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32~2016)는 1932년 이탈리아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에서 퍼스널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지식을 쌓은 사람이다. 에코는 중세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부터 현대의 대중문화와 가상현실에 대한 담론에 이르기까지 미학, 기호학, 문학, 에세이, 문화 비평 등의 영역에서 이론과 실천의 경계를 넘나들며 경이로운 저술 활동을 펼쳤다.
지식계의 T-Rex(티라노사우루스)로 불릴 만큼 엄청난 양의 독서에서 비롯된 깊이 있는 비평과 수필 글로도 유명하다. 에코의 이름을 알린 소설 『장미의 이름』은 40여 개국에 번역돼 3천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다. 이 소설로 프랑스 메디치 상을 비롯해 각종 문학상을 휩쓸며 세계적 작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후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바우돌리노』,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등 역사와 허구, 해박한 지식과 놀라운 상상력이 절묘하게 조합된 소설들을 발표했다.
에코는 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한 끊임없는 노력의 결실로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지성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펼쳤다. 그의 책은 고전의 반열에 올라 전 세계 지식인들의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독선과 광신을 경계하고 언제나 명석함과 유머를 잃지 않았던 그는 2016년 이탈리아 밀라노의 자택에서 암으로 별세했다. 그의 업적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의 힘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 그의 저작들은 명백히 보여준다.
위 인용문의 출처는 『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척하는 방법』(열린책들, 2021)이다. 이 책은 에코가 잡지 『레스프레소』에 <미네르바 성냥갑>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하던 칼럼 중 2000년 이후에 썼던 것을 모은 책으로, 그가 세상을 떠난 직후 출간되었다. 에코는 이 책에서 ‘유동 사회’라는 시대적 과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해야 하는지 다각적으로 사회 현상을 분석하며 제시한다. 또한 이로 인한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단초(端初)’도 함께 제안한 움베르토 에코의 마지막 선물이다.
특히 '우리 시대는 왜 영웅을 필요로 하는가?'라는 그의 단순하지만, 철학적인 질문은 우리를 깊이 있는 사유의 세계로 인도한다. 영화, 애니메이션, 소설, 드라마 등에서 특별한 능력을 갖춘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을 찾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토록 영웅에게 집착하는 것일까? 영웅이 쿨하고 멋있기 때문이라는 대답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많이 부족해 보인다. 에코는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갈릴레이의 생애』에서 영웅이 필요한 나라는 불행하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왜 불행할까? 그 나라에는 묵묵히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보통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보통 사람들이 없다면 그 나라는 필사적으로 영웅적 인물을 찾기 마련이고, 그렇게 찾은 사람에게 금메달을 나눠 주기에 급급하다.
사회의 부패가 심각할수록 제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가치가 저평가되는 경향을 보인다.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는 없어도 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가 원활히 돌아가기 위해서는 '평범한' 사람들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 실제로 사회라는 시스템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런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 다크 나이트는 고담 시티라는 가상의 도시에서 영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을 뿐이다.
태극기를 들고 애국가를 부르며 벅찬 가슴을 느끼는 것이 애국심일까? 화려하고 감동적인 사연을 들먹이며 나라 사랑을 강조하는 모습을 우리 주변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이런 모습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에 앞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매달 월급에서 꼬박꼬박 일정한 세금을 내며 직장생활을 이어가는 사람들, 지옥이라 불리는 출근을 견디며 오늘도 자신의 일할 곳을 향하는 월급쟁이들, 분단이라는 시대의 아픔에 묵묵히 자신의 꿈같은 청춘을 투자하는 젊은이들, 정부의 주요 정책을 맡길 공무원을 뽑기 위해 정당한 한 표를 행사하는 시민들은 나라가 망하길 바라서 그렇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러한 성실함이 화려하게 부르짖는 애국심보다 건강한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 제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들이 있기에 국가도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움베르토 에코가 '유동 사회'라고 명명한 요즘 세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1945년 8월 15일 이후로 독립운동가가 급격히 늘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목소리 큰 사람들이 주목받고 애국자로 인정받는다. 성실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정의의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정의보다는 '정의로운 척'이 더 주목받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걸출한 능력을 갖춘 영웅의 존재는 간절하다. 그래서 자신의 의무를 다한 것뿐인 사람이 '영웅'이 되기도 한다. 안타깝지만 부조리한 사회일수록 평범함은 수치와 모욕에 가깝게 해석된다. 실효성보다 보이는 것이 중요한 사회가 건강한 사회는 절대 아니다. 평범한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더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영웅이 필요 없는 사회, 평범함이 존경받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같이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