는 말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책을 읽는 일이 일상에 깊숙이 녹아든 독서 고수라면 서평은 독서의 완성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책이 나에게 어울리는지조차 모르는 독서 초보자에게 서평은 독서를 미워하게 되는 원흉이다. 배움은 외부의 권유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성장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권의 책을 읽기도 버거운 사람에게 ‘서평은 독서의 완성’이라고 강조해봤자 무서운 속박으로 느낄 뿐이다.


헝가리 출신의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심리학 교수는 『몰입 flow』에서 "많은 사람들이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배움을 포기하는 이유는, 13~20년에 걸친 교육이 외적 동기에 의해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배운다는 것이 불유쾌한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당신이 독후감 쓰기를 그토록 싫어했던 이유는 강압적인 숙제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졸업이 추억을 회상하는 축제가 아니라 억압으로부터의 행방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학창 시절 내내 자기 내면의 목소리가 아닌 교과서라는 권력에 어쩔 수 없이 따랐다는 생각 때문이다. 우울한 현실이지만 진실에 가깝다.


따라서 서평은 독서 경험을 늘려가다가 '이 책에 대한 내 생각을 표현하고 싶다'라고 느낄 때 자연스럽게 써야지 처음부터 누군가에 확인받고 평가받기 위해 써서는 안 된다. 그리고 무엇인가 결과를 내기 위해 책을 펼친다면 독서 습관은 영영 기를 수 없다. 1) 처음에는 책을 이해하는 데 온전히 집중해야 한다. 2) 어느 정도 책 읽는 것에 익숙해지면 이제는 마음에 드는 문장에 밑줄을 치고, 빈 곳에 자기 생각을 메모한다. 3) 이것도 익숙해져서 여유가 생겼다면 한 줄 정도로 간단하게 나만의 리뷰를 남긴다. 책 전체에 대해 작성하는 것이 어렵다면 마음에 드는 한 챕터로 제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한 줄에서 한 문단으로 늘리고 여유가 조금 더 있다면 두세 문단으로 늘려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단계적으로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서평에 다가간다는 사실이다. 4) 이마저도 익숙해서 지겨울 정도면 이제는 읽을만한 서평을 써보자고 마음먹을 만하다. 이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서점에 있는 서평 쓰는 방법에 대한 책을 찾아 나선다. 그동안 익숙해진 독서 덕분에 서평과 관련된 책을 읽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나아가 ‘서평을 잘 쓰기 위해서는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실천한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독서는 어느덧 일상이 되고 습관이 된다. 독서 습관은 억지로 시킨다고 기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서평을 독서 습관을 기를 기회로 만드는 비법은 천천히 자기 내면에 집중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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