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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Jul 10. 2024

하얀 천사 VS 검은 천사

 인간의 마음은 늘 검은 천사와 하얀 천사가 싸운다. 100% 선한 사람이 없듯, 백 프로 악한 사람도 없다. 우리의 마음은 기쁘고 노하고 슬프고 즐거운 희로애락의 감정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악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이 처음 들었던 것은 나의 유년 시절의 기억으로 거슬러간다.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을 따라 교회에 다녔던 나는 옆집에 사는 친구를 따라 성당에 처음으로 가보았다. 성당은 왠지 교회와는 다른 분위기가 들었다. 교회의 자유롭던 주일학교 분위기와는 다른 엄숙하면서도 숭고한 분위기가 느껴지면서 처음 보는 멋지고 귀한 것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하얀 가운을 입은 신부님과 사제들, 머리에 뭔가를 쓰고 있고 미사 때마다 하얗고 동그란 무언가(영성체)를 먹었다. 유리창은 투명한 교회의 유리창과 달리 피카레스크 기법 같은 알록달록 색깔의 문양이 새겨 있었다. 묵주를 든 성모 마리아상과 커다란 십자가 나무 위에 가시로 만든 월계관을 쓰고 고개를 숙인 예수님의 십자가상도 여섯 살의 나의 눈에는 신기하고 오묘했다.


 그래서 토요일 오후에는 친구를 따라 성당에 나가 미사를 드렸고 주일에는 부모님을 따라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다. 어린 나이에 일곱 살 때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1년 정도 스스로 기독교와 천주교 이중종교를 가졌고 미사와 예배를 드렸다. 여기에 대해서는 부모님도 허락해 주셨다. 옆집 할머니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셨는데 손녀가 내 친구였고 친구의 이모 한 분이 수녀님이었고 내 친구 가족은 성당을 다녔기 때문에 나는 토요일마다 그 가족과 함께 성당에 나갔는데 친구의 부모님과도 잘 아는 사이라 특별히 반대하지 않으셨다.

 사실 미사에 나가는 이유는 신부님의 설교는 전혀 무슨 말인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순전히 성당에서 풍기는 엄숙하면서도 멋지고 편안한 분위기와 호기심에 이끌려 나갔다. 그러던 어느 미사에서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의 마음에는 검은 천사와 하얀 천사가 싸우고 있다는 설교 말씀에 귀를 쫑긋 세웠던 기억이 있다.   

  

 하늘에서 음악을 관장하던 천사 루시퍼는 지상으로 추락했다.

음악으로 천사들을 유혹하여 하늘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선한 천사들의 밝고 환한 마음을 어둡고 음침하게 타락시킨다는 이유였다. 지상으로 쫓겨난 루시퍼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타락시키고 세상의 질서를 풍기문란하게 만들었다. 어둠의 자식들은 검은 날개를 달아주었고 지상에서 왕좌를 차지한 루시퍼는 악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하나님은 지상의 피조물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하얀 천사들(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루시퍼와 대적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세상은 선과 악의 대 쟁투가 되었다. 인간은 하늘과 지옥 사이에서 밝음과 어둠의 경계에서 선택의 귀로에 서서 고통의 대해를 헤엄치고 있다.


 설교의 내용을 요약하면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우리의 삶과 우리가 사는 세계는 한 줄로 요약하면 선과 악의 대 쟁투이다. 머릿속에 각인되었던 내용인데 어린 시절에는 루시퍼라는 이름도 기억은 안 났고 보혜사 성령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검은 천사와 하얀 천사가 싸운다고 각인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두 번째 경험은 중학교 3학년 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강하게 공감했다. 데미안에서 나오는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의 집에서 사는 하녀가 그렇다. 하녀는 평소 얌전하고 바르며 싱클레어 집에서 저녁 기도를 드릴 때면 출입문의 문 옆에 서서 씻은 두 손을 앞치마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밝은 목소리로 함께 노래를 부른다. 그럴 때면 밝음과 올바름에 속했다. 그러나 그녀가 푸줏간의 작은 가게에서 이웃 아주머니들과 싸움을 벌일 때 딴사람과 같았고 다른 세계에 속했다.

 또 주인공인 싱클레어 자신도 아버지 어머니의 세계에 머무를 때는 선하고 밝고 맑게 머무르는 것 같지만 누나들과 싸우며 씩씩거릴 때나, 지루하지 않은 악당들과 탕아들이 나오는 금지된 세계 안에 살고 싶어 할 때가 그러했다.     





 마지막으로 스무 살 때 잭런던의 ‘야성의 부름’을 읽고 느꼈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늑대개인 ‘벅’은 온화하기 그지없는 주인과 가족들을 만나 반려견으로 살아가며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주는 존중과 사랑과 풍요와 평화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인간에게 납치되어 알래스카에 팔려가는데 인간들의 무자비한 구타와 채찍을 맞아가며 생존의 법칙에 눈을 뜬다. 복종을 강요받고 인간에게 버려지기도 하며 들개가 되어 떠도는 시베리안 허스키 떼에게 습격을 받아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맨몸으로 맞서야 했던 주인공 늑대 개 벅은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방법을 익힌다. 수천 킬로미터의 빙판길에서 어느 개보다 빨리 썰매 끄는 법을 터득하고 혹독한 추위를 피해 알래스카 대자연에서 무리의 우두머리인 스피치와 사투를 벌이다가 마침내 스피치를 궁지에 몰아넣고 물어뜯어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한다. 

 늑대 개 ‘벅’에게 사랑을 주었던 온화한 주인과 ‘벅’을 돈으로 여기며 무자비한 구타와 채찍을 가하는 주인, 선하던 벅이 머리를 써서 권력을 차지하는 것과 생존의 법칙을 터득하고 살아가는 방법은 인간의 삶과 인간의 세계와 닮았다.





 평화와 질서 안식과 용서와 사랑, 소란하고 요란한 것 음침하고 폭력적인 것들은 그 경계가 서로 닿아 있다. 두 세계는 얼마나 가까이 함께 있는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의 점액과 알 껍질을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두 인간이 되라고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 어머니들이 같다. 우리는 모두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이며 투척이지만 각자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 존경하는 위대한 작가 헤르만 헤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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