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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SMO Feb 21. 2022

올림피아


알베르 카뮈가 그의 저서 『시지프 신화』에서 인용한 유명한 시다. 이 시는 인간의 주체성 회복을 강조하는 실존주의 철학의 핵심을 날카롭게 가로지른다. 카뮈가 전 생애에 걸쳐 치열하게 고찰했던 철학적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부조리'를 어떻게 인식하고 극복해야 하는가? 어차피 죽을 운명 우리는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카뮈의 대답은 '그러한 부조리와 담담하게 대면해야 하며, 열정적으로 반항해야 한다.'였다.


한편 시의 주인은 고대 그리스에 살았던 핀다로스이다. 그는 금수저 출신으로 기득권과 지배층의 대변인이자 시인이었다. 그의 화려한 언어 마술은 소크라테스도 따라 할 정도였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그를 '시인들의 왕자, 왕자들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기원전 그리스에서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거나 각각의 폴리스가 섬기는 신을 기리기 위해 경기를 치르는 일이 흔했다. 육상 경기가 주 종목이지만 격투기와 전차 경기도 열렸다. 그러한 경기중 가장 유명했던 것이 올림피아 경기다.


고대 올림피아 경기가 처음 열린 시점은 보통 기원전 776년으로 인정되고 있는데, 이 연대는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발견된 비문에 근거를 둔 것이다. 고대 올림픽의 종목으로는 육상, 5종 경기(원반 던지기, 창던지기, 달리기, 레슬링, 멀리뛰기), 복싱, 레슬링, 승마 경기가 있었다(『고대 그리스사』, 토마스 R. 마틴). 올림피아 경기는 4년마다 열렸으며, 이 기간을 '올림피아드'(Olympiad)라고 했는데, 그리스인들은 이를 시간 단위로 이용하였다. 올림피아 경기는 고대 그리스에서 정기적으로 열렸던 범 그리스 대회의 순환 대회 가운데 하나였다(위키백과). 올림피아 경기의 승자는 지금과 달리 시와 조각상으로 칭송받았다. 핀다로스의 시도 그러한 우승자를 기리기 위해 창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로마 제국의 팽창으로 올림피아 경기는 역사의 뒤안길로 종적을 감추었다. 그러던 중 19세기 말에 프랑스 역사학자였던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 고대 올림피아 경기에서 영감을 얻어, 근대 올림픽을 부활시켰다. 우여곡절 끝에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1회 올림픽이 열렸다. 쿠베르탱이 올림픽을 개최한 목적과 이상은 올림픽 선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이를 위해 분투하는 것이고, 올림픽에서 가장 중요한 것 역시 승리가 아니라 참가 자체에 의의가 있다.
우리에게 있어 본질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잘 싸우는 것이다.


이렇게 쿠베르탱은 경쟁보다는 평화를, 승리보다는 인간애를 강조하기 위해 올림픽을 계획했다. 하지만 요즘 TV를 켜면 이러한 올림픽 선언이 탁상공론이 된 것 같아 씁쓸하다.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한참 진행 중이다. 하지만 예전만큼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올림픽 시청률이 지난 올림픽 대비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러한 무관심의 원인 중 특히 편파판정, 약물 복용과 도핑, 비매너, 자국 우월주의, 무분별한 광고 경쟁 등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남을 이기기 위해서 극단적인 방법도 서슴지 않는 행태는 선의의 경쟁이란 말이 무색해질 정도이다. 쿠베르탱의 이상과는 다르게 올림픽이 정치적 도구로 이용된 적이 이전에도 있었다. 나치 독일과 소련은 체제 선전의 장으로 올림픽을 적극 활용했다. 하지만 이번 베이징 동계 올림픽은 그 정점에 달했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 치른 최악의 올림픽이라는 불명예를 얻을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8세기에 시작된 올림픽은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호모 사피엔스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는 축제였다. 고대 그리스 폴리스 간에 '올림픽 기간에는 전쟁하지 말 것'이라는 암묵적인 약속은 올림픽의 목적이 무엇인지 잘 드러낸다. 승패를 떠나 무엇엔가 몰입하는 선수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이미 아름답다. 승자의 명예는 패자의 존경이 있기에 가능하다. 경기에 직접 참여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에게도 커다란 감동을 준다. 이렇게 동질성을 확인하고 타인의 감정을 공감함으로써, 문명의 진보에는 평화와 번영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것이 올림픽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선의가 자본주의와 국수주의 폐단의 활용 도구로 전락한 이 시점에, 카뮈와 핀다로스 그리고 쿠베르탱의 정신을 다시 돌이켜 보는 것은 올림픽의 진정한 목적을 상기시킨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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