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이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 가운데서, 파편처럼 따로따로 널브러져 있던 개별 사실들 사이의 관계를 발견해내는 능력이다.
『언 다르고 어 다르다』·김철호
억지스럽지만 위 문장을 수식으로 표현하면 '상상력 ≒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상상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이 아무런 바탕도 없는 곳에서 마법처럼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뒤집어 말하면 알고 있는 것들의 관계를 끊임없이 고민할 때 상상력은 배가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는 것이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인간은 자신의 어휘력의 한계만큼 상상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글을 쓸 때 항상 부족한 어휘력을 고민하는 필자에겐 굳이 "생각도 일종의 언어이다."라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끌어오지 않아도 쉽게 수긍할만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사유 능력 혹은 상상력은 그 자체가 목적인 개념 중 몇 안 되는 소중한 것이다. 인생에서 사유와 상상력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언어를 습득하는데 상상력은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고, 특정한 문명이나 문화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언어의 이해는 절대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는 종교와 더불어 ‘문명의 두 기둥’이라 불리기도 한다.
김철호 작가의 『언 다르고 어 다르다』(돌베개, 2020)는 '슬기로운 낱말 공부'라는 부제처럼 독자들의 언어생활을 돕는 책이다. 우리말 어휘들을 체계적이고 다양하게 제시한다. 비슷한 의미를 지닌 한자 의미소 두 가지로 결합된 단어의 의미와 뉘앙스를 정확히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이 책의 주를 이룬다(예를 들자면 ‘언어’의 ‘언’[言]과 ‘어’[語]는 모두 ‘말’로 풀이된다).
이러한 책의 특성은 독자들의 어휘력과 문장력을 키우고, 나아가 언어를 통한 상상력을 기를 수 있도록 돕는다. 이는 우리가 쓰는 말과 글의 근본을 생각하게 해 줌으로써, 단어들의 진실된 의미를 알면서 사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신의 어휘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에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상상력 ≒ 관계
상상력과 관계의 연관성을 뒷받침할만한 사례로 아이폰을 생각할 수 있다. 2007년 1월 9일, 아이폰을 처음 세상에 알리는 프레젠테이션에서 청바지에 검은색 터틀넥을 입고 소매를 살짝 걷어 올린 스티브 잡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무슨 말을 할지 모두의 기대 어린 시선이 그를 주목할 때, 그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은 "An iPod! A phone! and an internet communicator!"였다. 아이폰이라는 위대한 상상력은 MP3 플레이어, 핸드폰, 인터넷 브라우저의 관계를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였다.
당시에 이 세 가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너무 흔했다. 너무 흔해서 당연한 것이었지 관계를 고민할 대상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고민했고 상상력을 실제로 구현했다. 스마트폰이라는 문명의 이기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가 있지만, 아이폰의 출현이 IT는 물론 경제, 정치, 사회, 문화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할 것이라고 본다. 유명한 CEO는 많이 있었지만 스티브 잡스와 비슷한 영향력을 발휘한 CEO는 거의 없었다.
책도 관계의 산물이다. 특히, 우리가 사랑하는 문학작품도 결국 관계에 대한 치열한 고찰의 산물이다. 책은 단어와 단어의 관계에서 출발해서,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 챕터와 챕터의 관계로 되어 있다. 나아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 간의 관계, 그 안에서 발생한 사건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사유에서 작품의 의미와 가치가 발현된다. 문학작품을 작가 상상력의 총체라고 말할 때, 그 상상력의 실체는 파편처럼 펼쳐져 있던 기존 사실들의 관계를 정리하고 다듬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의 사전적 정의는 있을 듯한 가공의 사실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꾸며낸 이야기, 다시 말해 개연성이 있는 허구의 이야기다. 이러한 소설의 빠질 수 없는 특성 중의 하나가 바로 진실성이다. 꾸며낸 이야기지만 인생의 진실이 담겨있어야 '작품'이라 부를 수 있다는 말이다. 만약 작가의 상상력이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사실들의 관계에 대한 치열한 탐구에 근거한다면, 진실성은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지 않을까?
물론 공허한 '무'에서 '유'를 창조한 마법 같은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막연하고 관념적이다. 하지만 기존에 알고 있던 평범한 것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그 평범한 것들의 관계에서 상상력을 실현하는 일은 더 가깝고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상상력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위대한 일이라는 부담스러운 말보다는, 주변을 유심히 관찰하다 보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해 이야기할 거리가 생기기도 한다는 말이 자연스럽고 편하다. 상상력이 필요하다면 너무 평범해서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내 주변부터 돌아보자. 그 흔한 일상 속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기발한 아이디어가 담겨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